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칼럼② -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와 경춘선, 화천·청평댐 개발 이야기
이수경칼럼② -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와 경춘선, 화천·청평댐 개발 이야기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 승인 2013.05.2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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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칼럼① - 일제 강점기한반도 금융 개발을 좌우한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에 이어서

조선내의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교통 기관이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그의 상사 미시마 타로(三島太郞, 초대  조선식산은행 은행장)와 뜻을 같이 하던 아루가는 조선재단저당령과 담보부사채신탁법 시행을 계기로 건설자금 대출, 사채 인수, 주식 응모 등을 통해 사설철도사업 조성에도 힘을 쏟았는데, 경남철도(장항-장호원간), 경춘철도(경성-춘천간), 평안철도(진남포-용강온천간)등의 건설 자금과 관련이 되었다. 요직의 관료생활과 조선의 유력 자금원을 만지던 아루가는 남달리 조선의 지리적 자원적 동향을 빨리 파악할 수가 있었다. 물론 그가 조선총독부 세관 과장 등의 관료직을 통해서 쌓아 온 당시의 금융 실업가 정치가등과의많은 인맥과도 관계한다.

예를 들면 철도 계획에 있어서도 총독부 세관 과장 시절의 동료였던 총독부 철도부장 유게 코타로(弓削幸太郞, 고등문관시험합격, 대장성 출신, 총독부 학무과장 때 조선의 교육과 관련한 식민교육정책에 진력) 등을 통해 인프라 추진에 설득력만 가미되면 왠만한 사업들은 통과가 되었던 것이다. 즉, 일본인들의 한국내에서의 개발 사업 등에는 강력한 인맥(동향 동창, 동료 경험 등의 지연 학연 등)관계와 한국내의 사업 추진을 의도하던 재정계 한국재벌들과도 상통하였기에 비교적 일사천리로 추진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식산은행지점장 출신으로 경춘철도회사 사장을 지낸 시오가와(鹽川濟吉)의 회고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강원도는 유명한 금강산을 비롯해 대삼림과 지하자원, 해산물 등이 풍부하고 유망한 곳이나 경성 춘천간 조차도 산악 하천 계곡이 많아서 공사를 하기 힘들고, 금방 경제적 효율을 낼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착수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던 터라 의외로 철도건설 등은 미개발 상태였다. 그러나 아루가 총재는 조선의 개발이라는 일념으로 눈 앞의 이해타산을 떠나서 감행했던 것이다. 그렇게해서 경춘철도주식회사가 1936년 7월에 창립(자본금은 1000만엔, 제1기 공사로 경성과 강원도 고도를 잇는 94킬로미터의 광궤노선)되었다.
건설 자재비 등의 경제성을 생각했던 총도구 철도국은 국철 경원선 청량리역을 기점으로 하려 했으나 아루가는 [경춘철도는 독자적 노선을 가지고, 또한 경성에 독자적인 시발역을 가지는 것이 장래를 위해 가장 필요하다]고 역설. 그 결과 경성부내 유일의 사철(민영철도)이 되었고, 주변에는 경성대학 이공학부, 퇴계원 운동장, 유원지 등의 신설을 보며 승객 증가로 예상외의 수익을 올리게 되었고 (중략) 경춘철도 1기 공사를 완성하여 업적도 순조롭고 아루가 사장의 한강수력전기 건설자재 운반선도 되어서 사철로서는 신설 5년만에 총독부 보조금을 사퇴할 정도로 우수한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전쟁 중 물자결핍 때에 경성 백 수십만명의 시민에게 연료 부족 없이 추위에 떨지 않게 했던 것도 경춘철도 건설로 강원도 산림 개발이 진전되어 목재장작나무 등을 경성에 산처럼 쌓아 날랐기 때문이다.] (참고;『아루가씨의 사적과 추억(有賀さんの史蹟と思い出)』,197-199쪽)

라고 술회하고 있다. 경춘선 개발의 필요성을 주시한 아루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지만 왜 중일전쟁이 일어났는지, 강원도의 목재 자재 반입과 현지인 동향 등에는 언급이 없다. 물론 이 책은 아루가 미츠토요의 업적 찬양이라는 본질성이 있기에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나 관계자에 의한 서술이니 한계성이 있음을 감안하자.

일단 경춘선을 이용한 수도권에의 강원도의 풍부한목재 자원 반입 가능성이 생기자 아루가는 자신이 맡았던 일본고주파중공업 인천 공장 등에 필요한 전력 등의 확보를 위해 화천·평창발전소(한강수력전기회사 사장)개발을 맡게된다. 물론 조선식산은행 총재 등을 맡으며 당시 조선의 금융 재계에 영향력을 미쳤던 만큼 한국의 재정계 부호들을 움직일 수 있었고, 그랬기에 한강수력전기회사를 만들 때도 당시의조선 재계의 거물급들인 박영철, 김연수,김한규등이막대한 투자금을 맡고, 조선측 대표로는 그들 세 사람이 들어가게 된다.

참고로 조선의 대표 투자가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 보자.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은 전북 익산 출신으로 삼남은행장,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거쳤던 박기순의 아들로 일본 육사 출신인데 육군 소위 때 러일전쟁에 참전하였다가 34세 때 익산 군수로 취임한다.
그 후 강원도, 함경남도 지사, 동양척식회사 감사, 조선방송협회 이사, 삼남은행장 등을 거쳤고, 그 역시 아버지처럼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참고로 박영철은 조선의 마타하리로 불렸으며, 육군총장과 궁내부 서리였던 현영운의 전처 배정자와 결혼 후 이혼을 했지만,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수당 김연수(金秊洙, 1896년~1979년)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호남 재벌 김경중의 아들이자 인촌 김성수의 동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산학교 및 도쿄 아자부 중학교,교토 第三고등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 경제학부를 졸업(1921)한 엘리트다. 다음해에 김성수가 경영하던 경성방직 상무로 취임하였고, 1924년에 삼양사 설립 후,장성농장 및 함평, 해리 간척 사업을 비롯, 만주 천일농장,반석농장 개설에도 힘을 쏟았던 인물이다. 조선방적 이사장 및 삼양사 사장, 명예회장 등, 수 많은 기업을 거느렸던 부자였고, 중추원 칙임참의와 만주국 경성주재 명예 총영사 등을 역임하였다. 또, 김성수와 더불어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 설립 및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재건 활동에 참여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진력하였지만 식민지 말기 국민총연맹의 후생부장으로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학도병 참전을 권유하는 등의 친일 행위로 비판을 받기도 하는 인물이다.

또, 김한규(金漢奎, 1877~1950년)는 한성부 출신의 기업 금융인으로 일제 강점기엔 활발한 금융활동을 하였던 인물이다. 1934년에 중추원 참의 역임. 원래 통역관 양성학교인 관립 한성 외국어학교서 일본어 교육을 받고, 일본어 교사, 학부서기관 등의 대한제국 관료를 역임하였다.  한일은행 전무취체(요즘의 이사), 광장주식회사 취체, 조선상업은행(현재 우리은행) 감사, 경기도평의회 의원,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등을 거쳤고, 김보합명회사의 농장 등을 경영한 대지주로 해방 직후엔 조흥은행장 등을 역임했다.

이렇듯 쟁쟁한 거물급 재계 인사들의 자본 투자를 움직일 정도로 아루가의 존재는 컸었다. 그리고 총 50만주식을발행하여조선식산은행과일본고주파, 경춘철도가각 8만주 씩, 그외에금융계나경성전기등이주식을가졌으나, 당시 한강수력전기회사 상무였고 아루가의 절친한 후배였던 가나이 요우사쿠(金谷要作)는 실질적으로 기본 자본금의 95%가 조선자본으로 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1939년2월1일에 창립(전기사업 허가연도는 1938년10월)한 한강수력전기주식회사는 주로 화천발전소와 청평발전소를 개발하였고, 제1기계획으로는 북한강 상류의 화천과 청평에 발전소를 건설하여 최대 출력 12만 kW를 발전하고, 이것을 경인지방에 송전하려했다. 설립당시의 본사는 경성부중구황금정(현을지로)에 있었다.

지난번 컬럼에서 화천댐 건설 착공에 대해서 소개했기에 상세한 내용은 각설하기로 하는데 화천은 용적830,000㎥의중력식콘크리트댐과 주위 94km의저수지 조성으로 출력81,000kW의발전소 건설이었고, 청평은 용적 234,000㎥의중력식콘크리트댐과 주위 71km의저수지 조성으로 출력 39,600kW의 발전소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처음엔 순조로웠으나 태평양전쟁 발발 등으로 자재 입수와 물가고 등으로 건설비가 예산을 훨씬 넘어버렸기에 결과적으로는 전력국관에 사업을 양도하게 된다.

 화천댐 저수지 대붕호(구만리호, 별칭 파로호)의공사준공은 1944년 10월로청평호수의 8월준공으로부터 2개월후가되는데, 당시 댐건설 관계를 잘 아는  한강수력전기 상무 가나다니 요우사쿠는『有賀さんの史蹟と思い出』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화천’에는 높이 약 100미터, 폭이 400미터에 가까운 콘크리트 댐을 짓고, 주위 24리의 대저수지를 만들어서 30,000킬로의 발전기 3대를 갖춰놓고, ‘청평’에는 600미터 폭에 걸쳐서, 높이 10미터의 문을 단 35미터의 콘크리트 댐을 짓고, 이것 또한 주변 18리의 저수지를 만들어서 카프란식 저낙차수차에 의한 20,000킬로의 발전을 자아내려고 하였다. 이 발전기 일식(一式)은 히타치제작소에 주문했는데 사용하는 카프란 수차는 히타치 회사의 자신있는 제품으로 동양 제일의 기록물이었다. 또, 댐 건설은 전부 카시마구미에 청부를 하였다. 카시마구미로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대공사였기에 본사의 전무 와타나베 기사부로(渡辺喜三郎)씨가 경성에 상주하였고, 와타나베씨한테는 무라이 사하치(村井佐八)씨, 고바야시 하치지로(小林八二郎)씨 같은 우수한 사람들이 많았고, 수해 등의 곤란도 있었지만 잘 극복하여 공사도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여기서 특히 인상깊은 것이 있다. 수해나 재료값 인상의 노은(勞銀) 高騰으로 카시마구미와의 단가 절충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랐지만. 이쪽은 하야시 전무 방침으로 쓸데없는 말장난 보다도 항상 벌거숭이처럼 다 털어놓고 대응했기에 그 쪽도 전부 털어놓고 대응하였다. 카시마구미를 제압한 적도 있지만, 또 와타나베씨의 끈질김에 설득당한 적도 있었다. 즉, 성의와 성의로 대하였기에 열띠기는 했으나 페어플레이였다. 거래에는 한치의 속임(暗影)도 없었다. 남의 험담을 좋아하는 자들도 [과연 아루가씨 하야시씨의 회사다. 깔끔하다. 너무 깔끔해서 우리가 보노라면 전부 바보처럼 보인다]고 칭찬인지 욕인지 그런 소리를 주변에서 자주 들었었다.」(205-206쪽)

화천댐 건설에 직접 관여 경영을 한 가나다니의 증언 속에는 당시의 카시마구미가 이 댐건설 수주를 받은 것 중에서 대규모 공사에 해당되는 것과, 수해나 재료값 인상 등의 가격 절충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노동력이었던 인부들에 대해서는 일체 기록하고 있지 않다. 조금 더 가나다니의 기록을 소개해 두기로 하자.

「(전략) 일화사변(중일전쟁)의 확대와 더불어 자재는 궁핍하고 물가는 오르기만 하여서 건설비도 처음 예정의 6천만엔으로는 도저히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건설기간 중의 금리등을 더하면 약1억엔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아루가 사장은 고주파 중공업 사장이 본임무라서 도쿄에 상주하고 있었다. 나는 그 조사서를 지참하여 상경하였고, 조심 조심히 아루가씨께 설명을 드렸더니 아루가씨는 『그건 이야기가 다르다. 식산은행으로서도 그런 거액의 자금은 조달 못해. 식은에는 진정 미안하게 되는거다. 게다가 1킬로와트에 1전 될까 말까한 전력 원가도 2배 3배가 되잖아. 주주 회사인 고주파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비싼 전력은 사용을 못해. 얼른 돌아가서 하야시 전무에게 전하여 식은과도 상담하는 한편, 혼마 기사장에게 저수량을 증가시켜서 출력을 늘이는 방법을 연구하라 해 주게…나는 지금 고주파 만으로도 많은 일들이 겹쳐 있으니(多事多端)한강수전까지 세세히 배려할 수는 없네』라며 그때만큼은 엄한 어조로 야단을 맞았지요. 아루가씨에게 야단맞은 것은 이 때 한 번 뿐이었지요. 」

상기 내용으로 보면 초기 건설 예정이었던 건설비용 6000만엔에 건설기간 중에 파생되는 금리도 만만치 않은 탓에 1억엔이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 발생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1937년의 중일전쟁 중의 자재 확보가 어렵다는 말과 건설 관계의 물질적 비용만이 정산된 듯 보일 뿐, 화천이나 청평에 투입된 노동력에 대한 상세함은 나와 있지 않다. 별도 노동자들의 명부 및 당시의 사고 등에 대한 기록의 유무를 확인할 필요와 더불어 당시의 언론 등의 반응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