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소설이 살고 있는 현주소!
21세기 한국소설이 살고 있는 현주소!
  • 유시연 객원기자
  • 승인 2013.03.1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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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올해의 문제소설’ 나와··· 작가 김연수·박민규 등 13명 가려 뽑아

“그가 자살면허를 따기로 결심한 것은 40년 지기의 문상을 다녀온 뒤였다. 두 번째 근무지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친구였다. 전교생이 모두 불알친구인, 백두산 자락의 중학교였다. 부고를 전한 이는 역시 그곳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친구였다. 둘 모두 ‘다섯 손가락’ 멤버였다. 월급날 저녁마다 숙직실에 모여 학부형이 잡아다준 노루를 구워먹으며 포커를 치던 이들이 만든 친목 모임에는 이제 두 명만 남게 되었다.······

국어가 갔네. / 그는 리모컨의 음소거 버튼을 꾹 눌렀다. 목소리를 잃은 건 텔레비전만이 아니었다. 숱한 부고를 접했지만 죽음은 여전히 낯설고 불편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수화기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언제부턴가 적막은 그에게 죄책감을 부추겼다. 국어가 그랬던가. 밑도 끝도 없이 누군가에게 사과하고 싶어지면 갈 날이 머지않은 거라고.” -38~39쪽, 김경옥 ‘인생은 아름다워’ 몇 토막

<2013 올해의 문제소설>(푸른사상)이 나왔다. <푸른사상>에서 해마다 펴내는 이 소설선집을 펴면 21세기 우리 소설이 살고 있는 현주소와 21세기 우리 소설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제대로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고 여기 실린 소설만이 21세기 우리나라 소설을 대표한다는 그런 말은 아니다.

‘올해의 문제소설’, ‘올해의 대표소설’, ‘올해의 최고소설’ 등, 이런 비슷한 이름을 달고 나오는 소설선집은 한두 권이 아니다. 여러 문예지나 출판사에서 이런 저런 문학상이란 이름을 내걸고 나오는 소설선집도 숱하다. 이 소설선집도 그 가운데 한 권일 뿐이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나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그야말로 잘 나가는(?) 작가들 이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 소설선집은 현대문학 교수로 이루어진 한국현대소설학회에서 지난 2011년 10월∼2012년 9월까지 1년 동안 문예지에 발표된 소설 가운데 문제작이라 여겨지는 소설 13편을 가려 뽑아 묶은 책이다. 소설 한 편 한 편마다 실려 있는 소설 연구자들이 꼼꼼하게 곁들인 평가도 소설을 읽는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현대소설학회는 “이번에 묶은 이 소설선집에는 그동안 문예지에 발표된 중·단편 소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선별하여 엮었다”며 “여러 차례의 학회 세미나와 토론을 통해 기성의 명성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 한국 소설 문학의 오늘과 내일을 가늠할 수 있는 ‘문학성’과 ‘문제성’을 지닌 작품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2013 올해의 문제소설 13편(가나다 순)

1. 권 리 ‘폭식 광대’ <한국문학> 2011. 겨울

2. 김경욱 ‘인생은 아름다워’ <문학사상> 2011. 11

3. 김 솔 ‘소설 작법’ <문학과 사회> 2012. 가을

4. 김연수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 <세계의 문학> 2012. 봄

5. 박민규 ‘아...르무...리...오’ <세계의 문학> 2011. 겨울

6. 서유미 ‘세 개의 시선’ <현대문학> 2012. 6

7. 서준환 ‘파라노이드 안드로이드’ <현대문학> 2012. 9

8. 이기호 ‘이정’ <창작과 비평> 2012. 여름

9. 이지영 ‘23 / 멜랑꼴리’ <현대문학> 2011. 11

10. 정용준 ‘유령’ <현대문학> 2012. 6

11. 조해진 ‘홍의 부고’ <창작과 비평> 2012. 가을

12. 최수철 ‘택시’ <문학사상> 2012. 4

13. 한유주 ‘불가능한 동화’ <문학사상> 2012. 3

한국현대소설학회가 이번에 가려 뽑은 작품 13편에 대한 꼼꼼한 평가를 살펴보자. 이들 작품들이 왜 ‘2013 올해의 문제소설’에 뽑혔을까. 작가들은 이 작품들에서 무엇을 그렇게 애타게 이야기하고자 했을까.

문제작들은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보여준다. 삶을 재발견하고 그 실존적 의미를 극대화시켜줄 사랑의 기술에 대해 제시해주거나(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 사랑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의 비정함을 보여주기도 한다(세 개의 시선).

때로는 패스트 콘텐츠의 시대, 욕망의 무한 복제 알고리즘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거나(폭식 광대), 오래된 우리 역사의 아픔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늘을 다루면서 이해와 용서를 통한 화해를 말하거나(이정), 고통의 바다와 같은 세상을 건너기 위해 불교적 사유의 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택시).

한국 소설의 시공간적 지평을 확대하고 있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자살면허라는 독특한 소재로 자살공화국의 미래를 투시하고(인생은 아름다워), 편집증을 앓고 있는 안드로이드를 통해 과학의 발달로도 해결할 수 없는 자아의 문제를 다루며(파라노이드 안드로이드), 감정과 죽음이 극복된 미래를 배경으로 타자의 부재와 상실에 고통을 느끼는 멜랑꼴리에 주목하기도 한다(23/멜랑꼴리).

최근에 와서 유독 현재의 거울과 같은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의미한 변화로 보인다. 나아가 외계인 초점화자를 내세워 한국전쟁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갖게 된 하위주체를 애도하고 있는 작품에서는 우주를 가로지르는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다(아...르무...리...오).

글쓰기에 대한 근원적인 탐색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도 주목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하거나(유령), 소설의 존재 기반이 되는 가상과 현실,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의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홍의 부고).

우리 시대 문학의 역할과 문학의 현실,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과 새로운 매체 환경의 문제를 풍자적으로 담아내거나(소설 작법), 작가의 죽음과 문학의 종언이 선언되는 이 시대에 소설을 통해 언어와 세계를 철저하게 해체하고 있다(불가능한 동화).

한국현대소설학회는 “문제작들의 주요 특징들은 전문적인 소설 연구자들로 구성된 학회의 특성을 살려 소설이론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을 중심으로 분석하되, 자유로운 시각과 해석 방법이 드러나도록 했다”며 “구성, 기법, 시점, 인물, 주제, 플롯, 화자 등과 같은 소설의 핵심 개념들을 바탕으로 한 작품론은 올해의 문제작들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국현대소설학회는 현대소설 분야를 전공하면서 실제 ‘한국의 현대소설’을 강의하고 있는 교수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연구학회다. 이 학술단체는 현대소설을 연구하고 자료를 발굴, 정리하며 연구결과에 대한 꼼꼼한 평가를 통해 이론을 세워, 한국 현대소설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잡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