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국수호 (사)디딤무용단 예술감독/한국무용가] 전통문화는 국민의 ‘정신적 소금’
[인터뷰-국수호 (사)디딤무용단 예술감독/한국무용가] 전통문화는 국민의 ‘정신적 소금’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글 윤다함 기자
  • 승인 2013.04.0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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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춤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전용극장 건립해야

     1988서울올림픽 개막식 무대를 장식한 최고의 안무가이자 우리 전통춤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국수호 선생(국수호디딤무용단 이사장·예술감독). 서울예술단 예술총감독, 국립무용단 단장 등을 역임하고 중앙대 무용학과, 서울예대 무용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에도 힘써온 그는 명실공히 한국창작무용의 선구자이다.

     그가 이끄는 디딤무용단은 그동안 국내 및 해외 30여 개 국가에서 2천여 회 이상 공연하며 세계 관객들에게 우리 전통 춤과 문화를 전파해왔다.

     디딤무용단은 전통무용과 신무용을 모두 섭렵하며, 창작무용, 북춤, 그리고 춤극으로 불리는 무용극을 민간 무용단으로서는 유일하게 보유하고 공연하는 무용단이다.

     특히 유럽 전역에서 공연돼 전석 매진을 기록한 한국문화상품 수출 1호 작품 ‘코리안 드럼, 영고’는 지난 2011년 영국 에든버러프린지페스티벌에서 언론과 관객으로부터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공연’, ‘예술의 정석을 보여주는 공연’, ‘최근 프린지페스티벌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대규모 정품 스펙터클한 공연’ 등 찬사를 받으며 다시 한 번 쾌거를 이룩했다.

     이렇듯 쉼 없이 우리춤을 위해 노력해온 국 선생이 춤인생 50년을 맞았다. 오는 5월 8일, 9일 양일간 국수호 선생의 50년 춤 인생을 돌아보는 기념 공연이 열린다. 이어령 전 장관, 박범훈 전 수석, 유인촌 전 장관, 안숙선 명창,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등 그와 친분이 두터운 문화행정계 인사들과 전통예술인들이 참여하는 무대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 이수자 △서울예술단 예술 총감독 / 국립무용단 단장 / 서울예술대학 무용학과 교수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 교수 역임 △88올림픽 개막식 <화합> 안무 /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 총괄 안무 및 솔로 출연 △대표작 : <북의 대합주(1985)>, <명성황후(1994)>, <코리안 드럼 영고(1999)>, <금오신화(2001)>, <사도-사도세자이야기(2007)>, <화선 김홍도(2011)> 등

-우리춤을 세계에 알리고 일구는데 50년을 보내셨다. 소회 한 말씀 부탁한다.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됐다. 열심히 한 것 밖에는 없다. 지금껏 모함과 질시도 많이 받았다. 앞서가는 사람으로서, 개척자로서 아픔을 많이 겪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내가 다른 사람의 상처를 간과하며 앞만 보고 달려온 건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이제는 모든 사심은 내려놓고 지금까지 일궈놓은 것들을 바탕으로 우리 춤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얼마 전 전국문예회관연합회 작품 공모에서는 ‘코리안드럼, 영고’가 탈락했다. 대체 얼마나 큰 작품이 나왔는지 내 작품은 10개 안에 들지 못했다. 전문연의 시스템에 절망했다. 우리가 문화강국이라고 정부에서 내세우려고 하지만 정작 콘텐츠를 전혀 활용할 줄도 고를 줄도 모른다. 그런 거에 대한 올바른 안목이 없는 거다. 그저 당장 닥친 일에만 급급해 한다. 내 50년 춤인생에서 얻은 건 절망감이었다. 세계에서 주목해준, 50년간 내 춤이 집약돼 있는 그 작품이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외면당한 현실이 너무도 불행했다.

-재작년 자체 경비로 영국 에든버러프린지페스티벌에 참가해 전석 매진 기록, 별 5개 최고 평점, 57회 공연 등의 성과를 기록했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초청받아서 겨우 한, 두 번 공연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봤다. 진정으로 소통하고, 우리 춤을 제대로 알리는 데에는 역부족이고, 적어도 한 달 이상 공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린지에 참가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가서 후원 하나 없이 사비로만 한 달 내내 ‘코리안 드럼, 영고’ 실내외 공연 57회를 했다. 그런데 입장료 수익으로만 그 돈을 다 채웠으니 얼마나 반응이 좋았는지 알 수 있지 않나. 언론과 관객으로부터 별 5개, 4개 등 찬사를 받았다.

-정체돼 있지 않고 시대에 맞게 현장감 있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내가 무용만 배우지 않고 서양음악, 농악, 연극 등 예술 전반을 아울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서라벌예대 무용과에서 공부할 때는 타과 친구들과 어울리며 연극이나 음악도 보고, 듣고 배울 수 있었다. 국립무용단 창단되고 단원으로 있으면서 앞으로 무용극의 시대가 올 거란 생각이 들었고 그때 연영과로 편입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연극영화를 배우며 무대에서는 춤을 추고 그랬다. 그러면서 춤과 작품이 좀 더 풍부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대학원에 가서는 그동안의 내 춤을 좀 더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민속학을 공부하며 우리 전통을 보다 더 세심히 배울 수 있었다.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태석, 유덕형 등과 같이 작업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렇듯 다른 무용인들이 겪을 수 없는 여러 경험을 통해 소중한 자산을 얻을 수 있었던 거다.

국수호류 한량무 작품 '장한가'

-선생님 춤의 특징을 말씀해주신다면?
내가 내 입으로 말하려니 우습다.(웃음) 한국적인 움직임이란 건 누구나 다 고민하고 연구하는 거다. 그걸 연마를 해 얼마나 음악과 어울리느냐, 좀 더 현장감 있게 추느냐에 달린 거 같다. 내 춤은 항상 음악을 가지고 놀 줄 안다. 그리고 춤의 내용은 문학적 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 안에서 음악을 세우고, 소리도 세우는 거다. 굳이 표현하자면 과학적으로 만든다고나 할까. 춤은 정신적인 과학이다. 마구잡이로, 즉흥적으로 ‘얼씨구 절씨구’하는 게 아니라 ‘얼씨구 절씨구’의 당위성이 있다는 거다. 그 두 차이는 굉장하다.

-실상은 여전히 문화가 정부의 지원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특히 전통예술은 더더욱 그렇다.
우리나라는 문화적 깊이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 전통문화도 그저 쇼에 지나지 않다. 케이팝 전용 공연장이 생긴다고 하던데, 지금까지도 우리 춤집은 없다. 집이 없으면 거지와도 똑같다. 우리 춤뿐만 아니라 창극전용관이나 판소리전용관도 없다. 국립국악원 예악당도 우리가 보나 외국인이 보나 그게 무슨 우리 전통음악 공연장으로 보겠나. 지금까지 우리가 서양식 극장으로 찾아가 무대를 올려왔는데, 중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경극극장과 가부키극장이 따로 있다. 물론 그렇다고 중국과 일본이 전용극장 관객의 수요가 폭발적이라서 그렇게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다. 비록 관객의 수는 미미할지라도 그건 그 나라의 전통이기에 지켜나가는 것이다. 전통은 마치 우리 김치의 소금과도 같다. 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소스가 전통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지 않고 있어 개탄스럽다. 우리 전통이 먼저 안착하고 역사를 이뤄나가야 우리나라의 기본이 서지 않겠나. 적어도 우리 춤의 집을 지어줘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 국민의 정신적인 소스가 만들어지는 거다.

-이럴 때일수록 전통예술인들이 힘을 합쳐 목소리를 내야하는 것 아닌가?
이 일은 여러 사람들이 해달라고 하면 해주고, 아니면 안 해주고 하는 그런 일이 아니다. 우리 문화의 근본적인 요소인 가, 악, 무는 문화의 3권이다. 한국인이 지키고 가꾸고 미래로 가져가야하는 건데, 문화재만 만들어놓으면 뭐하나… 정작 그 사람들이 들어갈 집은 없는데. 전통예술인들이 스스로 이런 일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고양이 목에 방울 매고 있는 중이다.

-1999년,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킨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그때의 사건으로 많은 것을 잃었고 지금까지도 무용계에는 그 여파가 있는 듯한데, 그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화병나면 눈이 멀 수도 있다고 하던데, 그때 일 때문에 난 시력에 손상이 와서 1급 장애 판정까지 받았다. 내가 분하고 억울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장애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이제는 누가 날 알아주든 몰라주든, 나를 선택하든, 안 하든 그런 것조차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생각하면 애석할 뿐이다. 그런 일이 내게 벌어지지 않고 내 계획대로 지금까지 왔다면 현재 한국 무용계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고 여러 가지로 분통할 따름이다. 나를 모함한 그 범인들은 훗날 역사가 벌할 거라고 믿는다.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하지만 내가 그들 때문에 안절부절 하다가는 더 다칠 것 같아서 모든 건 역사에 맡기기로 했다. 예전에 이어령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스탕달도 동료로부터 모함을 받았다고. 그래서 유배를 가 ‘죄와벌’ 같은 작품을 쓴 거라고. 그 분 말을 듣는 순간, 이 원통함을 작품으로 승화시켜야겠다고 다짐하고 ‘사도’(2008)를 만들었다.

-무대 공급은 늘어났는지 몰라도 춤과 대중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진 않는 것 같다. 특히 한국무용은 더욱 더 그렇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어떤 게 있나?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무용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한국 춤추는 이들 스스로 자기들 가정을 파괴한 거나 마찬가지라서 할 말이 없다. 대학교수들과 2류, 3류 무용가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이유로 열심히 하고 있는 무용가들을 비하한다든지… 행정가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넌더리를 내며 신경을 쓰지 않게 됐다. 한 나라의 예술을 이끌어가는 예술가로서 나 역시 관객께 죄송하다.

국수호 선생이 직접 모으고 있는 불상들. 컬렉션 중 일부가 그의 사무실에 있었다.

-불상을 수집하고 있다. 컬렉션이 방대하다고 들었다.
30년 넘게 100여 점 수집했다. 동남아 불상을 많이 모았다. 작품 하나 끝내고 불상 하나 모으고 그래왔다. 동남아 불상은 생활문화로서 미학의 총집합체다. 비록 자신은 굶고, 천 하나 걸치고 있지만 불상에만큼은 금을 붙인다. 따로 전시할 생각은 아직 없다. 작품에 종종 불상의 깊은 뜻을 드러내고 있다.

토기와 도자도 모은다는 그는 마음이 번잡할 때 토기를 만질 때면 차분해진다고 한다.

-사무실을 둘러보니 토기들도 모으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 작품 때문에 생각이 복잡할 때 토기를 쓰다듬으면 마음이 안정된다. 토기를 빚은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들의 숭고함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두통이 가시고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다.

-무용계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춤을 잘 춰야 한다는 거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국 2류, 3류가 될 수밖에 없다.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일단 춤 실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관객들이 일류로 인정해줬다면 사회 공헌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앞으로의 공연 계획?
오는 5월, 근현대춤의 귀환이란 무대를 올릴 예정이고, 4월부터 열리는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개막식 총괄안무를 맡는 등 내년 스케줄까지 빽빽하다. 지난 50년간 내 인간성과 실력과 완성도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지금까지도 이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살 수 있다.

-꿈은 무엇인가?
욕심 부리지 않고 무대에 계속 서고 싶다. 내 생각이 무대에서 이뤄지고 실현될 수 있도록 쉬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