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연재] 한민족의 색채의식⑫
[특별기고-연재] 한민족의 색채의식⑫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
  • 승인 2013.02.0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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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
8.맺음말

한국의 전통 색채의식을 살펴보려면 음양오행(陰陽五行說)의 사상적 배경에서 형성된 오방위, 오방색의 원리를 알고 변모의 과정과 순환의 의미 등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색채의식은 서구의 과학적 분석을 통해 나타나는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색채가 아니라 자연 생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오방위 오정색의 복합적 대상에서 출발한다. 이 같은 색채의식 속에 남아있는 백색선호사상을 확대 해석하거나 아니면 잠시 스쳐가는 외국인의 견문록에서처럼 경제적 이유를 들어 백의민족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일반 서민들은 비싼 염색옷을 입을 수 없었고 유가의 소복 상용과 상복 착용이 일상화되었으며 상민(常民)에 대한 금염금색(禁染禁色) 제도가 더욱 백성들에게 흰옷(白衣)을 강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개화 이전에 서민들은 겨우 주(朱), 황(黃), 남(藍), 자(紫)색의 옷고름과 끝동, 호장이거나 머리댕기가 아니면 혼사용품과 상여의 장식용 매듭 정도에서 물색(染色)의 색채를 대하는 정도였다.

그 흔한 쪽색 마저도 상류층의 양반집에서나 겨우 물들여 입었을 정도로 엄격히 색 제한을 했던 이유는 색이 곧 신분계급을 나타낼 뿐 아니라 많은 의미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양(白色)을 한민족의 대표색이라고 할 수 없는 근거가 불가사찰의 채색문화와 궁중, 사대부의 색채문화에서는 그 세련됨이 극치에 이르렀으며 오방위, 오정색에 근거한 조형미가 몹시 화려했다는 데 있다.

한 민족의 특성을 색채의식과 결부시켜 말할 때 그것은 그 종족이 지향하는 이상과 철학에 관계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자의든 타의든 천부적으로 태양과 하늘을 우러르고 순결함을 숭상하는 백의민족임에는 틀림이 없다. 같은 인접국으로 태양에 대한 숭배사상을 공유해 왔으나 일본의 경우는 숭배의 대상 자체를 모상으로 하여 그들의 국기 안에 통째로 담았고 우리는 반대로 운행법칙과 우주의 원리를 이상으로 삼아 순환의 색상을 담았다. 양국이 똑같이 흰빛을 선호하고 순결과 청결을 앞세우면서도 국기에 드러난 엄청난 차이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다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양국의 색채의식에 나타난 어원론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 민족이 향유하고 있는 색채의식은 각 나라의 지리적 여건에서 오는 기후와 풍토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역사의식과도 연계되어 있어, 쉽게 색채 하나만을 단정지어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래서 색채이론을 글로벌시대에 걸맞게 국제규격에 맞추어 표준화한다는 것은 효율성과 기능성을 절대가치로 삼는 산업사회의 양산체제 속에서 수요와 공급의 경제논리로 보았을 때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된다. 하지만 한 민족이 누리는 일상의 생활문화 속에서 아무리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 하더라도 타의에 의해 미분화된 기능적 색채문화는 그 민족의 정서적 색채의식이 될 수가 없다. 

색감은 특별한 목적성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각자가 자유롭게 느끼는 인식의 범주이며 정서의 대상이지, 수리적이며 물량적인 분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의 정서적인 색이름과 특수 기능의 광학적 계량적 색이름은 구분되어야 마땅하며 이 둘은 서로 적대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 관계를 유지해야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혼동하였을 때 우리의 전통문화는 무너지고 색채문화마저 물량주의가 주도함으로써 한국인의 생활 터전인 자연환경 안에 고즈넉이 아우르던 전통정서를 잃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오랫동안 그림을 직접 그리면서 작업을 통해 깨우친 바를 조심스럽게 기술해 본 것이다. 한국인의 색채의식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단계다. 여러 분야의 각도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한국의 자생미학을 정립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믿기 때문에 화가로서 창작경험에 바탕을 둔 미완의 글을 내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우리의 색채의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의미성(意味性): 우주 자연의 생멸 순환에 따른 음양오행사상에 근거한 오방위, 오정색에 대한 의미성 부여. (사신벽화, 단청, 탱화, 관복, 휘장, 관혼, 상제, 의례, 의궤, 회화, 조경, 건축)

■순결성(純潔性): 근본 바탕인 소지(素地)를 중시하는 자연주의 사상에 기초한 백색선호(白色選好)의 결백성과 모토톤의 단순성 추구. (서민 평복, 소복, 유복, 승복, 서예, 사군자, 수묵화, 단색화 등)

■대비성(對比性): 상부상생(相扶相生)의 음양사상을 기초로 한 보색대비 와 명도대비를 통한 순환적 대비성 제고. (선비복, 한복, 관복, 궁중복, 대례복, 태극기, 군기, 휘장, 자수, 공예, 화각장, 불화, 무화(巫畵), 관혼, 상제, 민화, 목칠공예, 칠보공예 등)

■은일성(隱逸性): 물아일치(物我一致)의 사상을 기저로 자연에 순응하고자 저채도의 천연채료와 간색의 인근색 대비를 실현함으로써 은일성 표출.(황칠 공예, 목가구, 회화, 평상복, 모시의상, 차경, 건축, 각, 실내장식, 제책(製冊), 상복, 유복(儒服), 선비복 등)

■해학성(諧謔性): 화랑의 풍류(風流) 정신을 바탕으로하여 ‘유어예(游於藝)’의 생활 속에서 낙천적 해학성 이입. (해학예술, 국악기문양, 민화, 풍속화, 놀이기구, 가면, 농악, 무용복, 마당놀이 등)
     
우리의 전통 색채의식은 단순한 색상의 표피적인 느낌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색상이 갖는 의미는 물론 내면의 색질까지도 파악하려 하며 나아가서 색채의 인격성을 부여함으로써 색채를 신앙의 대상으로 신격화하기까지 한다. 그만큼 우리의 색채의식 속에는 자연의 생성, 소멸하는 순환의 원리와 오방색을 통한 풍부한 색감정을 지니고 있는 종합적인 색채감각을 갖고 있다.

특히 고문헌에 나타난 색명(色名)이 104가지나 된다고 하지만 순수한 한글로 완벽한 색 이름은 오로지 오방색에 의한 빨강, 파랑, 노랑의 유채 삼원색과 하양, 까망의 무채 이원색을 합쳐 오정색 뿐이다. 그 나머지 색 이름들은 모두가 조어이거나 어미에 ‘빛’이나 ‘색’자를 붙여 만들었고 그렇지 않으면 순전히 외래 한자표기의 색명인 것이다. 이렇게 많은 색명이 분화됐다고 해서 곧 우리의 색채의식이 발전된 것은 아니다. 정말로 색채미감이 뛰어난 민족이라면 먼셀의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빨강, 파랑, 노랑의 유채 삼원색과 하양, 까망의 무채 이원색을 합쳐 오정색의 고유 색 이름만 만들면 그만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색 이름이 오원색 그 이상의 고유 색 이름을 눈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것을 보면 참으로 그 뛰어난 색채미감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