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안보, 생태 환경지역으로 거듭나는 강원도 화천(華川)
평화, 안보, 생태 환경지역으로 거듭나는 강원도 화천(華川)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 승인 2013.03.1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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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에서 신문사를 경영하는 친구가 화천 DMZ투어를 비롯한 전방 시찰을 다녀오면서 화천의 산천어 축제 행사 내용이나 소설가 이외수 씨의 감성 마을, 제7사단 칠성 부대나 오작교 주변 등 다양한 현지 모습을 알려줘서 화천 지역이 가깝게 느껴졌다. 몇 년전에 동해안의 항구들을 돌아본 뒤, 오대산 월정사를 들렀다가 화진포나 고성의 간성 쪽에서 철원 양주쪽으로 둘러 본 기억은 있는데 당시 시간에 쫓기던 터라 화천은 세세히 볼 수 없었던 아쉬움이 남아 있던 참이었다.

유구한 단일 민족의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대비를 못하였던 약소국이었기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대한제국은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지만 또다른 이념적 대립으로 인해 분단 국가라는 민족 상잔의 분열 속에 서로 총구를 맞대며 살고 있다. 이러한 본국의 분열로 인해 일본의 재일동포사회에서도 어제까지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던 이웃들이 민단과 조총련이란 대립관계로 대치하고 있는게 벌써 60년 세월이니 참으로 애환이 많은 한민족이다. 근대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몇 번 쯤은 그런 서글픈 민족의 자화상 앞에서 우울해진 적이 있으리라. 더구나 그런 상황 속에서 북한은 최근에 휴전협정조차 백지화 선언을 하고, 오늘(3월11일)은 판문점 직통전화까지 차단하고 나섰으니 한반도는 물론 재일 동포 사회의 남북 대립은 더욱 더 심각한 상황이 되고 있다. 마침 일본의 동북대지진 2주년에다 한국의 불안한 정세까지 들려오지만 미래를 향해 평화와 안보, 생태 관광환경 지역으로 거듭나려고 하는 [화천]의 댐 건설과 일본의 식민지하의 전력 정책 관계에 대해서 소개를 하려고 한다.

[물의 나라, 축제의 화천 나라]라고 불리는 화천군의 화천 1경인 파로호(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대붕호 혹은 구만리 저수지로 칭하기도 함)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식민지 정책상 필요한 전력 공급을 위해 수력발전소 댐을 세우며 축조한 인공 호수이다.

조선총독부에서 3-4회에 걸쳐 실시한 수력조사에 의해 제2차 수력조사 이후 수로식에서 저수지식/ 유역변경식/대형 댐식의 발전방식으로 바뀌게 되고, 대량의 수력자원개발로 인한 대량의 전력공급으로 식민지 공업화를 견인하게 되는데(河合和男「第二次水力調査と朝鮮総督府官僚の水力認識」참조), 저수지와 댐을 조성하여 수력발전소를 만든 것 중의 하나가 화천댐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북한 치하에 있다가 화천발전소 확보를 위해 1951년 5월에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중공군 3개 사단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 참여했던 조선족 출신의 조선의용군도 포함)과 북한군, 그리고 수 많은 국군이 목숨을 잃은 핏빛 어린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중공군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았던 곳이라고 해서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破虜湖)]라는 휘호를 내렸던다는 이 곳은 다양한 담수어가 잡히는 곳이라서 지금은 전국 최고의 낚시터로 불리기도 한다.

숱한 생명들이 전쟁이란 비극 속에서 사라진 곳이고, 화천댐 건설 착수 시기가 1938년의 일제 강점기 말기 였음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전시 노동자로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기에 근대사의 슬픈 역사를 넘어서기 위해서 화천군은 호수 저변에 묻힌 비애를 널리 알리며, 비무장지대를 포함한 국가생태문화 탐방로 507km조성과 더불어 세계적인 평화의 상징 지역으로 거듭나려고 하고 있다.

필자가 화천댐 자료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한국에서 환경문제나 한일역사문제 등으로 폭 넓게 활동중인 지인 목사로 부터 강원도의 화천댐과 파로호에 관한 일본측 자료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부터이다. 게다가 제자들 중에는 華川에서 군대 생활을 보낸 유학생들도 있어서 그들의 추억을 들으며 자료 찾기에 착수는 했지만 일본내의 왠만한 사료찾기에 익숙한 필자건만 화천댐 조성 기록 자료의 확보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이 식민지 조선의 일본 전기사업에 관한 책으로 주로 당시 최대의 전력량을 생산하던 압록강의 수풍댐 공사(전력생산량은 70.0만kW)등과 더불어 화천댐 (전력생산량은 8.1만 kW)건설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는 정도였다. 아마도 일본 최대의 전력공사였던 수풍댐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한 소개 비중이 컸던 것 같다. 그러다 식민지 통치지배 때의 전기사업에 대해서 망라해 놓은 604페이지의 두꺼운 [朝鮮電氣事業史]란 책을 입수하게 되었다. 사단법인 중앙일한협회가 1981년3월20일에 발행한 이 책은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전기사업개발에 관련했던 관계업체의 자료를 포함한 총체적인 내용을 엮어놓아서 화천댐에 대한 소개도 비교적 잘 되어 있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朝鮮電氣事業史

한강수력전기 주식회사는 주로 화천발전소와 청평발전소를 개발한 회사인데, 해마다 한강의 대홍수로 인한 서울 및 한강 하류 지방의 막대한 피해를 고심하던 조선총독부 구관료들이 한강 상류의 댐 건설을 통한 홍수조절안을 당시의 아리가 미츠토요(有賀光豊)조선식산은행(1952년에 한국산업은행으로 흡수) 총재(두취역 사장으로 표현)에게 전한다. 아리가 총재는 일본고주파중공업 사장으로 댐식 발전소에 대한 저렴하고 풍부한 한강수계의 전력 대부분을 일본고주파중공업의 인천공장에 공급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식산은행계의 자본을 중심으로 1939년2월1일에 한강수력전기(주)를 설립하였다. 전기 사업 허가연도는 1938년 10월로 되어 있다.

제1기 계획으로는 북한강의 화천, 청평의 두 군데에 발전소를 건설하여 최대출력 12만 kW를 발전하고, 이것을 경인지방에 송전하려한 것이다. 설립당시 자본금은 3,750만엥으로 본사 소재지는 경성부 중구 황금정(현 을지로)이었고, 한국측 대표자리에는박영철, 김한규 등이 맡고 있다. 주식은 총 50만 주식을 발행하여 조선식산 은행과 일본고주파, 경춘철도가 각각 8만주식, 그 외에 금융계나 경성전기 등이 주식을 가진 형태이다.

화천에는 높이 100m, 용적830,000m3 의 중력식 콘크리트 댐을 짓고, 주위 94km의 저수지를 만들어서 출력81,000kW의 발전소를 건설하고, 청평에는 높이 10m의 게이트를 가진 높이 35m, 용적234, 000m3의 중력식 콘크리트 댐을 지어서 주위 71km의 저수지를 만들고, 출력 39,600kW의 발전소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청평발전소에는 카플란(Kaplan)저낙차수차에 의한 2만kW발전기2대를 설치할 설계였는데, 같은 식 수차용량에서는 당시 동양의 기록품이었다고 한다.

송변전 설비계획은 화천에서 경성 근교의 부평에 이르는 송전선 총길이(亘長) 127.2km(실제는127.450km로 2회선으로 철탑은395기) , 전압 154,000V의 송전선과 용량110,000kVA의 부평변전소를 건설하려 하였다.

공사현장은 서울에 가까운데다 경춘철도 등으로 교통운수가 편리하고, 1939년 1월의 착공 당시는 통제가 있긴 하였어도 비교적 자재를 원활하게 입수하였기에 개발공사는 도중에 홍수피해가 몇 번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는 등의 시국 문제와 더불어 자재 입수가 곤란하게 되고, 물가 급등이 계속 되어 공기는 지연되고 건설비는 증가하여 당초 목적대로 일본고주파 인천공장에서 소화할 수 있을지 어떨지가 의문시 되었다. 그래서 사내 긴급회의를 열어서 건설비 절하 검토가 시작되었고, 결국 전력국관에 사업양도를 하게 되는데, 양도 당시(1943년6월말)의 공사시행현황을 보면 청평발전소 99%, 화천발전소 85%였다. 공사가 한참 진행중일 때 화천발전소의 댐은 90% 완성이 되었고, 취수구, 압력 터널(두 군데), 수압 조정장치인 서지 탱크(두 곳의 터널 수로와 접속하여 탱크로부터 수압 철관 세 곳으로 분기하도록 되었다)등의 토목공사는 거의 끝났었다. 철관로는 2대가 완성, 발전소는 3대를 계획했으나 2대가 완성되어 발전시동을 했다. 수문은 두 곳만 철제로 남기고 당시 자재 입수가 어려웠던 터라 나머지는 목제를 하기로 하였다.

철관로의 토목공사는 끝났고, 철관 재료가 도착하여서 현장에서 용접 조립 테스트 등을 하여서 2대 분의 공사는 끝났지만 전쟁이 격해지므로 흙을 덮어서 하늘에서 안 보이도록 눈가림을 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화천댐의 저수지(파로호)의 공사 준공은 1944년 10월로 청평호수의 8월 준공으로부터 2개월 후가 된다. 주된 댐 및 저수지 공사에는 히타치(日立)가 맡고, 나머지 수로나 제방둑, 발전소, 철관 등은 카시마구미(鹿島組)가 맡았다. 총건설비는 80,742,000엔으로 일본 국내의 수력발전소 건설비와 비교하면 한반도의 건설비가 현저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944년도 발전 실적표를 보면 화천발전소는 149,816,800kWh(발전 전력량)이고, 1945년5월에는 29,920,000kWh(같은 해 8월 자료에 보면 39,600kW의 전력을 생산)를 생산하였다.

이 책에서는 한반도 수력지점의 경제적 우수성을 평가하고 있는데, 특히 반도의 지세와 기상에 적응한 특유의 개발방식이 채용된 것과 더불어 일반에 각지점의 개발 규모가 큰 점에서 스케일 메릿(규모의 효율) 효용이 있다는 점. 다른 한가지 우수성은 저수지 용량이 방대하여 발전수력이 가지는 고도의 정시성을 평가할 수 있는데, 장래 수요 증가할 전원측도 화력/조력/원자력 등이 수력과 더불어 우수한 성능을 가질 한반도 수력은 방대한 최고조의 출력때는 부담 전원으로서 한층 활용될 것으로 전망한다고 논하고 있다. 게다가 제2회 수력조사 결과, 한반도에 유망한 수력발전지점이 많아서 다이쇼 말기에서 쇼와 초기(1920년대 전후)에 일본 및 조선의 사업가들이 서로 수력발전을 운영하려고 앞을 다퉈 신청을 했다는 것을 보면 한반도의 전력사업에 매력을 느꼈던 자본가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화천댐 건설 당시의 히타치나 카시마구미와 같은 대기업의 공사현장에 고용되었던, 혹은 값싼 전시인력으로 동원되거나 징용되었던 사람들의 확인 작업도 향후 필요할 것 같다.

파로호와 화천댐 건설 배경과 이름 유래 속에 새겨진 아픔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불행이 없도록 하기 위한 상생의 노력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알고 미래를 보는 것과, 어두운 역사라고 등한시 하고 건너 뛰는 것과는 미래 사회의 구축에 큰 차이가 생긴다. 사람들의 희생과 원혼이 뒤얽힌 역사란 결코 가벼이 덮어 넘길 문제가 못된다. 그렇기에 상호 확인과 다가서기 노력을 통한 과거 반성과 기록/ 기억을 미래의 거울로 삼아서 과거를 정리한 뒤, 미래 지향적인 글로벌 평화 사회를 모색하면서 파트너십을 굳혀가는 것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철조망 너머로 총구를 마주하고 위협하는 불행한 민족의 대결구조가 아닌, 대화와 상생의 현안을 내걸고 같은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숙명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절실한 시기이다. 외세 침략이 많았던 한민족이지만 더이상의 희생으로 뒤엉키는 불행한 한반도의 역사를 만들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