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칼럼① - 일제 강점기한반도 금융 개발을 좌우한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
이수경칼럼① - 일제 강점기한반도 금융 개발을 좌우한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 승인 2013.05.2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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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야스쿠니 신사가 '젠틀맨'이라고 하거나, 종군 위안부가 어느 군대냐고 묻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역사 인식 뉴스와 더불어 민족 인사들을 배출시킨 배재학당의 후신인 배재대학이 국문학과를 폐지하겠다고 나서기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화천댐에 경춘선을 만들었던 일본인들의 자긍심이 부러울 정도이다. 우리나라가 외세침략이 많다보니 온통 돈과 물질만으로 사람을 저울질 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가 오리지널 자료들을 구해 이 자리를 통해 소개하려고 한다.

     방미한 의회에서 DMZ을 세계 평화 공원화 시키겠다고 공언을 한 박 대통령의 국가 규모 정책의 시대 흐름도 있고, 필자의 친구가 화천을 돌고 소개해 준 것도 있고, 또 의외로 일제와 깊은 관련이 있기도 한 역사 청산할 사적지이기도 하기에 깊게 파고들었다.

     이 글에서 공개하는 자료에는 1876년 육군본부에서 제조한 조선 전도인 화천에 빨간 선이 그어진 독도 옛날식 이름이 있는 지도, 아루가 미츠토요(지난번 아리가로 읽은 적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수정했다. 한국에서도 아리가로 총독부 소개한 사이트도 있지만, 정확히는 '아루가'로 읽는다고 밝힌다.)와 조선식산은행 공용차 앞의 아루가 사진, 이외에도 비밀문서였던 '카시마구미의 조선인 노무자 관리에 대해서'라는 팜플릿(1942년) 등이다.

지금은 수도권의 가까운 나들이 장소로 인기가 있는 춘천과 서울을 잇는 경춘선, 그리고 아름다운 청평호수나 낚시터로 유명한 화천댐, 6.25때 중공군을 격파하고 포로로 만들었다고 파로호로 불리는 화천 저수지(대붕호 혹은 구만리호 등으로 불림) 등은 고즈녁한호반과 산세가 어우러지는 리조트 지역이자 화천 산천어축제나 각종 문학축제가 개최되는 곳이다. 게다가 휴전선 국경지역을 되려 [안보와 생태, 상생, 평화의 상징]의 명승지화를 위해 대규모 인프라 정비가 시작되고 있고, 박근혜 대통령도 미국 방문 중인 5월 8일, 미국 의회에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유지해 나가면서 비무장지대(DMZ)내에 세계평화공원을 만들고 싶다…60년 전 남북한 간의 군사충돌을 막기 위해 설치된DMZ는 이제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진정한 비무장지대가 되어야 한다]며 역설할 정도로 비무장지대의 개발 홍보를 대내외적으로 하고 있다.

마침 이 글을 적다가 투병중이신 시인 이해인 수녀님과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며 화천이야기를 했더니 그 곳 출신의 시조문학 선구자인 월하 이태극 시인 문학제가 15일부터 열린다며 그 분이 먼 친척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하니 각종 문학제 문학기행 개최 소식과 함께 다양한 화천 양구 소개를 읽을 수 있었다.

몇년전 강원도 일대를 돌았을 때는 국경과 군부대, 동해안 항구와 산과 계곡과 사찰 등을 기억에 담았던 필자에겐 최근의 문화적 변화가 놀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춘천행 열차를 이용할 기회가 없었던 터라경춘선이나 화천, 청평 지역과 일본 식민지 정책과의 연관성까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올 봄에 친구가 화천댐 관련의 기행을 다녀와서 최근의 화천 상황을 알려줬고, 5월 말에 시민단체의 기획으로 한중미일 화천댐과 DMZ평화기행 발표회를 위한 일본측 자료 조사를 의뢰 받았기에 지난 3월부터 화천댐 관련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일제 강점기를 통해서 한반도의 세관 업무는 물론, 정치,금융계의 거물급 인사로 알려졌던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라는 인물이 우리 근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강수력전기회사 아루가 미츠토요
(참고로 지난 번 컬럼에서 화천을 소개할 때 필자는 당시 자료만으로 ‘아루가 미츠토요’를 ‘아리가 미츠토요’로 읽었으나 정확한 그의 이름은 ‘아루가 미츠토요’로 읽는다. 이 지면을 통해서 수정해 둔다. )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 그는 오랜 세월을 한반도의 정치,경제, 사회 활동과 깊은 관련을 맺었던 인물이다.

화천/청평댐을 기록한 추모집 204쪽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했을 당시, 진남포세관장으로 부임한 이래, 1945년의 패전으로 일본이 한반도에서 발을 뗄 때 까지의 약 40년 이상을 아루가는 한반도와 관련된 금융 기업 활동을 하였던 인물이니 그야말로 일본 통감부 시절부터 일제 강점기의 한반도 살림살이와 관련된 셈이다.

그런 아루가 관련의 몇 가지 자료와 더불어, 일본이한국에서 근현대에 전개한 전기사업을 망라한『조선전기사업사 (朝鮮電氣事業史)』(사단법인중앙일한협회발행, 1981년,총604쪽)와, 비매품으로 아루가 미츠토요의 사후에 그의 활동이나 에피소드를 100명 가까운 관계자가 서술해 놓은 추모집『아루가씨의 사적과 추억(有賀さんの史蹟と思い出)』(도쿄, 겐분샤, 1953년)등에 기재된 아루가 미츠토요의 한반도에서의 움직임에 대하여 알리는 것도 우리근대사의 행보를 더듬는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아루가 미츠토요는 1873년5월 13일에 도쿄에서 서북 내륙 산악지방인 나가노현 가미이나군(長野県上伊那郡)마을의 아루가 미츠히코(有賀光彦)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1년에 나가노 현립 마츠모토 중학교를 졸업 후, 도쿄법학원(현재 법대로 유명한 츄오대학교 전신) 영어법률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1897년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다. 그 뒤, 대장성(1868년부터2000년까지 존재한 일본의 정부 자금 조정을 맡은 중앙관청. 현재의 재무성) 및 각지의 세관 세무서장, 나가사키 세관 감시부장 등을 역임한다. 1905년 5월에 결혼한 아루가의 아내 기미코의 증언에 의하면, 나가사키세관에 근무할 때 아루가의 연봉은 1000엔이었고, 월세값이 15엔, 수도값이 한 달에 1엔50전이었는데 출산 직후라서 가정부를 뒀는데 가정부의 한 달 월급이 2엔이었다고 하니 당시의 노동력이 얼마나 값싼 시대였는지 잘 알 수가 있다.

그가 나가사키에서 근무 중에 한국정부재정고문의 메카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 한국 화폐개혁을 통한 식민지 경제기반을 조장)의 권유로 1906년1월10일에 처음으로 한반도에 발을 디디고, 2월 9일에 한국총세무사란 사령으로 진남포 세관장에 취임하게 된다. 아래에 그의 관계 연표를 참고로 한반도에서의 주된 활동을 표로 소개한다. 

 

관련 해

 

 

 주요 움직임 (필자의 임의로 한반도 관련을 중심으로 재구성)

 

 

1873

 

 

5월13일 아루가 미츠히코의 장남으로 나가노현 가미이나군에서 태어남

 

 

1890-1891

 

 

나가노현립 마츠모토 중학교를 졸업 후 도쿄법학원에 입학

 

 

1894

 

 

7월에 도쿄법학원 영어법률과를 우등생으로 졸업.

 

 

12월에 근위야전포병연대 보출중대에 1년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모범병이 됨

 

 

1895

 

 

11월 지원병종말시험에 급제 후 제대. 다음해 3월에 육군포병소위가 됨.

 

 

1897

 

 

11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1898

 

 

동향 선배로부터 메카타 타네타로를 소개받고, 그의 추천으로 대장성 소속 임관으로 주세국에 근무하게 됨. 그 후, 한국에 갈 때 까지 나가사키 세관감시부장 등을 역임.

 

 

1906

 

 

1월10일 내각 사령을 받고 조선에 단신 부임.

 

 

(조선통감부 설치로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통감이 됨. 8월에 한일은행 설립. 통감부 철도관리국창설로 경부, 경인선 철도 매수. 경의선 개통)

 

 

2월9일 한국총세무사 사령에 의해 진남포세관장에 취임.

 

 

1908

 

 

1월 한국정부관제 개정에 의해 통감부 일본인 간부는 전원 한국 관리로 임용. 한국정부로부터 다시 진남포세관장 사령을 받음.

 

 

(헤이그 밀사 사건을 이유로 고종황제 퇴위. 8월에 순종황제 즉위)

 

 

1910

 

 

1월10일 한국정부관세국서기관에 임명되어 감독부장이 됨.

 

 

(3월 토지조사국창설. 8월 일본에 강제병합. 10월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취임. 조선총독부 관제가 공포됨)

 

 

1911

 

 

7월14일 총독부도사무관으로 경기도내무부장이 됨.

 

 

1918

 

 

6월20일 조선식산은행설립위원회 간사. 위원장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

 

 

8월28일 총독부 참사관 겸 총독부 사무관에 임명.

 

 

9월25일 겸관 및 본관을 면하여서 관료 생활을 끝냄.

 

 

10월1일 조선식산은행 성립, 이사로 취임. 한국인 이사로는 박영효.

 

 

1919

 

 

(1월22일 고종황제 붕어. 3월1일 독립만세운동 전개. 7월 조선신궁 창립. 8월, 3.1운동 영향으로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 사임 후 3대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총독이 됨. 헌병제도 폐지. 9월2일 신임 총독 사이토 일행에 강우규 폭탄 던짐)

 

 

1920

 

 

7월2일 조선식산은행 두취(총재)에 임명됨

 

 

1921

 

 

1월 조선잠사회 회두로 취임(16년11개월 재임)

 

 

9월 조선산업조사회위원 촉탁

 

 

11월 조선생명보험회사 고문으로 추천(재임 16년)

 

 

1922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에 취임(재임 15년 9개월)

 

 

조선곡물상조합연합회 회장으로 취임(재임 15년 9개월)

 

 

1923

 

 

3월 조선서적인쇄회사 창설

 

 

7월 조선산립회 회장에 취임(재임 10년2개월)

 

 

    신설 만주은행 두취(총재)가 됨

 

 

1925

 

 

7월2일 조선식산은행 총재임기 만료 및 2기 총재로 재임

 

 

    20일 조선중앙광업회사 대표취제(이사)역을 맡음.

 

 

전기 및 철도사업회사 사채를 인수(1500만엔),

 

 

본격적 사채 인수 시작(1927년부터는 조선지방채 발행 시작)   

 

 

1926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창립위원장이 됨

 

 

1928

 

 

6월22일 조선총독으로부터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위원을 촉탁(재임 9년5개월)

 

 

8월6일 금융제도조사회 위원 촉탁(총독부로부터. 재임 9년 3개월)

 

 

1929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과 이사를 위촉(조선총독부로부터)

 

 

5월22일 미곡조사회 위원을 내각으로부터 명령받음

 

 

7월1일 조선저축은행 설립, 초대 두취(총재)로 취임(자본금 500만엔)

 

 

8월17일 재단법인 조선사회사업협회이사로 취임(재임 8년3개월)

 

 

1930

 

 

7월2일 조선식산은행 3기째 총재 취임

 

 

1931

 

 

5월22일 은행관계 농장관리 경영을 위한 성업사 설립(자본금 200만엔)

 

 

9월19일 내각으로부터 조선전기사업조사회위원으로 명령받음.

 

 

(사이토 총독 사임 후 우가키 가즈시게 대장이 신총독으로 취임.

 

 

7월 만보산 사건의 영향으로 평양 등지에서 조선인 중국인 충돌 잦음.

 

 

8월18일 만주사변 발발)

 

 

1932년(60세)

 

 

3월4일 조선간이생명보험사업자문위원회 위원 촉탁(재임 5년 8개월)

 

 

5월17일 재단법인 금강산협회 부회장에 취임(재임 5년7개월)

 

 

7월14일 사단법인 조선광업회 이사로 취임(재임 5년3개월)

 

 

7월15일 사단법인 조선방송국부총재로 취임(재임 5년3개월)

 

 

7월23일 내각으로부터 농림성미곡부 고문을 명령받음

 

 

11월9일 내각으로부터 미곡통제조사회위원을 명령받음

 

 

(조선상공회의소 설립. 조선전기사업령 공포. 만주국 성립. 5월15일에 일본서 이누가이 수상이 암살당함. 사이토 마코토 내각 성립)

 

 

 

 

12월22일 조선신탁회사(자본금 1000만엔) 설립.

 

 

1933년(61세)

 

 

3월4일 조선한센병예방협회 평의원으로 취임(재임 4년8개월)

 

 

5월6일 와카쿠사(약초)관음봉찬회장으로 건립에 매진

 

 

5월18일 경성국방의회장으로 추천받음

 

 

7월18일 조선금융조합연합회 회장이 됨(9월1일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창업)

 

 

9월27일 조선경마협회 회장취임(재임 4년3개월)

 

 

10월21일 제국비행협회 경성지부 이사로 취임(재임 4년2개월)

 

 

12월19일 사단법인 선미(조선 쌀)협회회장으로 취임(협회 해산까지 10년 재임)

 

 

(이 해에 영등포에 조선맥주 및 쇼와 기린맥주 공장이 설립되어 처음으로 조선산 맥주를 출하. 단, 처음엔 물과 왕관 콜크만 생산)

 

 

1934

 

 

4월15일 조선국방의회연합회 회장으로 추천됨

 

 

4월24일 내각으로부터 미곡생산비조사회위원을 명령받음

 

 

7월3일 귀족원령 제1조 제4호에 의해 귀족원의원으로 임명됨(일본 총리대신 명)

 

 

7월13일 제 3대 저축은행 두취(총재)가 됨.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고문으로 취임

 

 

9월1일 내각으로부터 미곡대책조사회위원을 명령받음

 

 

10월20일 일만면화협회 조선지부 고문으로 취임(재임 3년)

 

 

11월30일 일만실업협회 평의원으로 취임(재임 3년)

 

 

1935

 

 

7월2일 조선식산은행 두취(총재)로 4기 중임.

 

 

(5월 강원도 영월 화전을 이용한 영월화력발전소 건설이 조선전력회사로 허가가 남)

 

 

12월2일 조선총독부 시가지계획위원회 위원을 촉탁받음(총독부로부터. 재임 2년)

 

 

1936

 

 

1월8일 일본고주파중공업회사(자본금 1000만엔) 아루가의 물밑 외교 파워로 설립. 본사는 경성에 둠.

 

 

5월13일 제국재향군인회 경성지부 고문으로 추천받음

 

 

6월13일 내각으로부터 내각조사국전문위원으로 명령받음.

 

 

7월20일 아루가의 결단으로 경춘철도회사 설립(우시지마가 초대 사장).

 

 

8월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선만탁식회사설립위원을 촉탁받음

 

 

8월26일 정무총감으로부터 조선산업경제조사회위원을 촉탁받음

 

 

9월15일 경성도시계획연구회 회장으로 취임(재임 1년2개월)

 

 

11월21일 내각으로부터 미곡자치관리위원회 위원을 명령받음

 

 

(2.26, 일본에서 현역장교 병사들이 사이토마코토 수상 등을 암살. 8월에 우카키 총독 사임 후 미나미 지로 대장이 총독이 됨)

 

 

1937년(65세)

 

 

6월1일 한성은행 두취로 취임

 

 

7월1일 내각으로부터 중앙경제의원회를 명령받음

 

 

7월5일 고주파 상무로 입사

 

 

(7월 중일전쟁 발발. 9월에 조선임업개발회사 설립)

 

 

10월30일 조선식산은행 두취를 사임하고 재주 32년의 조선, 재임 20년의 식산은행을 뒤로하고 도쿄로 건너감.

 

 

11월13일 조선식산은행 고문으로 추거.

 

 

12월2일 고주파 중공업회사 상담역으로 추천받음

 

 

1938년(66세)

 

 

2월7일 조선저축은행 고문으로 추거

 

 

2월19일 내각으로부터 기획심의위원을 명령받음

 

 

7월5일 일본고주파중공업회사 사장으로 취임

 

 

(20일에 고주파회사 임시해군구매명부에 등록. 23일에 고주파 함경북도 성진 공장을 육군조병창 지정공장이 됨)

 

 

8월27일 내각으로부터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을 명령받음.

 

 

1939

 

 

2월1일 한강수력전기회사(자본금 2500만엔)설립, 사장에 취임.

 

 

4월28일 내각으로부터 일본미곡회사설립위원으로 명령받음

 

 

5월3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방송협회 고문을 명령받음

 

 

(6월에 국민징용령 발포. 10월에 총동원법에 의한 통제령 발포 속출)

 

 

1940년(68세)

 

 

2월8일 고주파자본금 1000만엔을 5천만엔으로 증자결정. 차남 미츠노리와 노나카 양씨를 두취역으로 취임시킴.

 

 

3월 함경북도 성진, 도야마, 기타시나가와 각 공장의 제2기 확장계획설비.

 

 

3월15일 재단법인 도쿄응용과학연구소 이사로 취임

 

 

8월6일 일만실업협회 평의원으로 취임

 

 

8월 북한강물이 넘쳐서 한강수력전기 현장공장의 피해가 막대.

 

 

(8월 [동아일보][조선일보]폐간당함)

 

 

1941년(69세)

 

 

1월26일 내각으로부터 농림성식량관리국 고문을 명령받음

 

 

4월4일 한강수력전기회사 두취역 사장을 사임함.

 

 

5월10일 한강수전회사 고문으로 추거

 

 

8월 재단법인 중앙협화회 이사로 취임

 

 

9월15일 함경북도 성진고주파병원 개원

 

 

9월25일 주식회사 와신(화신)상담역으로 추거

 

 

(8월, 수풍댐 만주측 송전개시. 9월에 수풍댐 조선측 송전개시. 12월에 태평양전쟁 개시)

 

 

1942년(70세)

 

 

6월21일 조선제련회사 두취역회 회장을 퇴임함

 

 

11월26일 동아경제간담회 평의원으로 선출

 

 

(2월, 일본 식량관리법 공포. 4월에 도쿄가 처음으로 공습받음. 5월에 1944년(쇼와 19년)부터 조선인 징병제도 실시를 결정. 같은 달, 미나미 지로 총독 사임 후 고이소 구니아키 대장이 신 총독이 되나 1944년 7월에 고이소 총독 사임 후 아베 노부유키 대장이 조선총독이 됨. 11월에 정부에 대동아성을 개설)

 

 

1943년(71세)

 

 

7월 조선전업주식회사 창립. 한강수전회사는 이곳으로 흡수 합병됨,

 

 

11월1일 일본원철회사 취체역 사장으로 취임

 

 

(3월에 조선전력관리령 공포. 10월에 상공성 명칭을 군수성으로 개명. 학생징병유예제도를 취소하고 학병으로 함. 11월에 미영중 각국에서 가이로선언. 12월에 조선중요물자영단 설립)

 

 

1944년(72세)

 

 

12월8일 고주파중공업회사 군수회사로 지정됨

 

 

(7월 고이소 총독 사임 후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취임

 

 

 7월 토죠 내각 총사직, 고이소 전 총독이 수상으로 내각을 조직

 

 

11월에 도쿄 상공에 처음으로 B29기 출현, 공습히 격화 됨)

 

 

1945년(73세)

 

 

8월 일본의 패전으로 고주파회사 업무 쉼. 성진공장은 소련군에 점령 당하나 나중에 북조선인민위원회 관리하에 들어갔다고 함.

 

 

10월 고주파 본사 및 건설중인 경성공장은 재한 미군군정청 명령에 의해 북선기업사로 인계됨.

 

 

12월11일 고주파 기타시나가와공장은 연합국 최고사령부로부터 민수생산(군수품 생산이 아닌)으로의 전환 허가를 받고 사업재개.

 

 

(4월에 미군의 오키나와 본도 점령, 고이소내각 총사직 후 스즈키 내각 성립. 6월에 독일 패망과 히틀러 사망. 7월에 미영중 3국의 포츠담 회담. 일본의 항복조건을 결정함. 8월 미군이 원자폭탄을 6일에 히로시마, 9일에 나가사키에 투하. 포츠담 선언 수락과 동시에 일본 항복함. 미군이 조선진주, 조선해방을 선언. 9월에 항복문서에 일본정부 조인함. 10월 시데하라 내각 성립. 12월 대일 관리이사회 설치)

 

 

1946년(74세)

 

 

1월 대장성령 제88호 및 그외 법령에 의해 고주파회사는 재외회사로 제약을 받음

 

 

3월 고주파 도야마 공장은 연합국 최고사령부로부터 민수생산에의 전환허가를 받고 사업재개.

 

 

10월1일 총사령부 각서 E항(일본의 팽창에 관계한 금융기관)의 간부에 해당한다고 하여 아루가 미츠토요는 공직 추방을 받음.

 

 

(5월에 A급전범의 국제 재판 열림. 11월에 신헌법 공포됨)

 

 

1947년(75세)

 

 

5월31일 총사령부 각서 G항(유력한 회사 간부)에 해당된다고 하여 2중으로 공직추방을 받음

 

 

(4월에 일본은 6.3.3 신학제를 실시. 5월에 신헌법 시행)

 

 

1948년(76세)

 

 

12월에 감기 기운과 더불어 병상에 누움.

 

 

(7월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취임. 11월에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토죠 히데키(東條英機) 외 25명에게 판결을 내림, 12월에 형 집행)

 

 

1949년(77세)

 

 

1월 중순 위암(말기암) 진단. 5월31일, 도쿄 세타카야쿠 기타자와 자택에서 사망.

 

 

8월 정령제291호 [구 일본점령지역에 본점을 둔 회사의 본국에 있어서의 재단 정리에 관한 정(부)령]에 의해 고주파회사는 내지(일본)법인으로서 신회사 설립준비를 시작함. 다음 해 5월에 신회사 일본고주파 강업주식회사 설립. 사장은 차남인 아루가 미츠노리

 

 

1951

 

 

8월15일 각서 E항 G항 및 해당의 추방령이 해제됨

 

 

(1950년6월에 한국전쟁. 9월에 연합군이 서울 탈회. 12월에 중공군이 북한군에 가담하여 연합군은 철퇴개시. 1951년 1월 공산군이 다시 서울 점령. 연합군이 3월에 서울 재탈환. 4월 맥아더 장군 파면.-1953년7월에 휴전협정. 2013년에 정전 60주년을 맞이함)

어렸을 때 부터 장남의 책임감과 우등생으로 자라왔던 아루가는 21세때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모범병으로 뽑힐 정도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성격으로 성장했다. 그렇기에 그는 한국에 건너와서 황폐했던 당시의 땅을 보며 [일본 땅으로 거듭 날 조선]의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많은 활동을 했다. 결과적으로 귀족원 의원이 된 아루가는 평생을 통해 정부 내각의 명령을 거절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적이 없다. 중앙 협화회 이사는 물론 각종 내각 명령을 성실히 이행한 근대 일본의 우직한 충신이었다. 그의 일면을 보자면, 조선증권거래소의 이사장이 된 고스기(小杉謹八)에게 경성 거래소와 인천 미두(쌀과 콩)거래소와 합병을 해서 사장을 맡아 달라는 정부 부탁이 들어 왔을 때의 일이다. 고스기는 당시, 골치아픈 개인의 제재회사를 맡고 있었기에 강력히 고사를 하다가 아루가에게 의논을 하러 갔다. 그러자 아루가는 [그러면 안돼!! 제재회사는 자네의 사적인 회사지만 거래소는 공적인 곳이므로 자네가 하지 않으면 안돼!!][이런 곤란한 시기야말로 (맡지 않으면) 안돼!! 공적인 기관이므로 자네 개인 것과는 달라!!](246-248쪽 참조) 라며 단도직입적으로 고스기의 사명을 제언한다. 그에겐 국가를 위한 성실함과 충성심이 가장 큰 존재였음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그런 아루가가 세관 관료직을 떠나서 조선식산은행에 있을 때는 특히 금융적 융통이 가능했기에 숱한 한반도의 개관간척사업, 특히 쌀 증식계획을 추진 및 농지 개발과 관련된 융자, 각종 재해에 대한 치수 대책, 저축은행설립,수리조합 융자,경성방송국 등의 방송사업 지원, 지하자원 개발 및 전철 사업, 전력 사업 등 실질적으로 폭 넓은 개발 사업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의식한 아루가는 근대 자본주의 이식 과정 속에서 화폐경제를 활용한 적극적인 융자와 의욕으로 [조선은 일본 내지를 초월할 정도로 발전할거야]란 말을 실천하려고 강한 추진력을 보였다.

위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설철도나 산미증식을 위한 농지 개간, 다양한 간척 개발 수리사업,산림 민유림(국유림이 아닌)과 관련된 사방 식림은 물론, 전력 사업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을 하게 되고, 아루가는 노후에 일본고주파중공업 회사에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전쟁으로 인해 시국사태를 맞게 되고, 일본고주파중공업은 군수산업회사로 지정받게 된다. 그 뒤, 아루가는 일본의 팽창에 관계했던 금융가로 낙인이 찍혀 1946-47년에 GHQ로부터 공직추방을 당하게 된다. 위암 말기로 쓰러져 77세의 생애를 마감하게 되는데, 그의 사후인 1951년에 [추방]에서 해제되어 그의 추모집에는 그런 내용을 아쉬워하는 관계자들의 글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런 그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 중에는 무모한 조선 식민지 정책의 일부를 탓하는 글도 적혀져 있다. 예를 들면 조선식산은행 이사를 지냈던 야마구치 시게마사(山口重政)는 조선중앙협회를 창설하게 된 과정 등을 통하여 아루가의 단호한 결단력에 대한 칭찬과 더불어 총독정치의 지지자였지만 [“창씨개명”문제는 조선사람들이 징용, 공출과 함께 3대 통한사로 하는 것의 가장 첫번 째로 꼽을 정도로 비정(정치가 아님)이었다. 非는 그야말로 위정자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나미 총독은 조선을 이해하고 조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늘의 소리”로 들었어야 했다. “중앙조선협회” 창설자인 아루가씨도 “용서못할 사나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254쪽)라는 비난을 할 정도니 창씨개명과 징용, 공출이 비인간적 행위였음을 자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위해 일하고 파견되었던 사람들이기에 일본의 식민지 통치 지배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 있다.

반대로 그가 귀족원 의원에 뽑힌 것은사이토 총독의 大자비 염원이라며, 사이토 총독 때 아루가가 조선에서 공헌한 시간과 업적 면이 다대하고, 일본의 조선정치사를 표징하는 인물인 만큼, 사이토가 일본의 수상으로 조선을 떠날 때 그 업적을 치하하여 박영효 후작과 아루가를 귀족원 의원에 추대하였다고 논하는 이쿠다 세이자부로(生田淸三郞, 조선총독부 내무국장 역임. 명성황후 살해 현장에 있었고 에이조 보고의 당사자였던 이시즈카 에이조의 총독부 부하로 종사)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아루가씨가 그 기대를 어기지 않고 민족적 차별을 초월하여 조선에 어우러진 사실을 생각하자면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오늘의 조선정치사가 일부 비판적인 목소리로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정치가 과연 비판받을만한 것인지 어떤지는 여기서 논하는 것은 피하지만, 현실 문제로서 조선이 세계의 “보잘 것 없는  나라”로 불렸던 과거에서 근대적 세계적 궤도에 오를 때 까지 발달하게 된 것은 일본으로부터 다년간에 걸쳐 부단한 인적 에너지, 물적 자본 주입에 의한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원조를 다대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만약이라도 공정한 사려를 가진 사람이라면 내외인을 막론하고 승인할 것이고, 또한 각종 통계를 보더라도 분명한 것이다.더구나 격한 패전과 더불어 (일본)국민은 모든 과거에 대해서 회의적이 되고, 자신감을 잃고, 특히 일반 국민은 조선 정치에 대해서 거의 무관심한데다 또한 무식한 과거를 가졌기 때문인지, 자주적 비판력을 잃고, 쓸데없이 일본인 외의 감정적 내지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선전적 나쁜 소리(악성), 혹은 일본인 속에도 볼 수 있는 관념적인 자유주의 내지는 인도주의 일파의 센티멘털한 비판에 동조해 혼동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 국민은 과거 역사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냉엄 공정한 자주적 비판하에 서서 장래의 일에 전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에서는 독립을 얻고 환희의 절정에 달했던 것도 한 순간에 비극과 황폐하게 탈바꿈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려하고 참기 힘들지만, 그 와중에서도 저 땅의 가두에 조선 정치의 옛날과 일본인을 떠올리는 목소리가 곳곳에 잠재한다고 때때로 알려주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이미 돌아가신 사이토씨의 대자비 염원과 아루가씨의 조선에 몰두했던 그 공적이 절실히 생각날 뿐이다.](257-258쪽)

이쿠다는 일본의 관료로서 투자했던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손득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일 수 밖에 없다. 왜냐면 당시 일본이 그만큼 자본금을 아쉽지 않게 지출할 정도로 풍요로운 사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장악하고, 일본의 선진적 문화를 조선에서도 향유하며 대륙 경영을 하려하던 국가 규모의 리스크가 많은 투자였기에 그 투자 가치를 패전이라는 결과로 거두지 못했다는 이해타산이 억울함으로 표출된 철저한 지배측 관료의 발상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모순된 비극이지만 이런 맥락을 한국의 일부 움직임에서는 [근대 경제 발전을 향유토록 도와준 고마운 나라]란 평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배은망덕한 한국 조선인 죽어라고 외쳐대는양심없는 일본 우익무리들의 주장과 같은 맥락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은 독립국가이고 독자적 역사를 걸어 온 사회라는 점이다.

아루가 미츠토요. 그는 스스로가 [제국 일본의 문화]가 된 김치와 고추장을 선호했고, 조선 사람과 일본인을 차별해서는 안된다며 조선의 개발을 위해 때로는 일본 국내보다 더 많은 자본금을 유치하며 조선땅에 애착을 가지고 자신의 본무에 충실했다. 그는 [선진 제국주의 일본인]이란 자부심으로 [일본땅으로 거듭날 조선의 개발]에 남다른 집념으로 임했던 실천가였다.그렇기에 지금도 그를 내세워 일본 식민지 통치 지배를 정당화하거나 미화하려는 국내외의 일부 움직임들은 그를 조선의 구세주처럼 평가하기도 한다. 왜냐면 당시 한국의 정재계 인물들이나 부호들, 엘리트들이라면 아루가와 한두 번 연관이 안 되었던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루가의 존재는 컸고, 많은 사업에 관여한 금융 기업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둬야 할게 있다.

아루가 미츠토요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감에 충실하며 조선의 개발에 몰입하였던 인물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사업 개발에 몸을 아끼지 않고 긍정적으로 임한 일벌레였다. 근대 일본측 입장으로는 분명 자랑할만한 일꾼이었다.

그러나 피지배국인 한국 입장에서 그를 순수하게 높이 평가할 수는 없다. 왜냐면, 그가 그토록 개발, 발전시키려했던 이유는 사랑하는 조국 일본의 [후발 동족이 될 조선을 사랑한 것]이지 [이웃 나라 대한제국과의 친선우호를 위해 헌신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본질적 취지를 잊고 자칫 그들의 배려에서 발로된 온정적인 활동만 높이 평가하며 근대화 발전의 결과에 만족하며 감사에 취한다면 그들의 침략전쟁과 대륙 경영의 야욕으로 미증유의 희생이 된(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주변 국의 희생자가 2000만명에 이르고, 일본인 자국민만도 300만명이 죽어갔다. ) 억울한 죽음들을 인정해버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아루가는 [자기 동포애]에 충실했던 사람이다. 물론, 오랜 유교적 폐단으로 특권계급층 세도가들에게 비인간적인 폭압을 당하며 가난의 대물림으로 헐벗고 굶주리던 수 많은 내 동족을 무시한 채, 일신의 영달에만 급급하여 사리사욕의 권력다툼에 고관대작들이나 양반, 유생이란 이름으로 일진회까지 결성하여 나라 갖다 바친 매국 인사들에게 모순과 비관을 느끼던 수 많은 사람들은 차라리 자국이 될 조선을 위해 헌신적일 정도로 개발 사업에 몰두해 줬고, 많은 일본인들이 미개한 나라라고 조선을 비하하던 당시, 조선식산은행에 조선인 행원 고용을 감행하였고, 그들의 대우에 일체 불평등을 두지 않게 대응했던 그를 높이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원칙을 관철시킨 인물이고 다른 무력적인 일본인들과는 달랐다. 그렇기에 요령보다 매사에 성실하게 매진한 아루가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를 비춰 볼 필요도 있다. 하지만 아루가는 일본의 전략적 식민 정책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이행한 인물이란 점과 그 목적이 일본화에 있었단 사실을 생각하면, 그러한 결과들로 한반도의 약화와 한국 전쟁의 비애로 지금도 남북한이 총구를 마주한 분단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역사적 본질인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대한제국의 지배 계급층들이 아루가처럼 홍익정신으로 동족과 자신의 산하에 헌신적 일념으로 투자를 하고 다가 올 시대의 흐름을 꿰뚫지 못한 채 이기적 권력 갈등으로 국내의 결속력을 분산시킨 안일주의자들의 행위가 두번 다시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와 더불어 모든 삶을 조국 광복에 걸고 싸우다 죽어간 독립투사들의 헌신적 희생도 높이 평가하여 글로벌 사회로 거듭날 국가 인재 교육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 국가에 대한 주권의식과 책임교육이 이뤄지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하게 배출한 글로벌 인재라도 결국 이해타산 중심으로 국가를 떠날 확률이 많고, 인재 부족 현상으로 말미암아 한국은 머지않아 국가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도 있다. 진지하게 향후 100년의 역사를 준비해야 할 과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