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성라자로마을 원장 조욱현 토마스 신부] “이제는 우리가 해외 한센인들 도울 때”
[인터뷰-성라자로마을 원장 조욱현 토마스 신부] “이제는 우리가 해외 한센인들 도울 때”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글 윤다함 기자
  • 승인 2013.04.1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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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환우는 더 이상 없지만 아프리카, 동남아 등 여전히 넘쳐나

     성라자로마을은 1950년 설립된 한국 천주교 사업 기관으로서, 지난 60여 년간 한센병 환우들의 치료와 치유된 한센인들의 사회복귀 및 자활에 공헌해왔다.

     홍라희 리움 관장,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 봉두완 전 국회의원, 김혜덕 윈제과 대표 등 각계 저명인사들이 성라자로마을의 후원회원으로서 소리 없는 선행을 행해오고 있으며, 특히 홍라희 관장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생일인 1월 9일 매년 이곳을 찾아 한해 생활용품과 음식 등을 지원해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라자로마을은 후원 회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국내외 한센인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매년 후원모금 음악회 ‘그대있음에’를 개최해오고 있다. 오는 5월 10일 서른한 번째 자선음악회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된다.

     지난 2009년, 마을의 제9대 원장으로 부임해 국내외 한센인들의 자립, 교육 등 한센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았던 그들의 권리와 행복을 다시 되찾아주기 위해 힘쓰고 있는 조욱현 신부를 만나 한센병에 관한 편견을 깨고 깊은 이해를 얻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조욱현 신부

-자선음악회 ‘그대있음에’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올해 31회째를 맞이하는 ‘그대있음에’는 1975년 이경재 신부님께서 마을 운영에 도움을 받기 위해 마련한 공연으로, 특히 당시 마을 아이들의 학비를 지원해주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1990년대 들어와서는 지금껏 우리가 받았던 도움을 이제는 우리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한센인들을 도우며 되갚는 마음으로 후원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성라자로마을은 1950년 천주교 사업 일환으로 설립됐다고 들었습니다. 설립배경이 궁금합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전 세워졌습니다. 미국 조지캐롤 신부님께서 국내 한센인들을 도와주고 계셨었는데, 미국 원주를 받아 원래는 결핵환자요양소였던 이곳을 사서 라자로마을을 설립하신 거죠. 처음에는 그리 많은 인원이 아니었지만 점점 늘어가 300명 가족이 지냈던 때도 있었습니다. 도시계획이 들어서고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지금은 마을 크기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한센병이라면 여전히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며, 한센인들을 차별하고, 기피합니다. 그런 이유에는 한센병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한 몫 합니다. 한센병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일단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한센병 전염은 확률로 따지면 천만분의 일 수준입니다. 공기로든 접촉으로든 전염될 수는 있지만, 나병균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러기가 불가능하다고 보면 됩니다. 불치병도 아니고 유전병도 아닙니다. 현재 국내에는 한센병 환자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국내 한센인들 모두 병이 치료가 돼 완치가 된 상태고, 과거에 앓았던 것일 뿐이지 현재 병을 앓고 있는 환우는 없는 거죠. 한센병은 치료시기를 놓치면 감각을 되찾지 못합니다. 여기서 지내는 분들도 병은 나았지만, 감각을 잃고 불구가 되셨죠. 피부병으로 나타났을 때 즉시 의사에게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의사는 보면 이게 한센병인지 바로 알 수 있어요. 그러면 한센병연구소 소장님께 연락이 가고, 환우는 거기로 보내지게 돼 소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병을 고쳐주십니다. 이렇게 치료가 이뤄지기 때문에 국내에 공식적으로 보고된 한센병 환자가 없는 거죠. 한센병은 영양이 결핍되고 면역이 약화됐을 때 생기는데, 한센인들 대부분 면역력도 떨어지고 체력도 아주 약합니다. 또한 다쳐도 감각이 없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시니 더 위험하기도 해요. 어떤 때에는 곪을 때까지도 모르죠. 면역력이 약해서 다치면 집중 관리를 해줘야 겨우 낫습니다.”

성라자로마을 풍경

-집중관리가 필요하다면 병원에 가야할 텐데, 병원에서는 환자로 잘 받아주나요?
“몇몇 병원에서는 잘 받아주지만, 여전히 싫어하는 곳도 있습니다.”

-병원에서조차 기피한다고 하니 한숨이 나옵니다. 한센인은 병 그 자체보다도 편견과 차별이 더 고통스럽다고 한다고도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한센인의 인권이 철저히 무시당했는데, 현재는 어떤가요?
“물론 예전과 비교해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편견과 차별은 존재합니다. 이건 분명 한센병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현재 한센인들은 모두 병력자일뿐이지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아닙니다. 그 점을 알아주시고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대해주셨으면 합니다. 지난번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마을 안에서 도토리나무를 키우는데, 도토리에 벌레가 생겨 먹을 수 없는 도토리는 태웠거든요. 그런데 주변에서 신고가 들어와 소방서에서 온 적이 있어요. 나환자에게서 나온 적출물이나 의료폐기물 등을 태운다고 생각해서 신고를 한 거죠.”

-신부님은 언제 처음 한센인과 만나셨습니까?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한센인 손을 잡고 악수를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첫 번째 악수를 했던 한센인이 지금 여기서 함께 살고 있어요. 당시에는 30대셨는데 이젠 할아버지시죠. 소록도에 계시다가 제가 이 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로 오셨답니다.”

-어린나이부터 굉장히 일찍 한센인들과 교류를 하셨네요. 기억에 남는 한센인들과의 일화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들이 원하는 건 ‘네가 나를 너와 똑같은 사람으로 생각하느냐’입니다. 그와 관련해 저도 몇 번 시험을 당했죠.(웃음) 고등학교 2학년 때 양평 상록촌에 방문했는데, 젊은 두 한센인이 소주 한 잔 하자며 저를 데려갔어요. 이건 다른 얘기지만, 제가 고2때까지는 술을 마셨는데, 그 이후로는 금주하고 있습니다.(웃음) 아무튼 자신들의 방으로 데려가 술상을 봐왔는데, 열무김치 한 접시, 젓가락 세 개, 그리고 술잔 하나가 있었어요. 딱 보니 저를 떠보는구나 생각이 들었죠. 술잔 하나 갖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마셨고, 한 3잔 마신 후에 제가 ‘이제 됐죠?’라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그렇게 통과를 했고…. 대학생 때 성가대와 함께 상록촌을 다시 찾았는데, 우리에게 라면을 끓여주시겠다고 하더군요. 일부러 우리 보란 듯이 손가락 하나 없는 몽당손으로 김을 비벼서 라면에 넣어주셨는데, 성가대원들이 기겁하는 분위기였어요. 제가 나서서 식사기도하고 제일 먼저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라면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서 더 달라고도 했죠.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고, 여기 와서는 제가 먼저 ‘상록촌에서 이미 다 통과했으니 이제 시험은 그만 하라’고 말했어요.(웃음)”

성당 내부 모습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언제 어떻게 신부가 되겠다고는 결심하셨는지요?
“중학교 때 신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당시엔 뭘 모르고 들어간 거죠.(웃음) 누님 두 분 모두 수녀셨거든요. 막연하게 나도 신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제가 존경하던 신부님이 신부를 그만두셨는데, 너무나도 충격이었죠. 혼란스러웠는데, 그분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가더군요. 나 역시 사람이니 가던 길 계속 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신부로서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당시 폐결핵을 앓으면서 1년 동안 제 자신을 성찰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비로서 그때 최종적으로 마음을 굳힌 것 같습니다.”

-국내 한센병 환우는 공식적으로는 없다고 하셨고, 또 한센인들의 평균연령도 고령화됨에 따라 그 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자로마을 설립 초기 취지와는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요?
“이경재 신부님께서도 일찍이 해외 한센인들을 위한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어차피 우리나라에는 앞으로도 한센병 환자가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센인들의 평균연령도 75세 정도니 굉장히 높지요. 20년 후에는 한센인들도 몇 사람 남지 않을 거고요. 우리나라는 이렇지만 배고프고 못사는 나라에는 여전히 한센병이 흔합니다. 이경재 신부님께서는 그 점을 보시고 아프리카, 동남아 등으로 눈을 돌리셨어요. 해외에서는 해마다 수 천 명씩 환자가 늘어가는 추세고, 인도는 한해에 17만 명이 발병한다고 합니다. 특히 지난해 베트남을 갔는데, 산악지대에서 생활하는 소수민족들이 한센병에 많이 걸려있었어요. 정부에서도 그냥 방치해놨더군요. 거기는 소수민족의 언어가 공용어랑 완전히 다릅니다. 사투리정도가 아니라 언어자체가 아예 다르다보니 아파도 소통이 되지 않아 치료도 못 받는 상황이에요. 신부와 수녀들이 언어를 배워 소통하는데 도와주고 계세요. 한센병 치료를 위한 소통에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해 교실 한 동을 지을 수 있는 돈을 지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려움이 점점 해소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우리나라 한센병 환우들이 고통 받고 있을 때 해외에서 많이 도와줬습니다. 이제는 그 도움을 우리가 되갚을 차례입니다.”

-라자로마을돕기 후원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후원금이 얼마나 되고, 어떻게 운용되는지 궁금합니다.
“한 달에 7천만 원 정도 들어옵니다. 하지만 마을에서 한 달 동안 쓰는 돈만 8천만 원이니 후원금만으로는 마이너스나 마찬가지죠. 음악회 수익금과 교육관 등을 운영해 버는 돈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이 많아서 직원들 월급이 그 중 반을 차지합니다. 한센인 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연세가 많으시니 돌봐줄 사람은 더 필요하게 되죠. 한해 운영비는 24억 정도가 필요합니다. 후원회원들을 더 모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내 한센인 수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혹자는 신규 회원을 모집할 명분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아보기도 했죠. 해외 한센인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우리가 왜 그들을 도우냐고 하더군요. 우리나라에도 못사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을 도왔으면 도왔지 왜 남의 나라를 도우냐고요. 그 질문을 하는 이는 정작 불우이웃을 돕는 것도 아니면서 그럽니다. 그래서 후원 요청을 거절당한 적도 많아요. 유럽에도 라자로돕기회가 있는데, 그들은 아프리카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이야말로 한센병 환자가 단 하나도 없는 것을 아시나요? 우리에게 나병이란 건 성경에만 있는 거 아니냐고 묻는 게 유럽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나라에는 한센병 환자가 없지만, 아프리카나 제3세계를 돕는 모습이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도 예전에 해외에서 굉장히 많은 원조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걸 되갚기 위해 후원인들을 모집하고, 기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조욱현 신부의 숙소에서 한 컷.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미국에도 라자로돕기회가 있는데, 연계해 음악회가 조만간 열립니다. 그 전에는 세미나가 열릴 예정이고요. 그리고 라자로마을에 버섯연구동호회를 만들 겁니다. 이곳에서만 그치지 않고, 중국, 캄보디아, 동남아, 아프리카, 남미 한센인들까지도 교육시켜 버섯재배를 할 수 있도록 기술을 전하고, 자립을 도와주려고 합니다. 전문가와 견학을 다녀왔는데, 기후가 다르고 토양이 다르지만 버섯을 키우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해요.”

-끝으로, 라자로마을 운영 콘셉트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진행하는 사업을 통해 한센병에 관한 부정적 인식을 전환시키고 싶습니다. 한센인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란 걸 알리고, 의왕시민들이 라자로마을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