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뒷방이야기] 미술 중독증
[박정수의 뒷방이야기] 미술 중독증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3.02.20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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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예술은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에워싼 모든 상황에 대한 관찰과 변화에 대한 민감성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중증에 걸린 중독자처럼 습관적으로 붓을 잡고, 망치를 잡고, 마우스를 클릭한다. 그러면서 미술가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누가 알아주기를 기대한다. 그 ‘누가’는 내 친구이거나 주변사람들부터 시작이다. 그런데, 자신의 예술세계를 가장 이해해 주지 않는 이들이 자신의 친한 사람들이다.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와서 자랑스럽게 보여주면 반응이 영 신통치 않다. 아내이거나 남편이거나 부모이거나 상관없다. 이들을 감동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이들에게 칭찬 듣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그러면서 칭찬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팔리는 작품’을 제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변인들은 평면의 미술품에서 입체를 느끼지 못한다. 입시공부를 하면서 잘 그렸다고 칭찬받은 아그리파나 줄리앙, 비너스 석고 뎃상을 부모님께 자랑해도 부모의 눈에는 그저 연필로 그린 검정색 얼굴일 뿐이다. 입체감과 볼륨감 빛의 흐름을 아무리 설명해도 평면은 평면일 뿐이다. 입체는 중독자들만 알아본다. 그래서 미술 주변에는 조형중독, 소리중독, 행위중독이 많다. 예술작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정신을 표현하였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어떤 미술가가 온정과 따스함, 넉넉함과 포근한 고향의 기분으로 할머니가 쓰시던 화로를 시각화 시켰다 할지라도 그냥 화로일 뿐이다. 이 역시 중독자들만 알아본다. 예술이냐 비예술이냐의 구분은 여기에서도 가능하다. 중독자들이 알아보는 것은 예술, 건강한 주변인이 알아보는 것은 그냥 사물의 재현이 된다. 주변인들에게 칭찬 받기위해서는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면 가능하다. 이들이 아는 집을 그리고 이들이 아는 사람을 그리면 된다. 그러면 곧 취미활동이 된다. 예술인 것과 조금 덜 예술인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광신도가 종교를 지키고, 이념에 미친 이들이 정치를 유지한다. 미술중독자들이 오늘도 예술의 근간을 지키고 있다. 한번 맛을 본 이들은 다른 일을 하면서도 여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예술관련 많은 전공자들의 마음 바닥에는 중독현상이 있다. 언제든 다시 시작한다. 죄도 안 된다. 경찰 출동도 하지 않는 중독이다. 세월을 돌아 몇 십년 다른 일을 하다가도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중독된 예술을 찾는다. 문제는 스스로가 중독자인줄 모른다. 중독자들은 칭찬에 인색하다. 칭찬을 받고자 하지만 칭찬 받지 못함을 오히려 예술의 가치 기준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예술은 칭찬의 대상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그 무엇과 교환 가능한 사물이다. 예술작품을 칭찬받자.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예술작품을 칭찬해 달라고 요구할 필요도 있다. 칭찬의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왜, 자신의 예술작품이 칭찬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분명해야 한다. 예술가인 자신을 끼워 넣지는 말자. 예술가는 예술가일 뿐이다. 예술은 하나의 의미를 주장해도 무한 해석의 범위로 넘어간다. 때로는 단 하나의 주장이 세상의 아주 많은 것을 포용하기도 한다.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원하거나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 주기를 원하거나 선택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세상 용어 자체가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용어끼리 조합 되었을 때는 무한 확장 된다.

예술은 주어진 환경과 주어진 조건이 없다. 작품에 있어서 예술가는 전지전능한 창조자가 된다. 방목 상태에서 누구도 알지도 못했던 그러나 존재를 인정하는 어떤 정신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누구도 하지 못하는 어떤 기이성은 제외된다. 중독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다. 중독에서 깨어나서 예술작품을 연출로 이해하고 접근하면 주변인들이 알아봐 주기 시작한다. 당신은 중독자 인가........ 연출가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