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디자인 개념에서 본 예술과 과학
[특별기고] 디자인 개념에서 본 예술과 과학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
  • 승인 2013.04.1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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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일치가 어떻게 인류 역사를 바꾸어 가는가?

<지난호에 이어>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전 서울대 초대 미술관장/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장
이런 보디프라워(body flower)형식은 좀 더 아름답고 싶은 인간의  본능에 의해 코사지(corsage), 해드피스(head piece), 부케(bouquet), 어사화(御史花) 등으로 원형을 유지하며 발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엮음기술 즉 직조기법(織造技法)의 발달로 이어지면서 의복문화를 이루며 섬유제품의 묘화(描畵)디자인 등의 형식으로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으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함께 발전해 갈 것이다. 
 
특히 한국의 미학과 조형사상은 동양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음으로 해서 한민족 고유의 '한' 사상을 기저(基底)로한 사상적 자생성(自生性)에 의해 관용적 미학이 발전 되어 왔다고 믿고 있다. 이런  종합적 사유방식은 산업화와 함께 격변(激變)하는 시대미감 속에서도 한국 특유의 관용미학(寬容美學)의 조형언어로 표출되어 한국적 디자인의 기본을 이루어 왔다.  우리 미술에 숨어있는 조형성을 살펴보면 꾸밈이나 가식성(假飾性)이 배제되고 허세(虛勢)를 부리지 않으며 물질적이기보다는 이념적이며 겸허(謙虛)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격을 갖는다. 조형적 요소가 직관성을 강조하게 됨으로서 골격미(骨格美)를 강조하고 정적인 형식 속에 동적인 내용을 조화시키려는 2중적 구성이 지배적이며 검소(儉素)와 축약(縮約)을 추구한다.

우리의 미학에는 후소론(後素論)과 같은 독특한 윤리관이 있어 작품은 곧 작가이며 작가는 전인적(全人的)인 인격체로 상정(上程) 됨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업을 하기 전에 인간으로서의 기본이 먼저 갖추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예술 행위는 궁극적으로 인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수단(手段)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작품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 사람은 인격이 지배하는 영적(靈的) 피조물(被造物)이다. 그림을 그릴 때도 붓들기 전에 뜻이 앞서 있어야한다고 했다(意在筆先). 이 뜻보다 더 먼저 갖추어야 되는 것이 사람됨이라고 가르친다. 서양의 미술론에는 아무리 살펴봐도 이처럼 철저한 예술윤리(藝術倫理)가 드러나 있지 않다. 그들의 생각은 작품과 작가는 별개의 것으로 평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동양의 예술관은 인간과 자연의 일원사상(一元思想)을 근저(根?)로하여 예술행위는 물론 예술의 소재가 되는 자연의 사물에도 인품(人品)과 같은 품위를 제각기 지니고 있다고 믿어왔다.

사군자의 매(梅),국(菊),란(蘭),죽(竹)도 동, 서, 남, 북과 춘(春), 추(秋), 하(夏), 동(冬)의 공간과 시간이 있고 중앙의 송(松)을 더해 청(靑), 백(白), 적(赤), 흑(黑), 황(黃),의 오방색(五方色)이 있으며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윤리가 모두 한데 어우러져 상생상부(相生相扶)한다. 꽃잎 하나 풀포기 하나에도 모두 의미가 있고 방위가 있으며 시간과 공간이 있고 덕(德)과 예(禮)가있다. 단순한 꽃말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우리만의 철학이 있어 이것을 순리로 풀면 ‘자연다움’ 곧 ‘나다움’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고 사물의 이치를 몰라 물질로만 보게 되면 이치를 거슬러 뜻을 상(傷)하게하는 것이다. 이름 없는 들꽃 한 송이에도 이런 의미의 가치와 순수한 미적가치가 동시에 우리 생활 속에 용해(鎔解)되어 숨 쉬고 있다.

그래서 예술가는 자연으로부터 배운 생명의 태동(胎動)인 유체역학(流體力學)을 연구해야하며 식물의 해굽성과 해질성을 관찰하여 이치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당초문(唐草紋)이 그렇고 운문유수준(雲文流水?)이 그렇다. 이런 생명의 원리 속에서 격조 높은 우리의 디자인 문화가 이어져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원리는 눈이 뜨인 사람에게만 보여 지게 마련이어서 모르는 사람에게는 남의 것이 커 보이고 내 것은 초라하게 보일 뿐이다. 

우리가 이런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문화적 보화(寶貨)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다 버리고 역수입(逆輸入)하면서 살아 왔는가. 그렇다고 내 것은 무조건 다 좋다는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허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일은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내 것을 분명히 알고 내가 주인이 되어 남의 것을 마음껏 소화한 후에 비로써 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