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제7사단,독서경연대회 수상작 ②
육군제7사단,독서경연대회 수상작 ②
  • 고무정 기자
  • 승인 2013.08.2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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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일병 김지민 <철학이 필요한 시간> 외 1
 

장병들이 군 복무 기간이 단순히 국가의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시간으로 자신의 인생을 허비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육군 제7사단의 <Army Book Start>운동은 이러한 인식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하다. 군 복무기간동안  독서의 즐거움을 깨우치게하고 더 나아가 ‘청춘’의 장병들이 책을 통해 사유의 폭을 넓히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Army Book Start>운동은 책을 읽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후감을 통해 글쓰기 훈련은 물론 독서를 위한 동기유발과 군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도 선물한다.이형주 감찰참모의 제안으로 시작된 <Army Book Start>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독후감 경연대회는 지난 2010년을 시작으로 올 상반기까지 8회 째를 맞고 있다.지난 4.1일부터 6월30일까지 마감된 제8회 독후감 경연대회에는 일선장병을 비롯 군 간부들이 함께 참여해 총 500 여편의 독후감이 출품됐다.이 중 엄정한 심사를 거친 10편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본지<서울문화투데이>는 육군7사단의 <Army Book Start>운동을 지지하며 그간 책보내기를 통해 후원을 해오고 있으며 이번 제 8회(4. 1∼6. 30) 독후감 대회 수상작들을 차례로 게재키로 한다. -편집자 

★우수작★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읽고>

본부근무대 참모소대 일병 김 지 민

지금 대한민국은 힐링(Healing)이 열풍이다. 그만큼 우리 현실이 팍팍하고 힘들다는 것이다. 청년실업 악화와 함께 사회 전반적으로 경기가 좋지 않다. 무한경쟁시대 속에서 사회 새내기인 우리는 여유를 잃고 살고 있다. 그저 ‘괜찮다’ ‘다 잘 될 거야’식의 희망이 담긴 메시지로만 위로받고 있다. 나는 과연 그런 말들에 위로를 받고 치유가 되어 힘든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가 항상 의문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생각으로 꾹 참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뒤로한 채 그저 학점 채우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앞만 보고 달리던 나는 목적지를 못 찾아 길만 헤매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름이 떨어져버렸고 잠시 기름을 넣기 위해 군대라는 주유소에 들렸다. 기름을 넣고 생수 한통을 받았다. 길을 찾느라 지친 나에게 그 생수한잔은 내가 마셔본 어떠한 물보다 시원하고 달았다. 그 생수가 바로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 순간 힘든 것은 옳은 것에 대한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옳은 게 있어서 힘들고, 옳은 게 있어서 행복해질 거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그 누구의 위로보다 나를 용기 있게 만들어 주었다.

철학이 다가온 순간, 철학에게 다가간 순간

철학이라는 전에 배울 수 없었던 광범위한 학문을 접했을 때 나는 경험해본 적 없는 지적 성취감을 느꼈다. 긴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루어낸 체계적이고 앞으로도 무한하게 발전할 수 있는 학문 속에 내가 들어왔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생각보다 그 성취감은 짧았던 기억이 난다. 막상 그 안에 들어선 순간 한문과 영어로 가득한 이론, 하이데거, 칸트, 스피노자 같은 이름만 들어도 어지러운 철학자들의 이름은 나를 거부감 들게 만들었다. 그 수업을 마지막으로 철학과의 인연을 잠시 끊고 살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대형서점 인문학 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철학에 문외한인 나조차도 TV나 인터넷에서 강신주라는 이름을 들어봤고 적어도 인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람만나는 것이 좋아 많은 책을 내며 여러 곳에 강의를 하러 다닌다고 한다.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독자들은 책의 인세나 강의료를 통해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어렵다고만 느꼈던 철학이론들을 쉽게 풀어 이해시키는 것이 그가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이런 의도에 걸맞게 나는 어렵기만 했던 철학에 그의 도움을 받아 다시 다가가고 있었다.

독서라는 여행을 통하여 철학을 배울 수 있다.

강신주는 독서를 여행이라고 표현한다. 진정한 여행에는 배움이 었어야 하고 진정한 여행을 떠난 사람은 자신이 도착한 낯선 곳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책의 내용과 작가의 의도가 어렵고 낯설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타자와 자신에 대해 깊게 성찰할 수 있는 경험을 줄 것이다. 책은 나를 슬프게 하고, 미소 짓게 하고 혹은 삶의 전망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마치 여행지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물건을 발견하는 것처럼, 책에서 소중한 보물을 찾아낸 것이다.

가장 쉽게 타인의 철학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다. 책 한권에는 작가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고 우리는 그들의 철학세계를 간접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런 체험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길 것이고 그 시각은 내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 사람은 누구나 극심한 뱃멀미를 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어느 순간 바다의 리듬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뱃멀미로 속을 끓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생각보다 어려운 책이어서 반쯤 읽고 덮어둔 상태이다. 내가 읽다가 멈춘 것은 뱃멀미를 느끼려는 순간의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금만 참고 기다린다면 나는 어느새 독서라는 항해를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독서라는 여행을 통하여 철학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인문학이 우리의 걱정과 불안을 치유해 줄 수 있을까?

간혹 인간이 겪는 고통의 양은 불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단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을 일시불로 갚느냐, 아니면 할부로 갚느냐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것은 일시불로 고통을 겪어내는 것이다. 반면 자기 최면과 위로에 빠진다는 것은 할부로 고통을 겪어내는 것이다. 할부로 고통을 겪는다면, 할부가 끝날 때까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진다. 일시불로 정직하고 솔직하게 고통을 겪어내자. 그러면 남은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 우리에게 덤으로 남겨질 것이다.

강신주는 인문학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하지만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인문학을 통해 어떤 치유를 받을 수 있을까? 강신주의 책을 읽다보면 불안과 우울엔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사는 것이 다 그렇지 뭐’하는 말로 뒤로감기 하듯 건너뛰어 왔던 고민들을 그는 되감기하여 다시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덮어두었던 불안과 우울은, 대게 나는 원한 적 없으나 사회가 주는 대로 받아서 생긴 상처와 흔적들이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참된 인문학 정신은 우리의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상처를 치유할 것이다. 나가르주나, 마르크스, 이지, 들뢰즈 등등 솔직한 인문정신이 우리에게 가하는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우리는 참아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작은 희망이라도 생길 수 있을 테니까. 인문정신이 건네는 불편한 목소리를 견뎌낼수록, 우리는 자신의 삶에 더 직면할 수 있고, 나아가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꿈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자기계발은 무엇일까?

자기계발 관련 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느낄 테지만 대부분 자기계발을 취업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우리는 자기계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자기계발은 자기 가능성을 실현 하는 것이지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자기계발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어 있다. 자기계발을 잘해야 취업도 하고 직장생활도 잘한다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것은 노동이고, 두 가지가 일치하면 그건 놀이가 된다. 인생을 잘 보내기 위해서는 내일이 아닌 오늘이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수단과 동시에 목적인 삶 즉 놀이 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른들은 종종 ‘20대로 돌아간다면 진정 하고 싶은걸 할 텐데... 그러니 너는 꼭 하고 싶은 일을 하여라.’ 이런 말을 많이 하신다. 후회하는 것이다. 바쁘게 앞만 바라보고 사회에 필요한 자기계발을 하다 보니 지루하고 후회되는 단순노동으로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불필요한 일이다, 쓸데없는 일이다’ 생각하지 말고 이것저것 다해보면서 내가 정말 뭘 좋아하는지 찾아봐야 한다. 또한 사회에서 하라는 것만 할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것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 가능성을 실현 할 수 있는 자기계발일 것이다.

‘단추 짝이 맞는 셔츠’의 삶을 살고 싶다

셔츠를 입어본 사람이라면 밑에서부터 잘 꿰매어 왔다고 생각하지만 위에 가서 단추 짝이 안 맞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20년 동안 아래에서부터 단추를 꿰매어 올라왔다. 하지만 이조차도 대부분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왔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인 지금 단추 짝이 안 맞는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그 순간마다 ‘단추를 풀고 다시 시작해볼까?’ 혹은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갈등을 할 때가 많았다. 내 삶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면서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어떻게 다시 시작하면 좋을까?’등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고민 해봐야겠다. 당장 귀찮고 힘들다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이대로 간다면 나는 ‘단추 짝이 안 맞는 셔츠’의 삶을 살 것이고 귀찮지만 지금이라도 처음부터 다시 ‘단추 짝이 맞는 셔츠’의 삶을 산다면 전자의 삶보다는 나 스스로도 만족스럽고 남들이 보기에도 깔끔하고 정돈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지금이 나에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다

지금보다 힘들면 더 힘들어질 앞으로의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하고 고민하라’라는 그의 한마디는 다른 사람들의 겉으로만 화려하게 보이는 삶만 갈망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삶이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인생이 비디오테이프라면 플레이어에 넣고 뒤로 빨리 돌려버리고 싶다고 생각을 많이 했다. 극복할 수 있다는 당당함 보다는 현실을 안주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그런 나에게 당당함과 용기를 심어 주었다.

서론에서 나는 군대를 주유소, 이 책을 생수 한통이라고 비유했다. 하나 더 추가해보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지도 한 장을 더 얻은 기분이다. 나는 군대라는 주유소에서 잠시 쉬고 있다. 굳이 급하게 목적지를 향해 속도를 낼 필요는 없다. 생수를 마시고 목을 축였다면 천천히 지도를 보며 올바른 길, 올바른 방법으로 목적지를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올바른 길, 올바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지금이 나에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다. 

 병사들의 더 나은 독서를 위해 설치한 면학실이다.

   

 ★우수작★ <아버지를 읽고>

본부근무대 일병 최 주 영        

나의 군 입대 하루 전날 우리가족은 오랜만의 저녁 외식을 마치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손에 쥐고서 집으로 걸어갔다. 버스로 두, 세정거장 정도의 거리였지만 소화도 시킬 겸 평소 하지 못하던 이야기들을 하면서 걷는 시간이 오히려 짧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버지께서는 그때까지도 실감이 안나 얼떨떨해 하던 나의 어깨를 묵직하게 감싸주시며 잘 할 거라 믿는다는 말뿐이셨지만 아버지와 나는 밤하늘 올려다보며 그렇게 한참을 더 걸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입대한 후 한결같은 시간은 꾸준히 흘러 어느덧 10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있는데 무소식이 희소식일 꺼라 미루던 어머니와의 통화 중에 아버지께서 우리 주영이는 엄마만 좋은가보다고 아버지 찾는 전화는 한번 없다며 서운함에 눈물까지 보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놀란 것 보다는 죄송스러웠다. 다음날 아버지 휴대폰으로 전화를 드렸더니 단번에 “엄마가 나한테 먼저 전화 하라고 했구나?” 하시면서도 기쁜 마음 감추지 못하시고 정말 아이처럼 좋아해주시던 아버지 음성에 그만 왈칵하고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괜스레 창피해진 나는 마음과는 다르게 무뚝뚝하기 그지없었고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하고서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그래서였을까 자기개발 시간에 두리번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무작정 뽑아들고 정신없이 읽어 내렸던 책이 김정현 작가의 『아버지』라는 장편소설이다.

처음 책의 소개를 읽어보고 ‘췌장암 말기인 가장의 가족을 향한 희생과 사랑이라...’ 너무 뻔한 이야기이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내용을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하여 아버지의 알지 못할 깊은 사랑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읽는 도중마다 공감되기도 하고 나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것 같기도 해서 중간 중간 멍하니 생각에 잠겨야 했던 적이 많았다.

-주인공인 ‘정수’가 췌장암 말기임을 친구인 남박사에게로부터 알게 되었다.

시한부선고, 즉 곧 죽을 것임을 통보받은 것이다. 내가 4개월 뒤에 죽는다면..? 감히 상상도 못할 느낌이겠지만, 남은 날을 뭘 먹을까, 어디를 갈까, 은혜갚을 사람 혹은 원수갚을 사람은 누구인가 등의 생각들이 들지 않을까?

하지만 정수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남겨질 가족들의 걱정이었다. 이것이 ’가장‘인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하나 자신만을 위할수 없는 사람.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아닌 남겨질 가족들이 걱정되는 사람. 아버지라는 단어의 무게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정수는 자신의 병을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하루하루 외롭게 죽음의 공포와 씨름한다.

내가 정수였다면..? 우선 초조하고 불안할 것이다. 정수와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아까운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의미있게 보내려 애쓸 것이다. 군입대하기 전에도 매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보내고자 노력했었는데 죽음을 앞뒀다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수는 왜 말할 수 없었을까? 아니, 무엇이 정수의 입과 마음을 틀어막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정수의 가족들이 자신의 남편에게, 아버지에게 조금만 관심과 사랑을 보였다면 정수에게 안식처이자 도피처는 술과 남박사가 아닌 가족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아버지께 서운하고 화가 날 때도 많았던 적이 있다. 아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 걸까? 라고 의문을 가졌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새벽에 화장실에 가다가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대화 하시는 것을 의도치 않게 듣게 되었었다. 아버지께선 오히려 아들들이 당신을 피하고 부담스러워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아들들이 점점 커가면서 슬슬 도망만 다니고 이야기하기도 싫어한다고 느끼신다는 것이다. 방에 돌아와 다시 생각해보니 관심이 없었던 쪽은 나였었다. 아버지께서 요즘 뭘 하시는지 뭐 때문에 기분이 좋으시고 기분이 안 좋으신지 심지어 오늘 아침에 무슨 옷을 입고 나가셨는지도 기억을 못하는 나였다.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아버지와 나뿐이었던 저녁시간에도 급하게 집 밖을 나섰던 적도 많았다. 과연 내가 아버지께서 내게 관심이 없다며 서운해 할 자격이 있을까?, 아니 내가 아버지께서 그러실 수밖에 없을 만큼 벽을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깊이 반성한 기억이 있다. 항상 가족을 위해 희생하시고도 무관심, 무책임이라는 오명을 짊어지시는 아버지께 오늘은 죄송하다고 사랑한다고 꼭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수는 딸 지원이의 원망과 분노 가득한, 감히 폐륜이라 할 수도 있을 편지조차 딸에게 받은 첫 편지라며 버리지 못하고 항상 가슴 안주머니에 고이 간직하고 다녔다. 그런 정수를 남박사는 이해하지 못하고 나무라기만 했지만 정수는 이 절절한 편지조차 딸의 사랑이라며 지원을 감싼다.

내게는 아직까지도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이 하나 있다. 아버지가 너무 미웠던 적이었다. 그땐 나의 생각이, 마음이 어떤지는 아시려고 하지도 않으시면서 아버지만의 생각으로 나를 못미더워 하신다고 느꼈었다. 그날 저녁에 나도 이 책의 지원이처럼 아버지께 편지를 썼었다. 노골적으로 ‘나 정말 화났습니다, 아버지가 밉습니다.’ 다 드러내며 아버지 가슴에 못 박은 것이었다. 그 편지를 쓰면서는 아버지께서 편지를 읽으시며 내 마음을 알게 되실 거라는 생각에 기대감조차 들었지만 막상 아버지께 편지를 전하고 나니 정말로 후회스러웠다. 기대가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후회로 돌아왔고 아버지께서 들어오시면 정말 죄송하다고 싹싹 빌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퇴근하신 아버지는 나를 보시자마자 꽉 안아주시더니 어떤 말도 않으시고 “사랑한다.” 하시는 것이었다. 난 아무 말도 못하고 하루 동안 꼭꼭 눌러왔던 감정이 터지면서 울음만 나왔었다. 그렇게 펑펑 울고 아버지를 향한 마음은 다시 훈훈해 졌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지금까지도 그때의 아버지께서 하신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편지를 못 보신 건 아닌가 하며 일주일동안은 더 불안해했었던 나였다. 하지만 이제야 알게 되었다. 지원의 행동이 너무도 공감이 되어서 나도 같이 마음조리며 마저 읽어 내려간 끝에 그때 아버지의 이유 알 수 없는 행동도 왜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감히 짐작도 못했던 그 마음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 이었던 것이다.

-갈수록 지쳐가는 정수를 보다 못한 남박사는 정수의 아내에게 사실대로 말하게 된다. 정수와 가족들은 뒤늦게야 깊은 오해의 골을 풀고 가족끼리의 마지막 온정을 느끼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통증에 정수는 결국 입원하게 된다.

수능시험을 치루고 난 12월 초에 아버지께서 친구분들과 약주를 드시고 겨우 집에 오시더니 화장실에 가셨다가 꿍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신 적이 있다. 어머니는 외가댁에 가셨었고 동생은 독서실에서 공부하느라 늦게까지도 나 혼자였었다. 화장실로 뛰어가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술이 너무 과하셔서 졸음을 못 이기시고 쓰러지셨던 거였지만 그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물부터 앞을 가렸었다. 어렸을 땐 아버지가 슈퍼맨이었었다. 아빠랑 같이 있으면 무엇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 후로도 아버지께선 항상 든든한 우리가족의 버팀목이셨고 태산이셨다. 그런데 그 순간 아버지의 어깨가 왜 그리도 작아보이시던지, 모진 풍파 홀로 다 받아내시던 아버지는 이제 많이 약해지셨구나 하고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있을 때 잘하라’ 라는 유명한 말처럼 이제는 조금씩 내가 받아온 사랑을 갚아나가야겠다.

-입원해있던 정수는 남박사에게 안락사를 부탁한다. 정수는 자신을 위해 가족들이 병수발 드는 것이, 고생하는 것이 싫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못난 모습 보일 수 없다는 마음, 가족에게만큼은 끝까지 든든한 가장으로 기억되는 것이 그에겐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정수는 마지막을 위해 준비한 가족들 선물과 편지를 꼭 쥐고 고통 속에서도 애써 미소 지으며 영원히 눈을 감았다.

‘도둑도 자기 자식에게는 도둑질 하지마라고 가르친다.’ 라는 말도 있다. 자신의 자녀에게만큼은 떳떳하고 당당하고 강직하고픈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온갖 힘든 일 속에서, 많은 유혹들 속에서 가족을 위해 버티고 희생하시며 나의 뒤를 지켜주시는 아버지, 한번도 감사하다 말해본 적 없는 나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으실 수 있는 아버지. 이제는 아버지께 나라를 지키는 씩씩한 장병으로서 외롭게 혼자서 다 짊어지셨던 무거운 짐들 믿고 맡기실 수 있 록 군생활하는 2년이라는 시간을 먹고, 마시고, 졸고, 두드리는데 허비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멋진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

아버지, 제가 언제 어디서 무얼 하든지 믿는다는 아버지의 사랑 실망시켜드리지 않기로 군 입대하며 제 가슴속에 새겼었는데 자꾸만 간사한 마음이 편해지려 하고 안주하려 하게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작은 것에도 열정적이신 아버지를 보며 자라왔는데 저는 작은 것에도 쉽게 포기해버리는 못난 아들이 될까 두렵습니다. ‘대한민국의 건장한 청년은 다 겪는 군대에서 그들과 차별화를 두려면 남들 같은 군생활을 기대하고 안주하면 안 된다고, 당장의 편이에 눈멀지 않도록 항상 긴장하고 집중하라던 아버지의 말씀 어리석은 저는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되시고부터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제가 아버지의 사랑 다 갚을 수 없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저버리는 못난 아들은 되지 않겠습니다. 우선 지금 주어진 군생활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몸도 마음도 건강한 장남이 되어 외롭게 걸으시는 그 길에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젠 제가 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