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2013 제3회 대한민국발레축제 국립발레단 ‘차이콥스키:삶과 죽음의 미스터리’
[공연리뷰] 2013 제3회 대한민국발레축제 국립발레단 ‘차이콥스키:삶과 죽음의 미스터리’
  • 송현민 음악평론가/이런저런무대연구소 소장
  • 승인 2013.07.1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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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음악을 ‘재발견’하다

▲ 송현민 음악평론가/이런저런무대연구소 소장
작곡가의 삶은 분명 그의 작품만큼 또 다른 ‘콘텐츠’가 된다. 그들은 하늘에서 잘못 떨어진 냥, 땅에서 잘못 쏟은 양, 남들과 똑같은 ‘현실’이라는 시공간을 살았지만 분명 남과 다른 삶의 노선을 택했기에, 혹은 하늘이 점찍었기에 ‘보통의 삶’을 살지 못했다. 천재, 광인 등은 그들이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아니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단번에 대변해주는 단어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그들에게 작품이란, 어차피 괴로움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뻔히 두는 자충수였다는 생각도 든다. 그 잘못 둔 점 하나에 자신의 발목이 다시금 붙잡힐 때, 또 다시 이것이 나의 삶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국립발레단의 ‘차이콥스키:삶과 죽음의 미스터리’(6월 28~3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는 무용과 몸언어로 쓴 차이콥스키(1840~1893)의 ‘전기(傳記)’이다. 작곡가 차이콥스키. 그는 분명 위인이다. 하지만 보리스 에이프만(1946~)은 그의 삶과 업적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는다. 작곡가로서의 성공보다는 이면의 어두움과 고뇌를 그려낸다. 어차피 올 죽음, 하지만 차이콥스키는 죽음으로의 여정을 삶의 목표로 정한 이 마냥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국립발레단의 ‘차이콥스키:삶과 죽음의 미스터리’ (사진제공_ 국립발레단)

무엇보다 작품에서 느껴졌던 것은 음악의 힘이었다. ‘차이콥스키’는 그가 남긴 교향곡 5번 전(全)악장, ‘성요한 크리소스톰의 전례가’, 현을 위한 세레나데 2·3악장, ‘이탈리아 카프리치오’, 그리고 교향곡 6번 ‘비창’의 4악장으로 구성되었다. 뮤지컬에 비유하면 유행했던 음악을 가져다 다시 극적 형식과 얼개로 엮은 ‘주크박스 뮤지컬’에 비유할 수 있겠다. 아무튼 ‘차이콥스키’에서 그의 음악은 단순히 무용의 반주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에이프만의 안무노트에, 실제의 공연에서는 국립무용단원들의 근육과 움직임 속에, 그리고 정치용의 지휘봉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울림 속에서 살아 움직였던 거대한 중심이었다. 

무엇보다 음악적 ‘발견’의 순간들, 아니 ‘재발견’의 순간들과 마주했던 기쁨이 제일 컸다. 보통 러시아의 작곡가를 생각하면 차이콥스키나 라흐마니노프(1873~1943)를 떠올린다. 진한 선율성과 그것이 수반하는 낭만성이 그들의 음악을 대변해주기 때문이다. 반대 축에는 쇼스타코비치(1906~1975)나 프로코피예프(1891~1953)가 있다. 그들의 음악은 차이콥스키나 라흐마니노프에 비해 불협화음의 농도가 더 짙고, 선율성의 색채는 옅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의 매력은 누구나 떠올리는 그의 선율성과 낭만성을 잠시 감추고 음악 이면에 있는 또 다른 매력과 마주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마치 에이프만의 안무가 차이콥스키의 전반적인 생애보다 고통과 좌절로 채워진 내면에 많은 비중을 할애한 것처럼. 그래서 ‘차이콥스키’는 무용수들의 점프 동작이나 스펙터클한 육체적 연출을 바탕으로 음악을 ‘새롭게’ 듣게 만들고,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있는 악기들의 음향을 새롭게 인식하게 했다. 무용이 음악을 반주했다고나 할까. 특히 교향곡 5번의 전(全)악장으로 채워진 1부. 음악이 새롭게 들리기까지는 분명 차이콥스키역을 맡은 이영철(수석무용수)과 그의 얼터에고인 ‘차이콥스키 내면’역의 정영재(수석무용수)의 연기력과 표현력의 공력이 컸다. 남성무용수 특유의 굵은 선과 몸이 일구는 강렬한 드로잉은 플레인 콘서트에서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감상할 때 쉽게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금관파트의 포효와 포르테(f)의 숭고미, 짙은 선율성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차이콥스키의 특유의 강렬함’을 다시 보게, 아니 다시 듣게 했던 것이다. 그만큼 작품 자체는 물론, 즉 음악적 묘미가 춤의 언어로 인해 다시 들리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작품을 보는 동안, 음악을 듣는 동안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가 떠오르기도 했다. 차이콥스키의 또 다른 대표작 ‘백조의 호수’를 떠올릴 때, 많은 이들은 백조의 여린 움직임과 그것을 대변해주는 하프와 플루트의 섬세한 선율과 아르페지오를 연상하고는 한다. 하지만 음악의 메인은 강한 사운드를 내던지는 트롬본의 포효에 있다. 백조를 근육질의 남성으로 바꾼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또한 이런 음악적 상상력에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최근 국립발레단이 보여주는 ’국립발레단 효과’는 점점 파장이 커지고 있다. 공연 전, 작품과 출연진은 무용계 외에 다양한 층위의 대중의 입에도 오르고 있다. 이런 그들의 ‘효과’에 힙 입어 향후 한국의 작곡가와 음악을 바탕으로 ‘차이콥스키’ 같은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음악가를 음악의 힘만으로 ‘재발견’하고 ‘발굴’할 수 없는 시대에 국립발레단과 ‘차이콥스키’가 좋은 선례를 보여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