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평우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무뇌충
[황평우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무뇌충
  •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 승인 2013.07.1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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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70년대 후반 방학때마다 정독도서관에 자리를 잡기위해 새벽에 집을 나가야 했다. 이른 새벽에 자리를 잡기위해 종로에서 내려 조계사 앞과 풍문여고와 덕성여고를 거쳐가는 감고당길을 통해 정독 도서관에 도착했었다. 청년시절과 직장생활, 문화활동으로 자주 이 길을 다니지만 변해도 너무 변해 버렸다. 그 동안 감로당길과 화동길을 다닌 사람에게는 추억과 기억으로 가슴이 시리겠지만, 상업적으로 변해버린 현재의 모습에는 실망이 클 것이다.

지금의 정독도서관은 조선시대 화초와 과물 등의 관리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장원서(掌苑署)라는 관청이 있었는데, 지금으로 보면 국립임업연구원에 해당될 것이다. 화동(花洞)의 유래도 화초에서 유래했다. 우리가 잘 아는 단원 김홍도가 1773년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종6품)로 임명되었고, 이후 사포서(司圃署-궁궐의 밭과 채소경영을 관장하던 관청) 별제로 전보되었는데 스승인 강세황과도 함께 근무했다. 이 시절 화초와 과실, 야채 등을 관찰한 김홍도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장원서는 기능을 다했고, 이 넓은 땅은 조선말 명문 거족(名門巨族)들에게 넘어갔다. 그 중에 젊은 개화파들이 모여 살며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려 했던 곳도 바로 이 곳 북촌일대이다. 이른바 ‘3일천하’의 주역 가운데 영의정의 아들 홍영식은 화동 고갯길을 내려가면 있었던 옛 창덕여고(현 헌법재판소), 평안감사의 아들 서광범은 덕성여고와 풍문여고 사이, 철종의 사위 박영효는 인사동 경인미술관, 판서의 조카 서재필과 세도가 안동 김씨 가문의 김옥균은 장원서(경기고, 정독도서관)터 등 모두 이 동네에 함께 살았다. 이들이 정변에 실패한 뒤 외국으로 망명하자 조선정부는 화동의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을 몰수한 뒤 관립중학교를 세운다. 이것이 오늘의 경기고등학교다. 김옥균의 집은 현재 정독도서관 안 서울교육사료관 뒤쪽에 있었으며, 서재필의 집은 교육사료관 부근에 있었다. 정독도서관과 운동장 자리는 민족 반역자인 박제순의 집 터였다.

경기고는 1899년 개교해서 1976년 2월까지 화동에 있었다.

정독도서관에서 나오면 왼쪽으로 자동차 한 대가 다닐 정도의 작은 고개가 있었다. 이 고개는 창문여고(헌법재판소)로 향하는 고갯길이다.

이 작은 고개는 1998년 전후에 2차선 지금의 도로로 확장되었다. 사람이 다니기 힘든 자동차중심의 도로가 되었다. 결국 외지 자본들이 넘쳐나더니 옛 고개의 정취를 잃어버렸고,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자동차와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겨울이면 눈길에 위험하고, 토착민들은 카페나 갤러리의 상업자본에 밀려나고 말았다. 요즘 이 고갯길 때문에 말들이 많다. 불편을 느낀 주민들은 고개 정상부를 조금 깍자고 하고, 자신의 집 공사를 할 때까지 못깍는다고 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을 모아 반대를 한다. 한 문화계 인사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개라면서 억지 주장을 하고, 이를 본 박 시장은 한 수 더 거들었다.

그렇다면 박 시장은 참여연대 시절, 고갯길이 넓혀질때 무엇을 했는가? 또 조한혜정 교수는 북촌의 한옥이 사라지고, 온갖 상업시설이 난무할 때 무엇을 했는가?

하나 더 이야기 하자. 경복궁옆의 종친부는 왕실의 족보, 초상화를 관리하며 종묘·사직 제례를 관장하던 조선의 정체성이었으며, 궁궐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다. 일제도 조선의 관청을 대부분 없앴지만 종친부만은 그냥 두었다. 다만 앞마당에 병원이 들어섰다. 군사정권은 이곳에 보안사를 두었다. 1982년 전두환은 테니스장을 만들기 위해 종친부의 핵심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을 정독도서관으로 옮겨버렸다. 문화재계에서는 종친부 복원을 위해 만방에 노력했으나, 이명박 정권은 공론화 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역사적인 장소에 마음대로 결정을 할 수 있는가?

수백 수천억을 퍼부어 과천으로 가더니, 관람객 없다고 역사적인 자리에 수천억을 또 퍼붓는가? 세계 어느 미술관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깔고 지어지는가? 현대 미술은 역사와 전통, 문화재를 깔고 위에 서야하는가? 이러한 역사적인 자리에 미술관이 오는 것은 일제가 궁궐을 훼손하고 박람회장을 만든 것이나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당시 힘없는 문화재계는 강제 이전된 종친부의 경근당과 옥첩당, 과거 종친부의 역사성을 알 수 있는 담장 중 일부만이라도 그대로 복원하겠다는 미술관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나, 이제는 그 담장마저 열린미술관을 지향하는데 방해가 된다며 온갖 억지를 부리며, 주변 상업자본자들과 종친부는 가치가 없다고 하는 일부 무지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자기 이익채우기에 바쁘다. 급기야 숯불갈비집 인테리어 담장처럼 1~1.5m의 규모로 몇군데 쌓으라고 하는데 이러한 몰역사성을 가진 자들이 미술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야만의 시절에 살고 있다.

 
* 필자 황 평 우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사적분과]
육의전박물관 관장 [www.yujm.org]
문화연대 약탈문화재 환수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