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의 살아있는 역사
한국 추상미술의 살아있는 역사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3.03.13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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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식, 그의 삶을 더듬어본다

   

▲ 故이두식 화백(홍익대미대교수)

지난 23일 새벽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한 고 이두식 화백의 영결식이 오늘(26일)오전 강남성모병원거쳐 그가 생전에 자주 찾았던 인사동 거리에서 노제가 열렸다.

고인의 장례는 한국미술협회(이사장 조강훈)장으로 엄수됐으며 오전 10시 30분 인사동 남인사마당에서 고인의 타계를 안타까워하는 250 여명의 미술인, 문화예술계인사들과 친지, 지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됐다.

미술협회 조강훈 이사장의 조사를 시작으로 그와 오랜 우정을 나눠왔던 방송인 이상벽씨, 가수 이장희 씨의 추모사에 이어 소리꾼 장사익씨의 추모곡으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인사동 노제에 이어 고 이두식 교수의 유해는 고인의 모교이자 선생으로 평생을 봉직했던 홍익대를 돌아 장지인 파주 청파성당 평화묘원에 안치됐다. 

교수직에서 명예롭게 물러난다고 했다. 66세 정년을 채우고 은퇴했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시작이라고 누구나 믿었다. 이제 아무런 제약없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누구나 새로운 작품을 기대했을 순간이었다.

▲ 지난달 21일, 고인이 된 이두식 교수(가운데)의 정년퇴임식에서 친구들과 케잌커팅을 하고 있다.손진책 국립극단예술감독(좌측 첫번째), 가수 김세환(좌측 두번째), 가수 조영남(이두식 교수 옆), 정경연 홍대디자인학과 교수(우측 두번째), 가수 이장희(우측 첫번째)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퇴임 전시회 개막식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렸던 그가 다음날 불귀의 객이 되리라는 것을. 한국 추상화의 역사가 너무나 갑자기 멈춰버린 순간, 미술계는 물론 그를 알았던 모든 예술인들의 눈물과 탄식이 이어졌다. 한국 추상화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미술계 발전에 온 힘을 쏟았던 이두식 교수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났다. 
 
지난달 23일 타계한 화가 이두식은 한국 추상미술계를 이끈 화가로 한 세상을 미술과 사람, 배구와 함께 보내며 그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잔칫날>처럼 유쾌하고 힘있게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 이두식 교수 빈소가 차려진 강남성모병원장례식장에 고인의 타계를 애도하는 조문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 참석 조문객들이 고인의 타계를 안타까워하며 고개를 떨구고 있다.

▲ 고 이두식 교수의 절친한 친구였던 방송인 이상벽씨가 조사를 낭독하는 도중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훔쳐내 장내를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동양의 채색붓으로 서양화를 그린 화가

그를 이야기할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오방색'이다. 대한민국의 전통 색깔인 적색, 청색, 황색, 흑색, 백색을 마치 붓으로 뿌려 튄 것처럼 그린 <잔칫날>은 그의 추상화 세계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기억되고 있다.

화려한 오방색을 바탕으로 밝고 역동적인 추상화를 완성했던 그는 서양화를 배우면서도 수묵화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서양화를 그리면서도 동양의 채색붓인 모필을 이용했다고 한다. 전통의 색깔로 빚어낸 추상의 세계는 화려하면서도 긍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이두식의 그림을 보는 멋이었다.

지난해 전시회를 통해 그는 화려한 오방색에서 조금씩 담채의 느낌을 표현하기 시작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오방색을 빼놓고도 기운이 살아있어야한다"며 그 기운을 살리는 것이 자신의 숙제라고 말했다. 65세 화가의 새로운 도전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수묵추상화란 것도 서양의 추상표현주의와 화면을 꾸려나가는 방식이 비슷해요. 여백이 많고, 담백하게 그려내며, 묘사보단 관념적으로 표현하고…(중략) 오방색을 버린다는 건 아니죠. 오방색을 빼놓고도 기운이 살아있어야 하죠. 컬러의 화려함에서 오는 흥 말고도 다른 기운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제 숙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추사의 글씨나 겸재의 풍경화에서 오는 강렬함은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펄펄 살아있죠.”(지난해 본지와의 인터뷰 중에서)

그에게 작업은 종교 의식이었다

그는 굉장히 집중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작업도 반드시 자신의 컨디션이 좋을 때 진행했고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명상을 했다. 그리고 작업을 시작하면 4시간 이상을 오직 그 작업에 매진했다. "삼매경에 들어가지 않으면 작업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그의 이런 성격은 가난했던 과거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먹고 살기 위해 7년동안 '이발소 그림'을 그리면서 하루 3시간 이상 자지 못하고 계속 작업에 열을 올렸다. 그가 한 해동안 약 200여점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원동력도 바로 작품에 대한 집중력이었다. 그에게 작업은 일종의 종교 의식이었던 셈이다.

이두식의 그림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기를 뻗치게 하는 그림'. 그렇다. 화려한 색깔이 화폭에 뿌려진듯한 그의 그림은 분명 힘이 있었다. 열정을 담아 캔버스에 뿌린 그의 색깔이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주었고 그 또한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었다. 그 열정은 작업뿐만 아니라 미술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발휘됐다. 그가 '미술계의 마당발'로 불린 이유도 바로 그 열정이 가져온 결과였을 것이다.

경북 영주의 사진관집 아들로 태어나

1947년 이두식은 경상북도 영주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이중강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에서 사진기술학교를 나오고 영주에 사진관을 차린 아버지를 돕기 위해 이두식은 초등학생 때부터 사진 원판 작업을 도왔다. 뒷날 그는 섬세한 표현력의 원천을 바로 아버지와 함께 한 사진작업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영향은 사진에서만 받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 국전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가기도 했다. 제대로 그림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실력을 인정받은 이두식은 서울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이어 홍익대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하게 된다.

가난과 생활고는 그의 스승이었다

60년대부터 본격적인 미술 작업을 시작한 이두식은 1968년 신상전 최고상을 받는 등 각종 미술대전에서 상을 받으며 한국 미술을 이끌 인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이두식이 화려한 삶만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생계를 위해 7년 동안 이발소 그림을 그린 사람이 바로 이두식이다.

하지만 이두식은 그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한 일이었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도리어 가난과 생활고는 그의 스승이 됐다. 그는 낮에는 이발소 그림을, 밤에는 자신의 그림을 그렸다. 그 경험은 그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다작(多作)을 할 수 있는 힘이 됐고 순발력있게 그림을 그리게 만든 바탕이 됐다.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않으며 그림에만 매달리던 이두식의 작품들은 마침내 1976년 명동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어려웠던 시절에 화실도 했고, 소위 이발소 그림이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하루에 수십 점을 그려댔는데,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대상의 특징을 재빨리 파악해서 그려내는 능력이 생겼으니까요." 한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가난이 준 선물'이다.

"잔칫집 분위기, 강렬한 원색, 얼마나 아름다워요?"

이후 40여년간 그는 4500점의 그림을 그리고 국내외에서 70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1984년부터 타계 직전까지는 모교인 홍익대학교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고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서울미술협회 이사장,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등을 거치며 미술 발전에 힘을 쏟는다. 미술계뿐 아니라 여러 계층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미술계의 마당발'로 불리게 된다.

그는 그의 그림이 어느 돈많은 사람들이 사가는 그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기는 그림이 되길 원했다. 로마의 플라미니오 지하철역에는 가로 8m의 대형 모자이크벽화로 그의 그림이 걸려있다. 이외에도 미국의 지미 카터 재단, 올란도 시청 등 세계 곳곳에서 그의 작품들이 소장되고 전시되어 있다.

그의 그림에는 ‘축제’, ‘잔치’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그에게 잔치와 축제는 기운이 생동하는 시간이다. 강한 색채의 오방색을 캔버스에 뿌리는 그의 그림 스타일은 새롭게 뻗어나가려는 우리의 기분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밝힌 그의 변이다.

"제 그림 중 '축제'라는 제목이 많아요. 넉넉한 환경에서 막내아들로 커서 그런지 늘 떠들썩한 잔칫집같은 분위기가 좋았고, 또 우리 역사가 그렇지 못해서 부러 그렇게 지은 면도 있고요. 백의민족이라고 하지만 우리 생활속에도 강렬한 원색이 많잖아요. 색동, 단청, 무속의 색들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워요."

잔칫날(Festival) Acrylic on canvas 72.7x60.6cm 2012.

호방한 성격의 '미술계 마당발'

이두식의 그림이 해외에서 인정받은 것도 바로 그림에서 나오는 강렬한 '축제의 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수년간 중국 베이징과 선양 등지에서 전시회가 열렸고 해외에서도 초청됐던 이두식의 작품들. 그러나 그의 명성에 비해 그림의 값은 그렇게 비싸지 않았다. 하지만 이두식은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림은 특정한 사람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겨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가 역임한 직함만 100여개. 40대 후반에 나이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그는 '최연소 이사장'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또한 대학교 때 선수생활을 한 인연으로 실업배구연먕, 대학배구연맹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큰 덩치와 호방한 성격으로 여러 방면에 걸쳐 두각을 나타낸 이두식에게 사람들은 '미술계의 마당발'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포르쉐 자동차에 애정을 느끼고 66세의 나이에도 동양화를 접목시킨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고 선언했던 이두식. 그의 생애는 곧 한국 추상미술의 생애였고 한국 추상미술 발전의 역사였다. 이제 그의 멋진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호방했던 살아 생전의 이두식을 기억하고 또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뻗어있는 축제의 기운을 계속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편안히 영면에 드시라!

이두식 교수의 유해는 파주 청파성당 평화묘원에 안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