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 칼럼] 7월 27일 되새겨보는 남북 휴전협정 60주년, DMZ과 지역 주민들-②
[이수경 칼럼] 7월 27일 되새겨보는 남북 휴전협정 60주년, DMZ과 지역 주민들-②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 승인 2013.07.2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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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친구랑 새벽에 헤어진 뒤, 풀지도 못한 짐을 그대로 챙겨서는 용산역행 택시를 탔다. 필자가 컬럼 등에서 소개했던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 조선식산은행 총재)가 경춘선을 만들었을 때는 자그마한 역이었을텐데 지금은 큰 규모의 역이 되어 있었다.

경춘선 티켓 구입을 도와주던 역원이 내게 외부에서 왔냐고 묻는다. 왜냐고 물으니 서울 사람은 바쁘게 다니기 때문에 아침에 손님처럼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란다. 필자의 도쿄 생활이 초인적인 만큼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싶어서 여행객처럼 느긋이 움직였더니 그렇게 보인 모양이다.

그 분의 설명을 들으니 경춘선 itx는 2012년에 개통된 고속철도라고 한다. 6900원 정도로 춘천을 갈 수 있으니 비교적 저렴한 여행 수단이다. 첫 경춘선 여행을 수면부족의 몽롱한 상태로 즐기자니 앞과 옆자리에 탄 여성 나들이객들이 필자에게 갑자기 가래떡 하나를 건네주며 같이 먹자고 한다. 익숙되지 않은 상황에 당황했지만 모두 긴 가래떡과 과일 등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음식들과 땅 투기 이야기, 남편 이야기 등을 하며 깔깔 웃는다. 예상 못한 환영이었지만, 춘천에 자주 놀러간다며 밝게 웃던 그녀들의 자그마한 인정이 고맙게 느껴진 춘천행이었다.

열차 밖엔 청평댐 근처의 주변 리조트 지역이 보인다. 경춘선과 더불어 올 봄부터 조사해 왔던 아루가 미츠토요의 1938년 당시의 움직임이 적혀졌던 자료를 떠올렸다. 남춘천을 지나더니 열차는 1시간 10분 남짓에 춘천역에 도착했다. 수트케이스를 들고 역 밖으로 나가니 [화천 전투희생자 한・중・미・일 시민공동추모위원회]와 [아시아 평화시민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는 이대수 목사와 무용가로 이번 추모회에서 진혼무를 보여 준 이혜경씨, 그 날 간사를 맡은 강 선생 등이 행사 현수막을 들고 맞이해 주신다.

춘천역에서 후쿠오카대학교의 히로세 데이죠 교수와 재회를 나눈 뒤, 동북아평화연대 홍선희 대표, 그리고 화천댐의 치열한 격전과 그 상황을 처음으로 [인민일보]에 밝혔던 한중경제신문의 류재복 기자와 함께 대기했던 DMZ평화 생명동산 제공의 마이크로 버스를 타니 몇 분이 먼저 와 계셨다. 버스 속에서 기천무 전수자인 지성철 선생과 순환경제연구소의 이승무 소장 등과 함께 인사를 나눈 뒤, 화천읍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화천전투 때 육군 중위로 참전하셨던 김달육 옹(86세)과 세종시 직원 및 관악산 불성사의 서암 홍대봉 주지승(중요무형문화재로 한국 탱화 작가로도 저명)일행, 정상시 목사 등이 합류, DMZ평화생명동산의 마이크로 버스로 주변을 돌았다. 이대수 목사 및 히로세 교수를 빼고는 모두 초면이었지만 화천댐의 [추모회]와 비무장지대 시찰이라는 목적으로 모였기에 정신적으로 매우 편한 여정이었다.

점차 최전방 지역이 가까워오니 군부대가 많이 보였고, 인가가 줄어드는 대신 산하에 어우러진 눈부신 신록이 펼쳐졌다.

   
화천댐의 모습.

 일제 때 기초교량이 건설되었고, 북한이 교각을, 남한이 상판을 만들었다는 [구만대교]를 지나서 화천댐 안으로 들어가니 출입금지 제한 표시나 육군 보초용 벙크 등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입구 오른쪽 공간에는 발전소에서 사용했던 터번이 놓여져 있다. 1938년 아루가 미츠토요 등이 수도의 전력공급처로 화천댐과 청평댐을 조성할 때 터번 등의 발전소 기계 종류는 히타치 제작소가 만들었고, 그 외의 댐 건설 및 발전소 건설은 [카시마 구미]에게 발주를 했다하니 그 시대 것일까? (차를 멈춰서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곧 화천댐에 도착하여 [파로호]라 적힌 기념비와 정자 등에 올라서 화천댐 주변을 시찰하였다. 화천 수력발전소 건설 때 축조한 인공호수는 지금은 자연 속에 초연히 자리잡고 있었다.

   
꺼먹다리 위에서 본 파로호. 꺼먹다리는 상판의 부식을 막기 위해 콜타르를 칠해 검은색을 띄고 있다.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62-1번지.

Royal blue색상이 너무도 아름다운 호수와 깊은 숲이 유유히 흐르는 수면에 반사되는 곳. 그 곳에서 [파로호]의 글귀에 새겨진 의미를 되새긴 뒤, 1951년 5월에 중공군과 인민군이 화천댐 및 주변 고지 탈환을 위해 국군과 싸우다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꺼먹다리]에 내렸다. 상판의 부식을 막기 위해 콜타르를 칠하여 검은색을 띄고 있어서 꺼먹다리라고 한다는데, 등록 문화재110호로 지정된 이 곳은 구만대교 건설 후 사람 및 자전거 통행이란 제한이 되어있고, 간혹 영화 로케이션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라고 한다.

산수강산의 파노라마가 펼쳐친 넓은 강 위에서 바라보는 그 아름다운 자연이 과거에는 공동묘지 아닌 공동묘지가 되어 끔찍한 살육의 장이었다니 도저히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참전 군인이었던 김달육 옹의 증언에 의하면 여기저기에 살점 덩어리가 널려 있었고, 간혹 창자까지 튀어나온 시체들의 잔혹한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전투로 죽은 시체를 치우던 사람들은 부패 냄새에 코에 마늘을 넣고 작업을 했을 정도라고 한다. 80대 중반으로 믿기지 않는 말쑥한 외관과 차분한 목소리로 당시의  참혹함을 회술하고 계셨으나, 오랫동안 지녀왔던 트라우마를 인내하며 증언을 하시던 비장한 모습이 가슴 아프도록 느껴졌다.

화천 전투에서 사망한 중공군 인민군이 일설로는 3만여명이라고 하니, 국군측과 상대측을 합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단 말인가? 산하는 너무나도 고요하고 아름다워, 되려 역사를 삼킨 채 모르는 척 하는 그 풍광에 미움조차 일었다. 적막함 속에 울려퍼지던 비명과 살상의 광경을 상상하면서, 우리들은 그런 아비규환의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해서 안된다는 다짐에 또 다짐을 하였다.

   
화천전투 당시 육군 중위로 참전했던 김달육 옹(사진 우측).

오후 스케쥴을 위해 구만교, 대붕교를 보며 하남면에 자리한 화천군 운영의 아쿠아틱 리조트로 이동을 했다. 고즈녁한 분위기와 아름다운 산세에 어울리는 펜션들이 자리한 곳이었다. 일단 그곳에서 그 지역의 목사분들이 준비해 주신 점심을 먹었는데, 유기농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음식이라서 보약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일본서 보기 힘든 각종 나물들과 김치 종류 등의 음식은 채식주의 선호인 필자로서는 얼마나 감사하게 먹었는지 모른다.

특히 그 곳의 한주희 목사는 그 장남이 유기농 사업을 같이 하고 있었는데, 장남이 일본서 유학한 곳이 필자도 잘 아는 학교라서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자연주의로 회귀하여 귀농생활을 고집하는 분들의 결정체였던 점심 저녁 식사는 필자가 경험한 지구촌 그 어느 명문 호텔의 음식보다도 맛있는 건강식이었다. 다시금 음식을 준비해주셨던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다.

점심 식사 후, 숙소에 짐을 옮겼다. 평화의 댐 건설 때 방한을 했던 고르바쵸프 전 대통령이 묵었던 곳 건너편이 필자의 숙소였는데, 높은 천정과 탁 트인 공간, 자연미 어우러지는 시설물 등이 편하게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몇 달 쉬면서 집필에 몰입할 수 있다면…그런 생각에 젖으며 리조트 입구 앞 호수의 선상 회의실로 향했다.

한주희 목사의 사회로 화천댐 발표 세미나가 시작되자 일제 말기 때 화천댐 건설 노무자로 일하셨던 분으로 이번 기획에서 증언을 약속하셨던 이용교 옹(93세)이 10일전에 타계하셨다는 보고가 있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타계전에 이대수 목사가 증언을 녹화해 둔 영상이 있어서 당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도저히 10일 후에 돌아가실 분의 얼굴이 아니었기에 연세드신 분들의 오늘 내일은 알 수가 없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논산 출신인 이용교 옹은 1940년에 강제징용으로 화천 건설장에 배치되어 2년간 노동을 했는데, 노동자들이 많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죽으면 나무상자에 머리를 잘라 넣어서 고향으로 보냈으니 가히 그 유족들의 충격과 원한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엔 혹한으로 화천댐 건설은 불가능했기에 대신에 철원의 철로 공사 작업을 했고, 댐 건설 때 고통스러워서 아프거나 쉬면 밥도 임금도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너무 힘들어 도주하다 들키면 죽도록 구타를 당하였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임금을 받으면 빵을 사먹는데 사용했는데, 특히 심했던 것은 도리시마(일본어로 관리자 혹은 단속책임자를 도리시마리[取締]라 함) 가 혹사를 시켰다고 강조를 하였다. 필자가 조사했던 당시의 건설 노동자 담당의 카시마구미의 노동자 취급 팜프렛과는 현저히 다른 열악한 노동 실태가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