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나온책] 오빠! 시가 밥 먹여줘? 오빠도 알지?
[새로나온책] 오빠! 시가 밥 먹여줘? 오빠도 알지?
  • 이소리 논설위원
  • 승인 2013.08.1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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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전기철, 다섯 번째 시집 <누이의 방> 펴내

아내를 따라 백화점에 갔다가
아내가 0이 너무 많이 달린 옷을 집으며 나를 힐끗하기에
어떻게 우리 형편에 그렇게 배짱이 좋으냐고 쏘아붙이고는
휙 나와 찬바람 속을 걷는데
여동생의 얼굴이 몇 십 개의 동그라미로 어른거린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전세금이 올랐는데 빌릴 데가 없다며
0을 모두 말하지 못하고 두 장을 얘기하기에
내가 이천이냐고 물으니
깜짝 놀라며 0을 하나 빼고
다섯 장이 올랐는데 어떻게 두 장 안 되겠느냐고 하던 누이

0을 하나 더 빼고 보냈더니
고맙다고 수십 번도 더 한 누이
어머니에게 절대 말하지 말아달라고 한 누이
이혼하고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팔십만 원짜리 간병인으로 살아가는 누이

아내는 저만치
까맣고 조그만 0을 달고
하나짜리 0을 달고 수많은 0들 사이로 뒤따라온다.
둘이서 말없이 지하철을 타는데
그날따라 지하철은 왜 그렇게 롤로코스터인지.
앞자리에 앉은 까만 0들은 또 얼마나 무참히도 찌그러져 있는지.

오빠, 물속에서 누가 오래 참을 수 있는지 내기할래?
백만 원이다!

-‘누이의 방’에서

‘0’. ‘0’에 숨어 있는 뜻은 무엇일까. ‘0’은 끝이기도 하지만 시작이기도 하다.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는 ‘0’은 돈 없이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세상, 자본주의가 지닌 독버섯 같은 돈이다. ‘0’은 또한 그 돈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세상, ‘무소유’로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향한 꿈이기도 하다.

시인 전기철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 전기철이 다섯 번째 시집 <누이의 방>(실천문학사)을 펴냈다. 그는 1989년 <심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시집 <나비의 침묵>, <풍경의 위독>, <아인슈타인의 달팽이>, <로깡땡의 일기> 등에서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닌 헛된 욕망과 그 자본주의 세상이 빚어내는 혼란과 혼돈을 날카롭게 꼬집어 낸 바 있다.

시인 전기철이 펴낸 이번 시집 <누이의 방>에서는 그 자본이란 공룡이 사람들 삶과 마음을 얼마나 할퀴고, 찌르고, 상처를 깊이 내는가에 더욱 깊이 파고든다. 시인이 바라보는 자본주의 세상은 사람이 아닌 돈이 사람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그런 지옥 같은 삶이 거듭되는,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세상이다.

시인 전기철은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이상한 세상을 답이 나오는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시를 쓴다. 그는 사람들 몸이 자본주의에 물들고 마침내 마음까지 흠뻑 물들어 도무지 구할 길 없는 것 같은 이 세상을 거세게 꼬집는다. 그가 쓰는 시는 시가 아니라 돈을 갈기갈기 잘라버리는 가위다.

전기철의 <누이의 방> ⓒ 실천문학사
방부 처리된 기억의 저편에서 온 어머니

생각의 뼈다귀를 쌓는 밤. 책이 한 관념론자를 편다. 어머니의 치매가 와 있다. 기억의 밑바닥이 수런거린다. 목구멍에서 침을 핥는 어머니. 방부 처리된 기억의 저편에서 온 어머니, 파랗다. 파란 어머니는 책을 기절시킨다. 관념으로 그을린 밤. 페이지 속으로 들어온 관념론자가 절뚝인다. 책 속에 치매를 쌓는 밤. 관념론자가 어머니의 치매 속에다 글을 쓴다. 치매에 걸린 책. 초침 위에 권태를 쌓는 관념론자의 밤. 파란 밤. 어머니가 목구멍에서 마지막 침을 핥는 밤. 적막이 그을린다. -‘권태’에서

이 시집은 모두 3부에 45편이 실려 있다. 제1부 ‘여자 투우사’에 실린 한여름 밤의 꿈, 풀 하우스, 불행해서 기뻐요, 어느 자해공갈단의 고백 등과 제2부 ‘강물에 써놓은 말들’에 실린 천 개의 도시, 법주사의 밤, 시인의 영토, 권태, 제3부 ‘슬픈 피에로’에 실린 버스 정류장, 양철 지붕의 재잘거림, 오랑캐꽃 등이 그 시편들.

천재시인 이상은 수필 ‘권태’에서 이 세상 70%가 공포스런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어 권태스럽다 했다. 시인 전기철은 어머니가 걸린 치매에서 ‘권태’를 느낀다. 어머니에게 찾아든 치매는 결국 이 지독한 자본주의 세상이 남긴 권태다. 그 권태는 “방부 처리된 기억의 저편에서 온 어머니”이기도 하고, “책 속에 치매를 쌓는” 관념론자이기도 하다.

시인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초침 위에 권태를 쌓는 관념론자”라고 비아냥거린다. 그래. 어쩌면 우리도 시인처럼 “생각의 뼈다귀를 쌓는 밤”을 지나 치매와 쌍둥이인 ‘권태’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권태와 치매, 관념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아주 가까운 이웃사촌이기에.

오빠, 시가 밥 먹여줘?

노래방에서 밤새 일하는 누이에게
서정시란 몇 푼어치의 위안인가?
아침이면 잠이 오지 않는다며
폐가가 허물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는
누이에게 서정시란 무엇인가?

오빠, 나한테 인간이 되라고 하지?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종말론자야.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내일은 없는 거야. 영혼을 모두 돈에 팔아버렸거든. 밤은 나의 대륙이고 나는 종말의 박물관이야.

나는 홀로 우체통처럼 빨개져서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시부렁대는 시계를 바라보며 서정시 같은 말을 뱉는다.
너에게 시집을 보낼게. 네 밤을 지켜줄 거야.

오빠, 시가 밥 먹여줘? 오빠도 알지. 내 꿈이 투우사라는 거. 커다란 경기장에서 카포테를 들고 서 있는 투우사 말이야. 여자 투우사!

누이는 자신의 대륙에 홀로 서서
그런데 오빠, 밤마다 야근을 하는 달은 시급이 얼마나 될까?
나 같은 년의 아픔 때문에 지구가 무거워지면 안 되는데...... 그치, 오빠!

그 순간
투우사의 칼이
나의 시
한복판에 박히는 것을 보았다.

-‘여자 투우사’에서

그래. 시가 밥 먹여주지 못한다. “노래방에서 밤새 일하는 누이”가 “오빠, 나한테 인간이 되라고 하지?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종말론자야.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내일은 없는 거야. 영혼을 모두 돈에 팔아버렸거든”이라고 말하는 것도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 사상이든 고귀한 무엇이든 관계없이 오로지 돈만이 모든 것을 행복하게 만드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투우사를 꿈꾸는 누이, 그 “투우사의 칼이 / 나의 시 / 한복판에 박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시인이 쓰는 서정시는 그 누이에게 “몇 푼어치의 위안”도 되지 못한다. 시인은 그래도 그런 누이를 안타깝게 여기며 “시집을 보낼게. 네 밤을 지켜줄 거야”라고 다독인다. 돈이 되지 않는 시가, 돈을 벌지 못하는 시인이 돈 앞에서 무슨 힘을 쓰겠는가.

시인 전기철 다섯 번째 시집 <누이의 방>은 우리 사회 깊숙이, 아니 이제는 뿌리를 아무리 뽑아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자본주의에게 앙칼지게 퍼붓는 독설이다. 그 독설은 아무리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자본주의 그 심장을 더 깊숙이 찌르기도 하고, 자본주의 팔 다리를 자르며 맞장을 뜨기도 한다.

시인 전기철이 쓰는 시는 죽은 시가 아니다. 그가 쓰는 시가 살아 움직이는 것도, 시란 달걀로 자본주의란 엄청난 바위를 치는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시가 비록 돈은 되지 않지만 그 돈에 침을 뱉을 수 있는 것이 시가 아니겠는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전기철은 1954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88년 <심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비의 침묵> <풍경의 위독> <아인슈타인의 달팽이> <로깡땡의 일기>가 있다. 지금 숭의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