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특명 ‘글 쓰는 연예인 잡아라!’
출판특명 ‘글 쓰는 연예인 잡아라!’
  • 이소리 기자
  • 승인 2013.02.2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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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1만 부 팔려… 가벼운 에세이보다 무게 있는 소설이 인기 ‘짱’

지난 1월 28일(월) 가수 루시드폴이 펴낸 단편소설집 <무국적요리>를 펼쳐보면 아주 기발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탕, 똥, 기적의 물, 애기, 행성이다, 싫어!, 추구, 독 등 모두 8편이 실려 있는 이 소설집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이야기와는 아주 다른 독특한 세계관과 스타일이 펼쳐져 있다.

루시드폴 소설 <무국적요리>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국적도 알 수 없고, 성별도 알 수 없다. 그야말로 모든 관계와 제도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캐릭터들이 나온다. 문학평론가 최재봉은 발문 ‘웰컴 투 루시드폴 월드’에서 “책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은 그 소재와 주제, 문법이 우리가 익히 알던 소설들과는 판이하다”라며 “문단의 영향과 경향에서 자유로운, 독자적인 상상력과 스타일로 무장한 소설”이라고 적었다.

“나는 목욕탕을 굉장히 좋아한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도피처 같은 느낌이다. 그런 목욕'탕'이 모티프였다. 주인공 마유는 평범한, 그다지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마유는 목욕탕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며 혼잣말을 한다. '이만하면 괜찮은데...' 물론 그건 탕 안에의 얘기다. 구멍가게에서 손으로 만져본 자신의 얼굴도, 술집 거울에 비친 모습도, 그러니까 '진짜' 세상에선 그저 초라할 뿐이다. 탕 밖의 세상에선 그 누구도 마유를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해주지 않는 것이다. 탕 밖이 '진짜' 현실이니까. -‘탕’ 몇 토막

가수로도 활동하는 루시드폴이 왜 갑자기 소설집을 내놓았을까. <무국적 요리>를 펴낸 나무나무 배문성 대표는 “루시드폴은 가수로서 음악적으로 자신의 창작 욕구를 충족했다”라며 “음악으로 다하지 못한 표현과 상상력을 새로운 도구로 풀어낸 것이 소설”이라고 설명했다.

그래. 요즘 이처럼 전업작가 아닌 연예인들이 쓰는 에세이나 소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연예인들이 에세이나 소설을 쓰는 것은 나무나무 배문성 대표 말마따나 스스로 몸담고 있는 연예가에서 미처 다 할 수 없었던 말이나 이야기를 나름대로 솔직하게 풀어놓고 싶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불황과 높은 물가 등으로 책이 팔리지 않아 허덕이고 있는 출판가에서도 연예인들이 쓰는 이러한 에세이나 소설을 크게 반기고 있다.

출판가에서는 이른 바 ‘특명’이라 할 정도로 글을 쓰는 연예인 끌어안기에 구슬땀을 쏟고 있다. 출판사들은 지금까지 수없이 쏟아진 연예인들이 쓴 에세이보다 소설에 더 눈독을 들이고 있다. 에세이는 연예인들이 매일 쓰는 일기가 될 수도 있고, 그저 끄적거린 메모를 합쳐도 되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가볍게 보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연예인들이 지난해 펴낸 에세이집으로는 배우 송혜교 <혜교의 시간>, 배우 하지원 <지금 이 순간>, 배우 유준상 <행복의 발견>, 가수 이효리 <가까이>, 가수 김범수 <나는 미남이다>, 가수 윤건 <카페 윤건> 등이다. 소설집으로는 차인표 <잘 가요 언덕>, 구혜선 <탱고>, 이적 <지문 사냥꾼> 등이다.

출판사들이 연예인들이 쓴 에세이집과 소설집들에 매달리는 까닭은 두 가지다. 안정된 판매량과 낮은 진입 장벽 때문이다. 출판사 한 관계자는 “스타가 낸 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일정 판매 부수는 보장된다”며 “업계에서는 인지도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1만 부는 팔린다”고 귀띔했다. 이는 3000부를 출판사 손익분기점으로 봤을 때 3~4배가 더 팔린다는 셈이다.

출판사들이 에세이보다 소설에 더 매력을 느끼는 까닭은 또 무엇일까. 실제로 연예인들이 소설을 쓰는 것은 쉽지 않다. 소설은 가벼운 에세이와는 다르게 높은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 소설이 에세이처럼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내용으로 흘러간다면 어느 독자가 그 책을 사서 읽을 수 있겠는가.

배우 구혜선이 펴낸 소설 ‘탱고’를 기획한 펭귄클래식 이영미 대표는 “구혜선과 함께 그림책을 기획하던 중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작품을 봤을 때 문학적으로 완성도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며 “습작 수준의 글이었다면 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이적과 손미나 등이 쓴 소설을 이미 펴낸 바 있다.

차인표가 쓴 소설 <잘가요 언덕>은 위안부에 대한 생각을 그린 책이다. 강심호 살림출판사 국장도 “주변에서 작가 이름이 없는 원고를 가지고 와서 한번 봐달라고 요청했다. 원고를 보고 맘에 들어 책을 낼 생각으로 작가를 만나자고 했다. 바로 차인표였다”며 “작품이 우선이다. 소설은 에세이와 달라서 완성도가 떨어지면 오히려 비난을 받게 돼 스타의 이미지가 훼손된다”고 못 박았다.

출판사들이 연예인들이 쓴 에세이보다 소설에 더 무게중심을 두는 까닭은 판매부수 때문이다. 에세이는 많이 팔려도 1만 부에 그치지만 소설은 독자들 호기심을 더 자극할 수 있어 더 많이 팔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차인표 <잘 가요 언덕>은 2만 부, 구혜선 <탱고>는 1만부, 이적 <지문 사냥꾼>은 1만5000부 이상 팔렸다.

인기 있는 연예인들이 쓴 에세이나 소설들이 연예인들보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문인들이 쓴 에세이나 소설보다 더 잘 팔리는 세상. 전문 글쟁이로서 입맛이 씁쓸하다. 그렇다고 연예인들에게 책을 펴내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포퓰리즘으로 물들어가는 이때 ‘지식산업의 꽃’이라는 책까지 포퓰리즘에 빠진 게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