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콘텐츠 체험 여행(15) - 중요무형문화재 조영숙의 「광대 팔순전」을 보고
나의 문화콘텐츠 체험 여행(15) - 중요무형문화재 조영숙의 「광대 팔순전」을 보고
  • 서연호 고려대명예교수/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13.06.2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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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연호 고려대명예교수/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사장
지난 6월 5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조영숙 선생의 「광대 팔순전」이 공연되었다. 이보다 조금 앞서 선생의 자서전 『끄지 않은 불씨』의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흔히 볼 수 있는 제자들의 팔순 기념공연이 아니라, 팔순전(八旬傳)이라는 명칭으로 선생 자신이 무대에 나와서 끝까지 공연을 주도해 간 것이 돋보였다. 당신이 평생 해 왔던 작품들을 갈라 공연식으로 엮어내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전(傳)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서막에 해당하는 <광대의 독백>을 통해, 1950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원산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한 선생이, 여성국극시대의 실력 있는 배우로, 오늘날의 발탈 인간문화재로서 활동하게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진솔하게 털어 놓았다.

선생을 모르고 지냈던 관객은 물론, 평소의 지인들에게도 가슴이 섬뜩하고 뭉클한, 그간의 고뇌와 갈등과 극복의 성공신화를 느끼게 했다. 외로운 어머니의 딸로서, 소외된 아들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험난한 연예계의 배우(광대)로서 선생이 쌓은 훌륭한 인생의 기록은 누구에게나 칭송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발탈> 공연에서는 김광희(탈조종)와 선생의 재담과 창이 흥겨운 판을 만들었다. 재치에 넘치는 재담을 통해서 <발탈>이 재담극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해 주었다. 중간에 부른 선생의 호방한 판소리를 듣고, 관객들은 팔순의 나이를 의심하는 빛이 역력했다. 송영탁(각설이)과 한용섭(줄타기)의 특별 출연은 판의 즐거움을 한층 북돋았다. 이어서 <서울로 가는 방자>의 대목을 창극으로 공연했다. 선생(방자)이 일생 동안 전문으로 한 역할인데다 이옥천(어사)의 연기와 소리가 조화되어 오래간만에 전통창극의 깊이와 멋을 제공해 준 무대였다.

 <선화공주>는 1950년대 임춘앵 여성국극단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의 하나였고, 선생에게는 회심의 고전이었다. 선생(왕)을 비롯해 황지영(선화공주), 박수빈(서동), 한채담(석품), 정미란(철쇠), 장지영(진주) 등이 열연했다. 특히 국극의 명인이었던 김아부의 대본과 조상선의 작창을 그대로 재현한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대사의 서정성과 드라마 구조의 반전, 현실적인 가사를 통한 작창의 신선함이 당대 여성국극의 예술성을 조명해 주었다.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 작품을 선생의 기억으로 완전하게 복원한 성과였다.

이번 공연을 통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역강한 선생의 잠재력과 강인한 의지는 유감없이 드러났다. 과연 우리의 큰광대임을 감지케 했다. 제자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직접 무대에 나서서 총감독까지 맡은 이유를 충분히 알 만했다. 선생이 오래도록 무대를 지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또한 발탈의 재담이 선생을 통해 제대로 계승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조금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자서전 『끄지 않은 불씨』에서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의 관객들은 무대예술을 보는 안목이 높다. 모든 공연이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성국극도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스스로 발전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연출기법, 무대표현, 노래, 춤, 연기의 기량을 높여야 한다. 여기에 여성국극만의 독특한 멋을 제대로 가미한다면 얼마든지 관객의 호응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발탈 또한 장르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멋과 흥겨움을 정수로 삼아 전통 공연예술로 발전해야 한다. 현재의 취약한 전승계보와 열악한 공연 환경 등,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결코, 꺼져서는 안 될 불씨, 끌 수 없는 불씨, 되살려야 할 불씨를 마음에 다짐하면서, 자신의 발탈과 여성국극을 『끄지 않은 불씨』에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선생은 자신을 이미 꺼진 불씨, 추억의 불씨, 사라진 배우의 불씨로 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이런 새로운 의지와 개혁의 자세를 우리 젊은 예술가들이 본받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낙후된 작품 활동과 시대의지를 상실한 연예인들을 실감하며, 조영숙 선생의 자세와 충고에 새삼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