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김구림 화백] “진짜가 나타났다!” 쇠퇴 없는 실험정신, 老 화백의 부활
[인터뷰 - 김구림 화백] “진짜가 나타났다!” 쇠퇴 없는 실험정신, 老 화백의 부활
  • 윤다함 기자
  • 승인 2013.08.15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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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展… 시대 뛰어넘은 작업세계, 시립미술관의 대대적 조명 받아

우리가 몰라도 너무 몰랐던 김구림 화백의 초대개인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미술 1세대 전위 예술가이자 오늘날까지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구림 화백. ‘국내 전위예술의 선구자’, ‘이 시대의 영원한 아방가르드’로 불리는 김 화백은 이번 전시명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통해 지난 반세기 동안 미술사에서 심도 있게 조망 받지 못한 한국 실험미술에 대한 해학과 풍자의 메시지를 담았다.

김 화백은 지금껏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저 ‘아웃사이더’라고만 부르기엔 노老 화백의 열정과 아이디어는 젊은 작가들의 그것보다 신선하고 참신하다. 그가 이미 40여 년 전에 내놨던 작품이 당시에는 대접도 못 받았지만 이제 와서 여기저기서 마치 자신이 원조인 듯 내놓고 사람들은 처음 본 것처럼 신기하다며 구경한다. 전위예술가 1세대이자 선구자로서, 재료와 구성에 두려움 없이 파격적인 작업을 이어온 그였다. 미친 사람 취급받아 작품은 철거당하고, 일방적으로 발길질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런 수모 속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온 그의 작품은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지금 내놔도 전혀 손색이 없다.

<나를 사가시요> 1970 이 퍼포먼스는 명동에서 당시 경찰의 제지로 실현 못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재현했다. 사진 우측 하단에 ‘원하는 사람이 3명 이상일 경우, 경매에 부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지난해 영국 런던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의 기획전 ‘A Bigger Splash : painting after performance’에 초청받아 데이비드 호크니, 쿠사마 야요이 등 세계 현대미술 작가들과 함께 전시에 참여했다. 백남준 선생 이후 우리나라 작가로는 김 화백이 최초로 테이트모던에 출품함으로써, 그의 세계적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더불어 테이트모던은 김 화백의 1969년 작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를 소장하기로 했으며, 현재 작품 인계와 서류상의 과정만 남은 상태이다.

인맥과 학맥을 무시할 수 없는 국내 미술계에서 주요 미대 출신이 아니었던 김 화백은 늘 서러웠다. 미국과 유럽, 일본 화단은 동양에도 전위예술가가 탄생했다며 그의 출현에 설렜지만, 그럴수록 국내에서는 일부러 더 짓밟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타국에서 먼저 인정받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국내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김 화백은 자신은 언제라도 짓밟힐 수 있고, 이리저리 치일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고 회고한다. 경북지역의 미술대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오로지 독학으로 시대를 앞서간 천재는 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다.

프랑스를 거쳐 미국 뉴욕에서 오랜 기간 활동하다가 2000년 귀국해 문예진흥원(현 아르코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지며 화려하게 귀향하는 듯 했으나, 역시 반짝 주목 이후 그는 다시 설 자리를 잃었다. 메이저 화랑은 둘째 치고, 2류 화랑에서도 그에게 접촉하지 않았다. 수 십 년 전 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 없는 현실과 천대에도 김 화백은 묵묵히 작업에만 임했다.

<공간구조 69> 1969 (Refabricated 2013) air, water, oil, vinyl and electricity 4420x1460x850mm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아트로 기록된다. 해외 전시에서 분실됐으나 남아있는 드로잉을 바탕으로 다시 재현했다. 당시에는 비닐로 제작됐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아크릴로 새롭게 제작됐다.

올해 초,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김 화백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개인초대전에 응해줄 것을 부탁했다. 전위예술에 조예가 깊은 김홍희 관장은 김 화백의 작품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다른데도 아닌 시립미술관에서의 개인전 제안에 김 화백은 깜짝 놀랐다고. 서울시립미술관 개관이래 기증전 등 다양한 형태로 개인초대전이 있어왔지만, 이번 전시처럼 한 개인을 이렇게 집중적으로, 학술적으로 조명한 것은 최초라고 김 관장이 밝히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 화백의 1960~70년대 실험 작품들을 위주로 선보인다. 발표 후 유실된 작품들과 에스키스로만 존재하고 기술적인 혹은 현실 제약적인 문제로 실현되지 못한 작품들이 비로소 제작돼 세상에 공개되는 자리이다.

특히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는 1969년에 제작돼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최초 공개 상영된 후 원본이 유실됐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16mm필름으로 복원해 상영된다. 한 청년을 주연으로 내세워 당시 취직난 등 어려운 시대상을 표현했으며, 당시 주요 사건 및 사회상을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국내 최초의 실험영화이다.

<현상에서 흔적으로> 1970 (Refabricated 2013) ice and red cloth 거대한 얼음 위에 붉은 천을 씌운 뒤, 얼음이 녹아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1970년 당시 가로·세로 3m, 무게는 40t에 달하는 막중한 크기로 작품을 설치하려고 했으나, 미술관 측에서 "이게 무슨 작품이냐"며 철거당하는 비운의 문제작이었다. 현재 이번 전시에는 이미 얼음은 다 녹고 빨간 보자기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밖에도 1970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초대됐으나 주최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철거당했던 거대 얼음설치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도 전시 개막 당시(7월 중순)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현재(8월 중순)는 얼음이 모두 녹아 얼음을 덮고 있던 빨간 천만 바닥에 남아있는 상태이다. 기존 설계보다 축소돼 제작됐음에도 전시 개막 후 꼬박 나흘이 걸려 모두 녹았다. 본래대로라면 보름 정도는 유지됐을 거라고. 40여 년 전에도 어려웠지만, 지금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막중한 크기 탓에 바깥에 설치하려고 하니 더운 날씨 때문에 빨리 녹을 것 같았고, 실내에 전시하려고 하니 크기와 무게에 제약이 생겼다. 그래서 크기는 축소하고, 얼음 가운데는 파내 무게를 줄여 설치할 수 있었다. 그의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라도 실현한 것에 “감개무량”이라며 흐뭇하다고 했다.

또한 1968년 발표됐으나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한국작가11인전’을 마지막으로 분실된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아트 <공간구조69>는 남아있던 드로잉으로 다시 재현했다. 당시에는 비닐로 제작됐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아크릴로 새롭게 제작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김 화백은 정규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독자적인 창작의 길을 개척했다. 그가 독학을 택하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경북 지역 소재의 미술대학을 한, 두 학기 다니다가 학교의 그 누구도 자신의 물음에 답해줄 이가 없단 걸 깨닫고 학교를 그만 뒀다. 거기에 계속 남아있다가는 미술교사에 그칠 것 같았단다. 스무 살 청년은 그때부터 세계적인 일류 작가를 꿈꾸고 있었다. 학교를 벗어나 유명 작가들에게 조언을 구해봤지만 오히려 그들은 어린 청년을 조롱했다. “나보고 장사나 하라고 합디다. 속으로 ‘두고 보자’, 그들을 뛰어넘는 작가가 되겠다고 다짐했죠.”

그러던 중, 그는 헌책방에서 당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미제 잡지를 우연히 보게 됐다. 화가라고 하면 캔버스에 풍경을 그리는 게 다 인줄 알았던 시절, 바닥에 흩뿌린 페인트만으로도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에 김 화백은 충격에 휩싸였다. 버려진 한 잡지가 그에겐 생각의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예술이란 기술이 아니었어요. 사상과 철학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하는 거였죠.” 그때부터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무용, 영화, 연극 등 공연예술까지 섭렵하기에 이른다. 미술을 넘어선 예술 전반을 근간으로 그의 전위적인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다. 이미 반세기 전, ‘최초’란 타이틀을 달고 탄생한 수많은 작업들은 그만의 선구자적 혜안으로, 장르 간 경계가 모호해진 오늘날의 예술을 미리 끌어다 놓은 것 같다. 당시 실험영화, 메일아트, 바디페인팅, 전위연극 등 워낙에 ‘듣도 보도 못한’ 작품을 연이어 선보이자, 김 화백은 간첩이라고 의심받기도, 기이한 퍼포먼스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오브제작품이나 입체작품, 퍼포먼스에만 전념한 건 아니다.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그림도 그렸지만, 그가 강조하듯이 ‘예술은 기술이 아니’기에 작품의 중심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그가 최초로 판화공방을 설립하고, 선구적인 판화기법을 선보이는 등 현대 판화의 정립에 힘쓴 인물이란 건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뉴욕에서 공부할 당시, 아트 스튜던트 리그 측에서 판화클래스 교수 공석에 수강자인 김 화백을 추천하는 이례적인 일도 있었지만, 영어 실력이 부족해 채용되진 못했다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귀국 후, 홍대에서 판화 강의를 하며, 학생들의 판화에 대한 무지함을 개탄해 3년간 집필한 ‘판화콜렉션’을 내놓는 등 일반인들도 판화를 제대로 즐기고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판화작업 도구들 등 판화 관련 아카이브를 볼 수 있다.

지난해 김 화백이 ‘작품 도난 사건’으로 공중파 뉴스에 등장했다. 경기도 장흥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20여 점이 넘는 작품들을 도둑맞았다. 감정가가 10억 원에 이르렀지만, 김 화백은 도둑 잡는 걸 포기했다. 경찰이 작업실을 출입한 사람들의 명단을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작품은 세상 어딘가에 있을 수 있겠지만, 사람을 잃을 순 없었다고 한다. 왜 하필 인기 없는 자신의 작품을 훔쳐갔나 곰곰이 생각해봤단다. 더군다나 국내에서는 팔지도 못하고, 돈도 안 되는데 말이다. “내가 유럽에서 인기가 많다는 것을 아는 이가 한 짓일 거예요. 우리나라에선 들통 나고 팔리지도 않을 거니, 아마 유럽으로 가져가서 팔 생각으로 훔쳐간 것 같습니다.” 비록 도둑맞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작품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괜찮다고 말하는 대가大家이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새롭다.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청년 때와 같다. 그렇듯 늘 영감이 가득하지만 모두 작품으로 옮기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도시락을 싸들고 화실로 가 하루 종일 작업에 열중할 만큼 에너지가 샘솟는 김 화백이 작품 실현에 애를 먹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돈 때문이다. 넘쳐나는 아이디어가 작품으로 탄생되기까지 작업 특성상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돈 때문에 결국은 드로잉에만 그쳐야 하는 상황이 너무도 아쉽다고 토로한다. “큰 TV 화면을 깨고 해골을 넣거나, 눈에서 불꽃이 튀기게 한다거나, 아주 거대한 작품을 한다거나.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려면 거기에 맞는 부품, 기계를 구해야 하고, 기술자도 필요하고…. 결국은 모두 다 돈이에요. 대중에게 인기 없는 작가라는 것은 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다는 말과 같죠. 돈 때문에 늘 허덕이면서도 작업은 포기 못해요. 작품으로 생계유지가 안 되니 이 학교, 저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고, 아카데미에서 강사하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내 작품 내가 안 가져도 되니, 스폰서라도 생겨 그저 돈 걱정 없이 실컷 작업만 할 수 있다면 너무나 행복하겠어요.” 국내 전위예술을 선도했던 그가 돈이 없어 작품 활동을 마음껏 펼칠 수 없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이번 전시가 화단과 대중이 그의 진면모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길 바라본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에서 열리고 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시장 모습. 1960년대 작품부터 최근 신작까지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한국전위예술의 흐름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그룹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회화와 조각에만 집중돼 있던 국내 1960~70년대 미술계에 해프닝, 설치미술, 대지미술 등 장르를 넘나드는 창작활동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김 화백의 초대전은 10월 1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의 : 02-2124-8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