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디자인 개념에서 본 예술과 과학
[특별기고] 디자인 개념에서 본 예술과 과학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
  • 승인 2013.05.1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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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材料)와 기법(技法)으로 본 한국성

<지난호에 이어>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전 서울대 초대 미술관장/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장
역사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류의 문명은 수간채색(水干彩色)의 원료가 풍부하게 생산되는 곳으로부터  발상(發祥)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나일강유역과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유역이 그렇고 갠지스강 유역과 황하유역이 이런 공통점을 지닌다. 이것은 넓게 문화사적 측면으로,  좁게는 회화예술의 재료기법사적 측면으로 파악해 본 내 나름의 역사적 시각이다.

수간채와 화장품, 이 둘은 모두가 정신발달 과정의 “이드”에 해당되는 미적 본능충족(本能充足)이란 점에서 일치한다. 그리스의 조각을 알기 위해서는 지중해성 기후와 대리석(大理石)의 질료(質料)를 파악해야 되듯이 한국의 조각을 이해하려면 사계절의 변화와 화강석의 특성을 연구해야만 비로소 그 단서(端緖)가 잡힐 것이다.

같은 이치로 서양의 그림을 공부하려면 서양의 풍토와 재료기법을 연구해야 될 것이며 한국의 그림을 정확히 파악(把握)하려면 전통회화의 재료와 기법을 면밀히 분석해 볼 수 있는 과학적 접근방법이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로부터 상향적(上向的)으로 연구하여 표현질료(表現質料)가 기법을 통하여 정신세계와 하나로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창작을 하는 화가 자신도 자기가 다루는 질료에 대한 과학적 충분한 이해가 없어 창조적(創造的) 기법(技法)이 나올 수 없으며, 이처럼 재료기법이 어설픈 상태에서는 깊은 사상을 표출할 수 가 없는 일이다. 한국회화의 맹목적(盲目的) 서구화 경향이 바로 기초적인 미술교육에서부터 재료와 기법이 한국적 조형사상과 직결되어 있음을 명쾌(明快)하게 가르쳐 주지 못한데 기인(起因)한 점도 많다고 생각한다. 우리 조상들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단청(丹靑), 석채(石彩)나 지(紙), 필(筆), 묵(墨)을 질료와 표현기법으로부터 이해하면서 회화의 정신세계와 자연스럽게 연계(連繫)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의 재료와 기법을 수입해 다가 쓰는 서양화의 그것보다 더 더욱 생소(生疎)하고 낯설기만 한 것이 바로 한국회화의 재료기법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심지어는 재료와 기법이 사상과 무관함을 강변(强辯)하며 현대회화는 곧 서구화(西歐化)란 등식 속에 우리 그림의 그것을 단 한 번도 거들 떠 보려하지도 않은 채 가장 “한국적”이며 “한국성”을 대표한다고 착각(錯覺)하는 경우도 없지 않음을 본다.

우리 그림의 특성이 인접한 중국과 일본의 회화와 어떤 개별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많은 학자들이 수 없는 미학언어들을 견강부회(牽强附會)로 나열(羅列)하여 관념적 수식(修飾)을 하고 있지만 재료와 기법적인 연구가 병행(竝行)되어 얻어진 명쾌한 답을 말하지 못하는 한(限) 우리 그림의 독자적 조형사상을 열어 나가기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우리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전통적인 조형사상과 재료기법의 좋은 점을 유지발전(維持發展)시키면서 새로운 미술사상과 재료기법을 수용해야 되는 이중고(二重苦)를 안고 있다.  우리 그림의 재료, 도구, 기법, 인격과 사상은 마치 먹이사슬처럼 하나로 연계되어 순환구조(循環構造)를 이룬다. 이 모든 것의 중심은 사람됨 즉, 인격(人格)을 말하며 이것이 곧 화격(畵格)과 등식을 이루는 독특한 동양화의 예술윤리관(藝術倫理觀)이 있음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럼으로 우리의 '한그림'사상은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배제(排除)하고 결국 예술은 "사람됨을 목적(目的)으로 한 수단(手段)"임을 작가는 깊이 요해(了解)하여야 한다. 이상에서 밝혔듯이 한 시대의 미술이나 한 작가의 작품을 완전히 연구하기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소홀(疎忽) 할 수없는 유기적 조형조건들이다.  예컨대,  수십 년 먹(墨)을 다룬 전문가에게 "먹이 수용성(水溶性)인가, 아니면 비수용성(非水溶性)인가"를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수용성"이라고 답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화료(畵料)를 다루는 작가들은 물질과 정신세계 사이의 유기체적 연계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의구심(疑懼心)이 생기게 된다.  이런 경우에 왜 우리가 즐겨 쓰고 있는 먹이 서양화 채료(彩料)로 사용되고 있는 브랙잉크나 튜브 속에 들어있는 채색으로 대체(代替) 될 수 없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것들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이 우리의 수묵화를 단순한 黑白 그림으로 보고 그들의 및 그림 정도 '드로잉'으로 분류한지 오래되었고, 우리는 아무비판 없이 그들의 분류에 항복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