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 칼럼] 7월 27일 되새겨보는 남북 휴전협정 60주년, DMZ과 지역 주민들-③
[이수경 칼럼] 7월 27일 되새겨보는 남북 휴전협정 60주년, DMZ과 지역 주민들-③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 승인 2013.07.2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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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이용교 옹의 영상 증언 뒤, 필자의 일본 관련 문헌 연구 보고가 있었는데, 주최측이 사전에 받은 원고로 자료집을 잘 꾸며놓았기에 필자는 당시의 화천댐 건설 경위와 카시마구미 건설사의 조선인 노무자 취급문제, 한국전쟁 직후의 화천댐 완성 후의 노동조합 활동 등에 대한 자료를 소개하였고, 비무장지대의 국가생태문화 탐방로 조성과 세계적인 평화공원으로 거듭나겠다는 정부와 자치체의 최근의 동향에 대하여도 언급을 하였다.

이어서 중국 연길에서 항미원조전쟁의 참전군이었던 이태길 옹의 인터뷰가 있었다. 이 분은 동북군정대학 졸업 후 군인이 되어서 한국전쟁 때 휴전협정 담판 때 참가했던 중공측 7인단 대표 중의 한 분이었다. 언변 좋은 평화 상생론의 주장과 당시의 전쟁 참혹사에 대한 내용을 중국측에서 들은 셈이지만 좀 더 개인적인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마지막으로 꺼먹다리에서 증언을 해 주신 김달육 옹의 증언이 있었는데, 당시 국군 장교였던 김 옹에 의하면 1950년 6월 24일 토요일은 군대 봉급날로 연대의 3분의 2가 외출 외박을 했기에 군부대 내부는 군인들이 거의 없는 상태였는데, 그런 상태 속에 전쟁이 발발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 지역 부근엔 6사단 7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김옹은 전쟁 중에 별 두개의 인민군 장교와 스쳤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김일성의 경호대장이었다고 하니, 지금처럼 철책이 없이 전투를 하던 고지전의 당시 상황을 보기 위해 파견되었던 인민군과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알 수가 있는 대목이었다.

김달육 옹은 그 뒤, 백암산서 휴전을 맞고 소령으로 예편을 했는데, 전투 후유증으로 9번을 개복 수술을 하셨다고 하니 전쟁이 끝났어도 그의 삶은 지옥과 진배없었으리라.

   
'파로호 전망대'라고 적힌 기념비.

결국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응축되었던 기억의 파편을 더듬으시던 옹은 붉은 눈시울을 적시며 그가 보았던 그 지옥 속에 희생이 된 수 많은 영혼들을 추모함과 동시에, 절대, 결코 비참한 전쟁이 두 번 다시 용서되어서는 안된다며 역설하시며 보이셨던 눈물이 우리의 [미래사회로의 이정표]였기에 모두 숙연해진 순간이었다.

어린 나이로 전쟁이란 광분 상태에 내몰렸던 수 많은 희생자들이 무슨 죄가 있던가? 일부의 전쟁욕을 명분화 시킨 그 호전주의 특권층들을 단죄해야하건만 특권을 이용하여 가장 안전한 곳에서 가장 무책임한 명령을 하며 가장 풍요로운 삶을 향유하다 사라진 그들은 간데 없으니 남은 후손들의 전후 정리가 쉽지만은 않다. 이럴수록 선진국가를 위한 미래지향적인 평화의식을 공감하고, 시민들의 연대를 더더욱 돈독히 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화천댐 관련의 자료 내용 검토 및 보고 포럼을 끝내고선 우리는 4시를 지나서 안보전시관 뒷산의 전망대로 이동하여 합동위령제에 참석하였다. 파로호 격전 참가부대가 세운 듯한 [파로호]추모비에서 내려다 보이는 그 곳은 호수가 보이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넓은 공간 건너편 호수가 보이는 곳에는 [파로호 전망대]라는 기념비석이 서 있었다. 파로호를 마주하는 그 기념비석 앞에 불성사에서 가져온 막걸리나 음식들로 제단이 차려졌고, 민속풍물패 ‘광대패 모두골’의 정대호 대표의 위령제 취지 발표가 있었다. 추모시 낭독과 더불어 해금 및 대금 등으로 자아내는 구설프고 애절한 음악이 호숫가 숲속 깊숙히 흘러퍼졌다. 이어진 불교식 위령제(천도제)에는 참가목사들도 서스럼없이 종교를 초월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원혼을 푸는 의식에 참여하였다. 그런 하나가 되는 공동추모제를 보고 있노라니 우리의 슬픈 넋들도 많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혼무를 추는 이혜경 수리무용예술단장(사진 위)과 살풀이를 선보인 신애자 선생.

어려서부터 춤으로 다져왔다는 군포 수리무용단의 이혜경 대표의 춤은 세계 각지에서 각광 받아 온 다이나믹한 움직임으로 영혼들을 불러모아 그 아픔을 헤아리는 듯 한 섬세한 표현을 보였다. 진혼무를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자그마한 소리조차 그녀의 집중력을 흐트릴까봐 조용히 숨죽이며 손끝 발끝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자니 참으로 섬세하면서도 한 움직임이었다.

 이어서, 소복 차림으로 모든 억울히 죽어간 원혼들을 끌어모아 그들의 아픔을 풀어주는 살풀이를 하던 신애자 선생의 춤은 절절이 묻어나오는 민족의 비애와 넋들의 고통을 홀로이 짊어진 듯하여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이것이 한 풀이 춤인가? 필자의 삶 속에 묻어져 있던 감정도 풀어진 탓일까?? 호수의 적막함 속에 원한을 풀고 서로 어우러져 살자는 해원 상생의 의식은 40여 명의 참가자들 가슴 속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김달육 옹과 참석자 대표들의 헌향 및 헌주가 이어졌고, 그런 의식이 처음이었던 필자를 이대수 목사, 한주희 목사가 이끌어줘서 세 명이 나란히 헌향 및 절을 하였다. 참가 목사들이 불경이 퍼지는 공간 속에서 유교적 성향의 제사의식을 치루는 것도 [평화 및 상생 추구]란 목적 의식의 공감이란 의미에서 보기 좋게 느껴졌다. 한국 댐 연구의 전문가로 알려진 히로세 교수도 헌향과 절을 하면서 민족과 종교를 초월한 [해원과 평화적 상생 추구]를 확인하는 공간이 되었다.

화천군 문화원 사무국장 및 김용복 교수, 고성기 목사 등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필자(사진 가운데)와 이혜경 수리무용예술단장(사진 좌측)과 신애자 선생.

추모회 마지막 순서로 [비목]을 함께 부른 뒤, 화천이 영원히 평화스런 땅으로 거듭나기를 빌면서 가파른 귀로의 길을 내려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화천에서 이대수 목사의 취지를 이해하고 돕는 NGO단체들이 마련한 푸짐한 음식 뷔페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대수 목사의 인덕을 알 수 있는 여정이기도 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이렇게 맛깔나고 청정 건강식인 음식만 먹고 맑은 공기 속에 살 수 있다면 백년도 쉽사리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필자가 좋아하는 참외까지 후식으로 푸짐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참고로 일본에선 참외가 최근에 몇 군데서 나오긴 하지만 한국 참외 맛이 아닌데다, 근래까지 일본엔 참외가 없었던 터라 지난 4반세기 동안 필자가 가장 굶주렸던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저녁이 되자 도시에서 귀농한 지역 사람들도 모여서 교류를 하였으나 필자는 체력적 한계와 미열로 일찍 쉴 수 밖에 없었다. 위령제를 마친 호숫가의 교류는 새벽까지 계속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