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중견작가와 화상의 역할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중견작가와 화상의 역할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3.04.3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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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지만 중견이 되기란 쉽지 않다. 가령 회사원일 경우 적어도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은 돼야 세상 물정을 좀 아는 중견 간부로 대접받는다. 그러나 암묵적인 조건이 있다. 적어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한 분야에서 그 정도의 세월을 견딘 사람이라야 한다는 것.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해당 분야에 대한 경륜과 지식, 경험이 혼효(混淆)돼 무르익어야 중견 소리를 들을 만 하다는 것이다.

미술판에서 40-50대 중견작가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 원로들에 치이고 신진들에게 추월당하면서 애써 가꿔온 자리가 위협 받고 있는 것이다. 소위 ‘386세대’에서 ‘베이비 부머’ 세대로 통칭되는 이들은 80년대 민주화 항쟁의 주역이면서 70년대 모더니즘 교육의 수혜자들이다. 전체 미술인의 분포 상으로 보면 허리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예술적 성취도 면에서 보자면 대학을 졸업한 후 약 20여 년에 이르는 동안 화업(畵業)을 유지하여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정립한 계층이다. 말하자면 이제 고난의 열매를 딸 시기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작가로서 느끼는 여러 장벽을 이겨내기에는 녹록치 않은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중견작가들이 피부로 느끼는 어려움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미술시장의 진입 장벽이 높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전업작가들의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화랑주는 인기작가나 원로, 이제 막 부상하기 시작한 신진작가들에게 눈길을 줄 뿐, 중견작가는 아주 특출한 경우가 아니면 관심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긴 요즈음 같은 불황에서야 원로나 인기작가도 그림이 잘 팔리지 않는 것은 매일반이지만, 중견작가의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미술계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견이 무너지는 현실은 인체에 빗대어 볼 때 구조적인 치명적 결함인 것이다. 허리가 무너진다! 그럼 어떻게 온전히 걸어 다닐 수 있단 말인가? 

화랑주들이 아트페어를 비롯한 각종 미술시장에 작가들을 내 보낼 때 가장 중시하는 기준은 ‘상품성’이다. 즉, 얼마나 잘 팔리느냐가 관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기작가는 쇄도하는 주문에 비명을 지르지만, 실력은 있되 인기가 없는 작가는 풀이 죽는다. 그러나 반 고흐의 경우에서 보듯이, 작품의 예술성과 질은 상품성과는 별 관계가 없다. 물론 앤디 워홀처럼 예술성과 상품성을 고루 갖춘 작가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아주 희귀한 경우에 속한다. 이른바 마케팅 전략이 예술시장에 파고들어 특정 작가를 스타로 키울 수는 있겠지만, 그 작가가 미래의 미술사에 남을 수 있는 작가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화상의 역할이 큰 것은 바로 그런 점에서다. 혜안을 가지고 우수한 작가를 오랜 기간 지켜보며 발굴해 낼 수 있는 능력, 적어도 제대로 된 화상 소리를 들으려면 그런 능력과 사명감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화상과 저잣거리 장사치의 차이점은 장사치가 단순히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에 반해, 화상의 판매 행위 속에는 문화의 요소가 스며있다는 것이다. 화상들은 이 ‘당위’의 문제를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 저잣거리의 장사치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얼마 전, <화랑미술제>에 들렀다가 [권진규 특별전]을 관람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조각가 중 한 사람인 권진규와 초대 화랑협회 회장을 역임한 김문호 사이의 끈끈한 동반자적 관계를 조명한 전시회였다. 두 사람 다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작가와 화상의 관계로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70년대 중반에 김문호 사장을 만났다. 바버리 코트를 걸친 중후한 노신사, 이것이 그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었다. 그는 고상한 품격에 어울리는 해박한 지식과 깊이 있는 문화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다. 세월은 가고 사람은 남는다. 역사의 법칙은 죽은 사람을 무덤에서 불러낸다.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