[새로나온책] ‘나’는 산업화로 소아마비 걸린 대자연
[새로나온책] ‘나’는 산업화로 소아마비 걸린 대자연
  • 이소리 논설위원
  • 승인 2013.02.0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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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서순희 장편소설 <순비기꽃 언덕에서>

굿을 하고 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병명도 모른 채 앓았다. 가족들이 날마다 번갈아가면서 칭얼대는 나를 업어 달래느라 마당가를 서성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삼촌은 징징 짜는 나를 달래며 왜 자꾸 아픈 거냐고 같이 울기도 했다. 그때 삼촌 등에 업혀 있던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마당가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순비기나무의 보랏빛 꽃만은 지금도 기억한다. -18쪽, ‘굿’ 몇 토막

이 소설에서 “그때가 그리울 때면 이상하게 더욱 또렷이, 그때 본 순비기꽃이 내 눈앞에 어른거리곤 한다”(<굿>)는 주인공 ‘나’는 소아마비 때문에 걷지 못하는 열여섯 살 먹은 소녀 ‘봉희’다. 작가 서순희는 장편소설 <순비기꽃 언덕에서>(문학과지성사)에서 주인공 나(봉희)를 통해 사라진 고향과 잃어버린 살가운 정을 아프게 보듬는다.

순비기꽃은 바닷가 척박한 자갈밭에 고향 사람들처럼 뿌리 내린 낮은 나무줄기에서 피어나는 연보랏빛 작은 꽃이다. 이 꽃은 짙은 향도 나지 않고, 꽃모양도 아름답지 않지만 거센 바닷바람을 견디며 피어나는, 그야말로 주인공 봉희와 그 마을 사람들을 닮은 꽃이다. 작가는 이 순비기꽃에 1970년대 작은 바닷가 마을을 악어 같은 아가리로 집어삼킨 근대화에 시름하는 사람들을 빗댄다.

이 장편소설은 모두 6부에 34꼭지가 화력발전소에 짓눌려 사라져버린 그 아름다운 통틀 바다와 포구, 그 마을에서 쫓겨나 뿔뿔이 흩어진 살가운 고향사람들을 애타게 부르고 있다. ‘수청구지’, ‘굿’, ‘할머니의 꽃밭’, ‘반짇고리’, ‘바위산에 새긴 말’, ‘새 친구’, ‘새처럼 날고 싶다’, ‘화력발전소’, ‘뻘밭에 빠진 사람들’, ‘아픈 몸’, ‘무너진 바위산’, ‘사라진 삼촌’, ‘수청구지를 떠남’ 등이 그 아픈 기억들.

작가 서순희는 ‘작가의 말’에서 “무분별한 개발로 말미암아 농촌이 파괴되면서 작고 연약한 많은 정다운 것들이 사라졌다”고 되짚는다. 작가는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는 고향을 잃어버렸다”라며 “가난하지만 한데 뭉쳐 서로 돕던 그때. 이웃과 가족들의 끈끈한 사랑으로 지내던 어렸을 적 시골의 정취를 그리워하면서 매일매일 조금씩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작가가 “내 상처와 슬픔까지도 녹아 있는 이 이야기가 실의에 빠져 있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혹 이 소설에 나오는 ‘나’(봉희)는 곧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그 마을에 화력발전소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소아마비’를 앓고 있었던 고향사람들은 아니었을까.

소금기 짠 모래밭에서도 굳세게 자라는 ‘순비기꽃’

밀물 때가 되면 바다는 마을 앞까지 들어와 은빛으로 출렁거렸다. 납작하게 엎드린 집들이 금세라도 그 물빛에 녹아들 것 같았다. 이십여 가구쯤 되는 초가집들 사이는 드문드문 짠물이 고인 습지였다. 자갈과 모래가 섞인 그곳엔 사철쑥 갯씀바귀 통보리사초 같은 갯벌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마을 사람들은 근처 논밭에서 땅을 일구다가, 썰물 때가 되면 드넓은 갯벌에 나가 갯것을 잡았다. 힘들여 잡은 것들을 이고 지고 노을 진 바다에서 순비기꽃이 핀 둔덕을 걸어 나오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 속에 사진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다. 순비기나무 줄기는 소금기가 있는 모래땅을 잘도 기면서 아무 데나 우거져 있었다.

그 작고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이 내가 태어나서 열여섯 살까지 자란 ‘수청구지’(수청곶)이다. 수청구지 사람들은 마을 앞바다를 ‘동틀’이라 불렀다. 물이 밀려오면 하늘보다 더 넓고 짙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던 그 바다, 거기서부터 먼저 동이 튼다고 그렇게 부른 것일까? -9~10쪽, ‘수청구지’ 몇 토막

이 장편소설은 1975년 가을, 기차를 타고 고향인 수청구지를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주인공 ‘나’(봉희)가 잃어버린 그 고향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차분하게 되짚으면서 이야기문이 열린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심한 열병을 앓기 시작한다. 그 열병은 “돈 처들여” 씻김굿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간첩이 나타나 군인들은 제대는 물론, 외출도 휴가도 나오지 못”하는 그때 아버지가 낡은 군복을 입고 집에 나타난다. 무사히 제대를 한 아버지는 ‘나’를 “부랴부랴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병원에서는 소아마비라며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라며 “얼마 있다가 죽거나, 살더라도 건강하기는 어렵겠다”고 진단한다.

‘나’는 그때부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되었지만 “죽지 않고, 제 발로 못 걷는 사람”이 된다. ‘나’는 아홉 살까지 “언제나 그렇듯이, 뒷문을 활짝 열어놓고 핼쑥한 얼굴로 누워 밖을 내다”보면서 “뒷꼍 화단”에 눈부시게 피어있는 분꽃과 맨드라미, 백일홍, 해당화를 바라보면서 살아간다. ‘나’ 곁에는 할머니와 고모, 아버지, 어머니, 삼촌이 있다.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는 이 소설에서 ‘나’는 삼촌 등에 업혀 통틀 바다와 포구를 낀 논밭을 가꾸고 갯것을 잡으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과 바위산을 마음 깊숙이 담는다. 여기서 걷지 못하는 ‘나’는 그 아름다운 마을을 가슴 깊숙이 품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소금기가 짠 모래밭을 굳세게 잘도 기는 ‘순비기꽃’이기도 하다.

돈도 없구 힘도 없는 사람끼리 서로 도와야지 어쩌겠어요

화력발전소 문제 때문에 수청구지에 외지 사람들이 들락거린다는 얘기부터 입에 올랐다. 낯선 사람들이 수청구지 남자들을 읍내 룸 사롱으로 데리고 가 술 사주고 밥 사주면서 동틀에 화력발전소 짓는데 찬성하는 도장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물었다.

“이장님이 제일 잘 아실 텐데, 도대체 어떻게 되는 일인가유?”

“면사무소에서는 묻는 말에 대답은 않구, 국가사업이라구 마냥 지시만 허니께, 나두 잘 물러. 머지않아 보상을 시작할 거라구 허더먼.”

“보상이라면, 벌써 다 짓기루 결정한 거구먼? 그런디 이장이 잘 모른다니 이상허네. 참 이상허다구. 안 그런가?” -128쪽~129쪽, ‘화력발전소’ 몇 토막

그 아름다운 마을에 어느 순간 ‘근대화’라는 괴물이 나타나면서 ‘나’와 가족,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통틀에 ‘조국 근대화’를 상징하는 ‘화력발전소’가 반강제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말쑥하고 건장한 청년”들과 실랑이를 벌이지만 이내 “닭장처럼 철망을 씌운 트럭”에 실려 경찰차와 함께 어디론가 끌려간다.

그때부터 고요한 마을에는 “집이 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통틀 포구를 지키고 있었던 바위산이 “발전소 터 닦느라고 화약 터뜨리는 소리”에 깡그리 무너진다. 소아마비 때문에 걸을 수 없는 ‘나’는 사랑방 방문 앞으로 기어가 “내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광경”, “무너진다기보다 깨어진다고 하는 게 맞”(<무너진 바위산>)는 모습을 아프게 바라본다.

그래. 글쓴이도 수청구지처럼 아름다운 고향을 잃어버렸다. 글쓴이 고향 창원은 ‘통틀’이라는 아름다운 바다는 없었지만 바람이 불면 물결치는 ‘남면벌’이라는 드넓은 들판이 있었다. 그 들판에는 순비기꽃은 아니더라도 계절마다 우리들이 뱀딸기꽃이라 불렀던 양지꽃과 매화, 산수유꽃, 찔레꽃, 아카시아꽃, 쑥부쟁이, 구절초 등 갖가지 들꽃들이 곱게 피어나곤 했었다.

글쓴이는 ‘봉희’처럼 소아마비는 걸리지 않았지만, 내가 태어나 살았던 마을에서도 정부에서 마을 사람들 도장도 받지 않고 논밭에 무조건 ‘정부고시가격’을 매겨 불도저와 굴삭기를 들이댔다. 그때 우리 마을 사람들도 불도저와 굴삭기가 파헤치는 논밭에 드러눕다가 닭장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가 실성한 사람처럼 다 깨지고 있는 마을로 터벅터벅 걸어오곤 했다.

글쓴이 고향도 그렇게 창원공단이라는 공장 아래 깔려 죽고 없다. “거기 동틀 바다와 포구가 껴안듯이 만나던 곳에, 발전소 굴뚝이 서 있”듯이, 남면벌을 수놓으며 벼가 금빛으로 물결치던 그 곳에는 창원공단에 들어선 큰 공장들 굴뚝만 우뚝 우뚝 솟아있다. 수청구지 “마을 어귀에 있었던 왕소나무”(<수청구지를 떠남>)를 닮은 그 왕소나무도 사라지고 없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수청구지에 정 붙이구 살았는데, 또다시 살길이 막막하네요. 앞으로 떠날 집이 많으니, 이전의 수청구지는 없어지는 거나 같아요. 안타까운 일이죠...... 봉희 어머니! 자리 잡으면 나 좀 꼭 부르라구 봉희 아버지에게 전해주세요. 돈도 없구 힘도 없는 사람끼리 서로 도와야지 어쩌겠어요......” -230쪽, ‘수청구지를 떠남’ 몇 토막

작가 서순희 장편소설 <순비기꽃 언덕에서>를 읽고 있으면 정겨웠던 고향과 살가웠던 고향 사람들이 너무 그리워 눈물이 핑 돈다. 작가는 이 장편소설에서 지금도 산업화에 깔려 사라지고 있는 대자연을 가슴에 품고, 사람답게 사는 길을 되묻고 있다. 소아마비로 걸을 수 없는 주인공 ‘봉화’는 곧 산업화로 소아마비에 걸린 대자연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작가 서순희(필명 서희)는 1959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81년 MBC 라디오드라마 소재공모에 당선되었고, 1997년 문예지 <정신과 표현>에 단편소설 ‘늪속의 사내’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대천동 영번지> <낯선 길목에서>를 펴냈다. 2005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창작지원금을 수혜받았으며, 지금 고향에서 글쓰기에 매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