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디자인 개념에서 본 예술과 과학
[특별기고] 디자인 개념에서 본 예술과 과학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
  • 승인 2013.07.25 17: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판지(壯版紙) 미학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전 서울대 초대 미술관장/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장
<지난호에 이어>

고대 벽화를 연구하느라고 실크로드를 따라 돈황(敦煌)에 간적이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삭막하기 짝이 없는 고원 건조지대다. 그런데 막상 동굴 속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 오색이 선명하게 드러난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아잔타나 키질의 영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만주 집안현(集安縣)에 있는 오호분(五灰墳)을 비롯한 많은 고구려 벽화들을 둘러보았을 때는 실크로드에서 보았던 녹청색(綠靑色) 계통의 청색조(靑色調)가 줄어들고 오히려 갈색조(褐色調)의  화면이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또, 1999년 9월 초에 평양을 방문하여 강서고분(江西古墳)과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을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만주 땅에 산재(散在)한 고분벽화처럼 더한층 황갈색(黃褐色)으로 채워진 화면을 대할 수 있었다.

한국벽화의 ‘갈화현상(褐化現狀)’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단순히 산화(酸化)에 의한 탄화현상(炭化現狀)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구려인들이 차지했던 드넓은 대지, 그 땅에서 얻은 황토수간채(黃土水干彩), 여기서 만들어지는 황갈색조(黃褐色調)는 나를 외워 싼 생활공간이며 우주공간이고 생명의 근원(根源)이다.   원래 인간이 흙으로 빚어지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하느님의 섭리(攝理)에 순명(順命)하고 싶은 ‘신앙’의 색조(色調)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로부터 ‘믿음’을 ‘노랑’으로 상징했고 노란색은 중앙과 영토(領土)를, 영토는 군왕과 신망(信望)을 상징해왔다. 이것은 그 옛날의 고구려 때 얘기가 아니라 2000년대를 사는 지금의 내 얘기이기도 하다. 아무리 물질이 풍요로워져서 서구식 아파트에 산다 해도 집의 중앙에 안방이 있고 그 방바닥에는 여전히 노란 장판(壯版)이 주인의 영토(領土)처럼 믿음직스럽게 깔려 있다.  그 곳에 눕고 보면 영토를 얻은 군왕인양 안정감을 얻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런 ‘믿음’과 ‘영원’의 시공간(時空間)이 변주(變奏)된 우리 미술의 자생성(子生性)이 조형예술에 숨겨있는 한국성(韓國性)이다. 우리는 지구상에 유일하게 장판문화(壯版文化)를 만들어 현대생활 속에 조화를 이루며 이어가고 있다. 내가 과문(寡聞)한 탓인지 역사 이래 종이를 방바닥에 깔고 사는 민족이 우리 말고 또 지구상(地球上)에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오래전의 일이다. 종이작업을 해오면서 한지의 우수성에 매료(魅了)되어있던  어느 날 나는 3년 가까이 깔고 내방에 깔고 쓰던 콩댐 각장장판(角壯壯版)을 면도칼로 도려내어 화폭을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싸인 만 했다는 편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오려낸 헌 장판은 뚫어진 구멍을 때운 곳도 있고 문갑(文匣)을 놓았던 자리에 얼룩문양이 남아있을뿐더러 나에 의해 3년 동안 긁힌 흔적(痕迹)들이 조형적으로 남아있어 굳이 그림을 새로 그려 넣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 작품을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열리는 국제 아트페어(FIAC`90)개인전에 출품했다.  그 당시는 한국작가로서 유일하게 내가 참가했고 세계적인 현대미술의 거장, 세자르, 볼프보스텔, 안제름키퍼 등도 이 행사에 함께 참여하여 자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시작품 중에 가장 그들의 호기심(好奇心)을 촉발(促發)시킨 작품은 뜻밖에도 장판화(壯版畵)였다. 그 중에서도 나와 불과 20여m 거리에 부츠가 있었던 보스텔이 통역을 대동하고 여러 차례 내 전시장에 건너와 장판화의 재료기법에 관한 많은 질문을 했고 나는 아주 정직하고 성실하게 답변해 주었다. 질문과 답변을 요약해보면,

‘재질이 바이널(비닐)인가?’. /  ‘아니다. 한국의 전통 장지다’
‘세워 놓고 그렸나, 눕혀 놓고 그렸나?’  /  ‘당연히 눕혀 놓고 그렸다’
‘무슨 물감을 썼기에 이런 깊은 맛이 나는가?’/‘치자에서 얻은 자연채색이다.’
‘어떤 미디엄(용매제)을 사용했는가?’  /  ‘물에 불린 콩, 그리고 들기름이다’
‘무었을 사용해서 그렸는가?’  /  ‘나의 온 몸으로 그린 보디페인팅이다’
‘너무 어렵다. 제작기간은 얼마나 걸렸나?’  /  ‘28개월 남짓 걸렸다’
‘놀라운 일이다’  /  ‘한 가지 빠진 기법이 있다’
‘무었인가?’  /  ‘제작기간 3년 동안 내내 작품 밑에서 열을 가해야한다’
‘난 기권 하겠다’  /  ‘뿐만 아니라 매일 쓸고 걸레질을 해야 발색이 좋다.’
‘더 묻지 않겠다. 작품가격이 매우 비쌀 것 같다’  /  ‘물론이다’
‘................................’  /  ‘그러나 한국은 집집마다 1점 이상씩 수장하고 있다’
‘...............................??????’

그는 두 손을 내 저으며 질린 듯 자기 브츠로 달려갔다. 세계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프럭서스 운동이 한창일 때, 주요 멤버들로서 후에 백남준이 이에 합세하여 많은 영향을 받는다. 백남준과 함께 독일국적으로 그들 장본인들이  그링팔레 전시장에 모두 모인 행사였다. 

어찌 보면 동문서답(東問西答)하는 것도 같고, 선문답(禪問答)하는 것도 같지만 내용을 알고 보면 서로가 성실(誠實)하고 진솔(眞率)한 대화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동서간(東西間)의 문화의식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 대화 내용 이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런 의식의 편차(偏差)가 소통에 장애요인(障碍要因)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창조적인 잠재력(潛在力)으로 작용 될 때는 초유기체적(超有機體的) 접변성(接變性)에서 오는 고부가가치(高附加價値)창출의 문화경쟁력(文化競爭力)이 될 수도 있음을 체득(體得)한 기회였다.

하여간(何如間), 국내에서는 타다 남은 연탄 재 만큼이나 흔하고 처치 곤란했던 헌 장판(壯版) 한 장이  유명한 파리 국제미술견본시장(國際美術見本市場)인 FIAC에서 뜻 밖에 호응(呼應)을 얻어 적잖은 외화(外貨)를 벌어드렸으니 '구들' 문화와 '장판(壯版)' 문화를 만들어 물려주신 조상님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그 일이 있고 나서야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노란색 장판을 깔고 살아 온 우리가 황금의 양탄자를 깔고 사는 중동의 왕족들보다 더 부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라건대, 2000년대는 고부가의 문화 수출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문화재(文化財)'는 팔수록 가난해지지만 '문화(文化)'는 팔수록 부자가 된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문화적인 줏대와 자문화에 대한 자긍심(自矜心)을 지녀야 하며, 국제적 안목(眼目)의 창의력(創意力)을 개발하고, 타학문과 전공간(專攻間)에 소통(疏通)을 통한 이해와 조화(調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문화는 핵무기(核武器)보다 무서운 힘이며 국력이 되기 때문에 국적 있는 창의력만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쟁취할 수 있고 국수주의(國粹主義) 지역성에 함몰(陷沒) 되지 않으면서 어설픈 한류열풍(韓流熱風)에 경도(傾倒)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예술은 과학적 사고와 실험정신에 기반(基盤)하고 과학은 예술적 상상력과 창의성을 구비(具備)하여 소통과 조화를 이루어 내야 할 것이다. 예술과 과학, 과학과 예술은 영원히 답이 없는 미완(未完)의 아름다움과 미지(未知)의 꿈을 향해 쉼 없는 도전(挑戰)과 실험(實驗)의 연장선상에서 만난다. 이것은 영혼과 육신의 조화이며 정신과 물질의 합일이고 이상과 현실의 통섭(統攝)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