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예술 치유의 힘, 김옥련 발레단의 <분홍신 그 남자>
[공연리뷰] 예술 치유의 힘, 김옥련 발레단의 <분홍신 그 남자>
  • 김인아 객원기자
  • 승인 2013.02.20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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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련 발레단의 창작발레 <분홍신 그 남자> 포스터
바람개비를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얀 옷을 입고 무대를 휘젓는다. 밝은 모습을 지녔지만 순수함과 쾌활함 이면에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구슬픈 감정이 기타의 선율과 함께 어우러진다. 이들은 한때 무대 위에서 열정을 불태웠던 예술가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 희망 요양병원에서 삶의 끝자락을 함께 하고 있다. 이때 한 여인이 휠체어와 목발에 의존해 등장한다.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그녀지만 오랫동안 몸으로 익혀온 발레만큼은 잊지 않고 있다. 음악의 선율에 맞춰 섬세하게 그려내는 몸짓에서 잃어버린 삶의 시간들이 되살아난다.

소설같이 시작되는 이 작품은 2008년 부산에서 초연 후 지속적으로 무대에 오른 김옥련 발레단의 주요 레퍼토리 <분홍신 그 남자>로, 지난 2월 17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펼쳐졌다. 부산에서 태어난 창작발레를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였다. 부산 춤 단체 중 처음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창작기금에 선정되었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 무대에 서는 부산판 춤 작품인 것이다. 수도권과 지방의 교류를 통해 예술 활성화에 기여한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한 의의가 있다.

기억을 잃은 여인은 춤을 추며 과거와 조우한다. 설레는 10대 소녀가 되었다가 애인을 만나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속삭이는 20대 숙녀가 되기도 한다. 남편과 함께했던 30대를 거쳐 40대 원숙한 여인이 되는 지난날을 그려보기도 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월광’이 피아노 선율로 무대를 채운다. 이때 김옥련은 빨간색 의상을 입고 원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현재의 아픔을 독무한다. 이원국은 분홍신 그녀의 남자로 빨간 자켓을 입고 아코디언과 바이올린의 협주에 맞춰 가볍되 노련한 몸놀림으로 시종일관 무대를 장악한다.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20대의 그들이 묘사된다. 발레리나 이영진, 발레리노 조한얼은 사랑을 표현할 때의 수줍음을 시작으로 풋풋한 사랑을 설레이는 감정으로 그린다. 가요 ‘꽃밭에 앉아서’가 소프라노 김현애에 의해 울려 퍼지고 그들의 사랑은 애잔한 파드되로 고조되었다. 이때 조한얼이 도약 후 몸 균형을 취해보거나 발레리나를 리프트함에 있어서 다리가 흔들리는 자세의 불안정을 보여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80년대 젊은이들의 모습이 영상으로 비춰지고 탱크와 방독면을 든 이원국이 무대에 오른다. 한국의 격동기를 버텨낸 한 예술가의 치열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장면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희망 요양병원에는 아픈 예술가들이 모여있다.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입원한 중년 예술가들이지만 공연은 장면마다 유쾌함이 넘쳐난다. 자신을 놓아 버리고 춤과 음악에 무아지경으로 빠져버린 예술가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피아노, 아코디언, 바이올린, 기타와 성악의 라이브 음악이 춤과 협업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공연예술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일반적으로 발레 작품은 명확한 주제선을 갖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무대장치와 음악을 적극 활용하기 마련이다. 무용이 작품을 주도하고 음악은 그 배경으로 기용되어 작품 전반을 이끌어갈 경우 음악은 다분히 한정된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음악이란 단순히 무용 작품의 배경으로만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각 분야의 베테랑 연주자, 성악가가 무용가와 만나 화합을 이뤄내며 몸의 움직임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것은 물론이고 음악이 작품의 극적 장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작품에 뛰어들어 작품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소프라노와 테너의 하모니가 돋보인 이탈리아 민요 산타루치아(Santa Lucia), 아코디언 연주의 러시아 민요 백학(Cranes), 바이올린 연주의 피아졸라의 망각(Oblivion) 등 우리의 귀에 친근한 음악들이 연주되면서 무대는 춤 작품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일종의 예술 총체극으로 보여지기도 했다. 이 같이 무용-음악이 작품 내에서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표현의 결과가 풍성해지는 느낌을 얻을 수 있지만 자칫 작품의 색깔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 없는 우려를 낳을 수도 있다. 그 해법이 무용가-음악가에게 달려 있음은 자명하다. 예술가들의 적극적인 예술 표현이 작품 전반에 긴밀히 녹아들어야 한다. 또한 예술 장르 간의 융합 작업에서도 대전제는 역시 스토리에 개연성을 더하고 설득력을 높일 수 있는 안무력과 서사 구성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여인이 분홍신을 신고 춤을 추는 동안, 그녀는 가장 행복해질 수 있을 뿐더러 분홍신을 신어야만 과거를 만날 수 있다. 발레동작을 기억하는 몸의 기억력이란 그간 치열하게 지켜온 그녀의 예술혼이었다. 그녀는 예술혼과 접목된 자신의 생애를 매 장면에서 여과 없이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분홍신으로 과거를 그리는 그녀에게서 아픈 예술가가 치유될 수 있는 것 역시 춤, 예술이었다. 이는 어쩌면 현재 병들어 있는 우리 시대가 예술의 힘으로 치유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대변한 것일지 모른다. 

사족으로, 2013년은 예술인 복지법이 시행되는 해이다. 그간 예술을 향한 열정만으로 헌신을 다해 예술혼을 불태운 예술인들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아픈 예술가가 지나온 시간을 되짚으며 예술을 통해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 이 작품의 저본(底本)이었듯이 현시대 예술인의 현실을 치유할 수 있는 진정한 예술복지가 2013년에 실현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