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평우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선생님, 김상현 선생님…….
[황평우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선생님, 김상현 선생님…….
  •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 승인 2013.07.2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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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고 김상현 교수님! 세상 사람들은(연합뉴스)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한국 불교사상 연구의 대가로 꼽히는 김상현 동국대 교수가 21일 오전 8시30분께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1947년 태어난 고인은 경상대, 단국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단국대와 한국교원대 교수를 거쳐 1997년부터 동국대 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올해 2월 말 정년퇴임 할 때까지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학교법인 금강학원 감사, 한국불교학회 이사, 한국사상사학회 부회장, 신라문화연구소 편집위원 등을 역임했다.

삼국유사 연구의 권위자였던 고인은 '신라 화엄사상사연구'(1991년), '신라의 사상과 문화'(1999년), '역주 삼국유사'(2003년), '고구려의 사상과 문화'(2005년), '8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상'(2011년), '화엄경문답을 둘러싼 제 문제'(2012년) 등을 펴냈다.

다양한 연구 영역을 넘나든 고인은 2000년 뇌허불교학술상, 2001년 차문화학술상, 2006년 일연학술상 등을 받았다.]

김상현 선생님께서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동국대병원으로 달려갔다. 40분정도 가는 내내 눈물만 흐른다. 온갖 기억과 생전 모습이 떠오른다. 아직 준비가 안 된 영안실 앞에 도착하니 국화를 입히기 시작했다. 멀리서 선생님의 사진만 바라본다.

어이 황 소장! 자네가 뜻을 알고나 있나? 원효스님의 생각을 말이야.

교수님, 원효 스님이 살아계셨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승려는 살아남지 못 했을 것입니다.

필자는 오래전에 김상현 교수님을 문화계의 큰 어른이자 마당발인 김종규 관장의 삼성출판박물관 아카데미에서 뵈었다. 강의 후에는 뒤풀이를 통해 못 다한 이야기를 더 나누었는데 사실 이때가 더 영양가가 있었던 같다. 사람들이 하나 둘 가고,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로 김종규 관장과 김상현 교수, 필자만 남을 때가 많았다. 당시 둘의 대화에는 돌 직구가 넘쳤다. 열정이 넘쳤던 필자는 김상현 교수님께 지지 않으려고 빠득빠득 이유를 대며 설전을 벌였었다. 김상현 교수님과 필자는 세상사와 불교계에 날리는 돌 직구로 이미 정평이 나있으나, 몇몇 타락한 불교계를 향해 날리는 필자의 돌 직구에 다소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시간을 거듭하며 만나면서, 선생님은 원효큰스님의 뜻과 삼국유사 이야기를 모자란 필자를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불합리한 상황을 향해 돌 직구를 날리는 필자에게 더 많은 격려와 응원을 해주셨다.

김상현 선생님은 필자에게 돌 직구를 날리되, 마음은 깊고 차분하게 하여 날리고, 돌 직구를 맞은 자가 상처는 안 나게 하되, 마음 깊이 아프게 하여야한다. 또한 화는 나게 하여도,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어느 날 필자에게 “널 위해 글 하나 썼다. 자 봐라! 황소장의 대 선배들이시다.” 하면서 글을 하나 주셨는데 “文化遺産의 受難과 保存”이라는 소논문 이었다. 몽고 침략 때 문화재를 지겼던 낙산사 스님들의 이야기였다.

같은 동네라 아침 출근길에 버스 정류장에 서 계시는 선생님을 자주 본다. 그 흔한 자가용을 가져보지 못했던 선생님을 보면서 고교시절 배웠던 독일의 노교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번은, 한 여름 버스를 기다리는 선생님을 보고는 필자가 차를 세워 동국대로 모셨다.

선생님은 차비는 못줄망정. 야! 황 소장, 난 버스나 지하철이 더 좋다. 나 다음부터는 안 탈란다. 얼마 지난 후 이유를 여쭈어 봤더니, 자가용은 여유가 없어서 싫으시단다.

한참이 지나 필자는 “자가용이 여유가 없다는 말을 원효큰스님의 구도에서 알게 되었다.”

김상현 선생님은 사모님의 병환을 오랫동안 간호하면서도 결코 도인처럼 가식적이지 않으셨다. 김상현 선생님과 가장 가까운 김종규 관장은 밤 10시나 11시이던지 동네에서 만만한 김상현 선생님과 필자를 포장마차로 불러내었는데, 알고 보면 김종규 관장의 깊은 뜻이었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저녁 시간에 나마 잠시 풀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두 노신사를 위해 갖은 애교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안주로 대접 했다.

필자는 김상현 선생님을 통해서 모난 돌의 직구보다, 둥글지만 단단한 공의 직구로 변해간다. 큰 선생님의 담금질 덕분이다.

어젯밤에는 선생님과 지냈던 포장마차 앞에서 한참이나 차를 세우고 지켜봤다.

오늘 아침, 폭우 속에서 주인 잃은 버스 정류장은 더 없이 황망하고 허하다.

* 필자 황 평 우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사적분과]
육의전박물관 관장 [www.yujm.org]
문화연대 약탈문화재 환수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