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 Issue] 꽁무니 뺀 ‘사람’ 서점가에서 줄행랑
[문학계 Issue] 꽁무니 뺀 ‘사람’ 서점가에서 줄행랑
  • 정동용 객원기자
  • 승인 2013.05.3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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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인협회 “근대인물 시집 <사람> 전량 회수”

한국시인협회(회장 신달자)가 야심찬(?) 계획을 세워 펴낸 근대인물시집 <사람>(민음사)이 서점가에서 꽁무니를 뺀 채 줄행랑을 쳤다. 아직 평가가 매듭지어지지 않은 인물들을 지나치게 추켜세운 이 시집이 나오자마자 일간문예뉴스 <문학in>을 비롯한 여러 언론은 물론 수많은 문인들과 누리꾼들이 거칠게 꼬집거나 비아냥거린 데 이어 한국시협 소속 젊은 시인들까지 뿔이 단단히 났기 때문이다.

한국시인협회 “근대인물 시집 <사람> 전량 회수”

일간문예뉴스 <문학in>이 지난 15일(수) “이게 시란다, 글 좀 끼적이면 시인인가”에 이어 22일(수) “한국시협 젊은 시인들, 신달자 회장과 집행부 대국민 사과 요구”란 제목으로 보도한 근대인물시집 <사람>(민음사)을 앞으로 서점가에서는 볼 수 없게 됐다.

한국시인협회(회장 신달자)는 협회 소속 젊은 시인 55명이 ‘한국시인협회를 생각하는 시인들’이라는 이름으로 시집 전량 회수와 집행부 사과를 요구하는 서신을 발표하자 23일 긴급 회장단 회의 등을 거쳐 서점가에 깔려 있는 근대인물시집 <사람>을 몽땅 다 거둬들이기로 매듭지었다.

시협은 홈페이지에 실린 ‘한국시인협회를 생각하는 시인들의 질문에 답합니다’라는 답신에서 “단행본 <사람>은 56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학단체 한국시인협회가 그간 쌓은 역량을 바탕으로 근대사의 주요 인물들이 남긴 빛과 그늘을 문학의 눈으로 살펴보겠다는 취지에서 준비했다”며 “그러나 기획취지가 충실히 반영되지 못한 작품들이 일부 수록되었고 누락된 인물도 있는 등 시인협회를 사랑하는 시인들과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걱정과 심려를 끼쳐드렸다”고 적었다.

신달자 회장은 “(시집과)관련하여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여러분들의 충정 어린 마음을 온전히 받아 시집 <사람>을 전량 회수할 것이며, 아울러 30일로 예정돼 있던 출판기념회를 비롯한 모든 행사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출판기념회에는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17편을 낭송할 예정이었다. 시 낭송에는 문제가 된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시를 쓴 시인들과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아들 정몽준 의원도 들어 있었다.

민음사 관계자는 이에 대해 “시집 제작 과정에서 문제가 된 일부 시들에 대해 시협에 우려를 표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시협 의견에 따라 그대로 출간했다”며 “이 부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 시집 회수를 결정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민음사는 초판 1,000부를 찍어 300부는 홍보용으로 보냈고, 나머지 700부를 서점에 깔았다.

이날 시집 <사람>을 서점가에서 깡그리 거둬들인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알라딘 등 인터넷서점에는 이 시집에 ‘절판’ 안내가 표시됐고, 오프라인 서점에 깔린 시집도 모두 반품됐다.

 

다음은 ‘한국시인협회를 생각하는 시인들’이 “다시 ‘시인’으로 돌아가자-한국시인협회 회장 및 집행부께 드리는 글”과 한국시인협회가 홈피에 올린 답신글 모두다. 
 

다시 ‘시인’으로 돌아가자
한국시인협회 회장 및 집행부께 드리는 글

한국시인협회(이하 ‘시협’)는 1957년 창립 이래 한결같이 정치적인 중립성을 지켜왔습니다. 그것은 시라는 첨단의 예술 양식에 대한 도덕적 염결주의를 바탕에 둔 것이었습니다. 시인들만으로 구성된 순수 비영리단체로서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순수함을 지켜온 것이 한국시인협회 회원들의 가장 큰 자긍심이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 시협이 발행 주체가 되어 민음사에서 출간된 단행본 『사람―시로 읽는 한국 근대 인물사』는 그동안 시협을 소중히 지켜온 회원들의 자긍심에 큰 상처를 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상기한 책의 내용은 시협 전체 회원들의 공의와는 현격한 이반을 보이는 것으로 우리는 ‘시인’이라는 이름에 수치심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수록 작품 중 이승만, 박정희 등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들의 삶과 행적을 편향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과오를 언급하지 않은 점, 전직 대통령 호감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제외한 점 등은 객관성과 중립성을 포기한 처사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는 인물들과 재벌 총수들에 대해 찬양 일색인 작품을 게재한 점 역시 우리는 동의도 수긍도 할 수 없습니다. 재벌 총수들을 찬양하고, 그 기업에서 협찬을 받아 책을 출간한다는 수치스러운 발상은 누구에게서 나온 것입니까? 세속적 허명을 위해 시의 영혼을 팔아버리는 이 참혹한 양태를 시인의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습니다. 시대정신을 지키며, 묵묵히 자신만의 언어를 뼈를 깎듯 벼려온 시인들의 순정함이 이번 일로 훼절의 의심을 받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이것은 시대의 양식을 미학적 통찰과 직관으로 묘파해온 한국 시의 당당한 윤리적 전통의 후퇴이며 부정입니다.

시가 시인 개인의 의식과 역사관을 수용하는 창작물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당대적 윤리에 관한 책임과 의무라는 미학적 전제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시협 이름으로 간행되는 출판물은 회원 전체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고 사회적 수용의 당위와 가치를 고려하면서 보다 신중하고 섬세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상기한 책의 출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독자는 시협을 우익 예술단체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보수 언론마저도 여러 차례 관련 기사를 내보내며 정치적 편향성을 지적했습니다. 시협의 청탁을 받고 순수한 마음으로 인물시를 게재한 무고한 시인들까지 함께 손가락질 받는 현실을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명예를 훼손당한 시인들의 상한 마음은 누가 달래줄 것입니까?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못하는 협회의 관행이 계속된다면 결국 우리 시협은 낡고 무기력한 예술단체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많은 회원 사이에 팽배해 있습니다.

이제 다시 ‘시’와 ‘시인’의 역할에 대한 본질적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시점입니다. 우리는 생살을 찢는 심정으로 아래의 요구사항을 신달자 회장을 비롯한 현 한국시인협회 집행부에 전달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요구사항>

1. 『사람―시로 읽는 한국 근대 인물사』의 인물 선정 기준을 밝히고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온 집행부는 사과하라.

2. 문제가 된 도서 『사람―시로 읽는 한국 근대 인물사』의 배포를 중지하고 전량 회수하라.

만약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우리는 한국시인협회의 자긍심과 시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단계적이고 구체적인 자구 조치를 취할 것임을 밝힙니다.

2013년 5월 22일
<한국시인협회를 생각하는 시인들> 일동-가나다 순
강신애 고 영 고영민 고찬규 권현형 길상호 김나영 김 산 김수목 김승기 김요일 김영찬 김완수 김의수 나금숙 문정영 맹문재 박서영 박완호 박정대 박지웅 박진성 박해람 박후기 백인덕 서수찬 서안나 손택수 안차애 윤진화 이가을 이덕규 이은봉 이재훈 이진우 이창수 이철경 이현채 임희숙 장인수 전기철 전영관 전윤호 전형철 조동범 조현석 채풍묵 최종천 최창균 하정임 한미영 한우진 함민복 황강록 황정산

 

한국시인협회를 생각하는 시인들의 질문에 답합니다

한국시인협회가 최근에 펴낸 단행본 『사람―시로 읽는 한국 근대 인물사』에 대하여 ‘한국 시인협회를 생각하는 시인들’이 주신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신 드립니다.

단행본 『사람―시로 읽는 한국 근대 인물사』는 56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학단체 한국시인협회가 그간 쌓은 역량을 바탕으로 근대사의 주요 인물들이 남긴 빛과 그늘을 문학의 눈으로 살펴보겠다는 취지에서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기획취지가 충실히 반영되지 못한 작품들이 일부 수록되었고 누락된 인물도 있는 등, 시인협회를 사랑하는 시인들과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걱정과 심려를 끼쳤습니다.

관련하여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여러분들의 충정 어린 마음을 온전히 받아 시집 『사람―시로 읽는 한국 근대 인물사』를 전량 회수할 것입니다. 아울러 시집을 회수하기로 함에 따라 출판기념회(5월30일)를 비롯한 모든 행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일과 관련하여 한국시인협회를 걱정하고 애정 어린 마음을 보여주신 분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든든하게 생각하고 한국시인협회의 미래 또한 밝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한국시인협회 회원들과 시인협회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중지를 모아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2013. 5.23.
한국시인협회 회장 신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