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제7사단,독서경연대회 수상작 ④
육군제7사단,독서경연대회 수상작 ④
  • 고무정 기자
  • 승인 2013.08.29 1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입선작, 엄충식 일병 <어떻게 살 것인가> 외 3

장병들이 군 복무 기간이 단순히 국가의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시간으로 자신의 인생을 허비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육군 제7사단의 <Army Book Start>운동은 이러한 인식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하다. 군 복무기간동안  독서의 즐거움을 깨우치게하고 더 나아가 ‘청춘’의 장병들이 책을 통해 사유의 폭을 넓히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Army Book Start>운동은 책을 읽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후감을 통해 글쓰기 훈련은 물론 독서를 위한 동기유발과 군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도 선물한다.이형주 감찰참모의 제안으로 시작된 <Army Book Start>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독후감 경연대회는 지난 2010년을 시작으로 올 상반기까지 8회 째를 맞고 있다.지난 4.1일부터 6월30일까지 마감된 제8회 독후감 경연대회에는 일선장병을 비롯 군 간부들이 함께 참여해 총 500 여편의 독후감이 출품됐다.이 중 엄정한 심사를 거친 10편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본지<서울문화투데이>는 육군7사단의 <Army Book Start>운동을 지지하며 그간 책보내기를 통해 후원을 해오고 있으며 이번 제 8회(4. 1∼6. 30) 독후감 대회 수상작들을 차례로 게재키로 한다. -편집자 

 

★입 선1★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고

수색대대 1중대 일병 엄 충 식

인생엔 정답이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 만의 답을 찾기 위해 끝없는 고민을 한다. 정답을 찾기 위한 고민에 가장 본질적으로 접근 할 수 있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 인가?’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은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고민이고 현재 군생활을 하고 있는 나도 포함하여 모두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질문이다.

나는 그동안 이 질문을 가슴 속 한 구석에 가둬놓고 있었다. 머리 아프고 자신 없어서 가두고만 있던 문제를 입대를 통해 이번엔 피하지 말고, 꼭 당당히 맞서보리라 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첫 휴가를 나가 서점을 둘러보던 중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 제목을 보고, 이 책은 요즘 내가 고민하는 문제를 속 시원하게 풀어 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저자가 유시민인 것에 놀랐다. 유시민은 한때 내가 존경했었고 지금도 가슴 한쪽에서 응원하고 있는 사람이다.

허나 내가 존경하던 사람이지만 ‘유시민이 과연 이런 책을 쓸 만큼 성공한 사람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유시민의 실력을 의심하는 문제가 아니다. 마이너에서, 비주류에서 부조리에 맞서 바꾸려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유시민은 딱 내가 좋아하는 타입에 들어맞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유시민은 좋은 사람이지만 지금 현재 자신의 일에서 성공한 사람은 아니다. 자신이 생각한 뜻이 있지만, 현실의 벽에 막히고, 좌절했었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일어나려 했지만, 다시 실패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런 책을 쓸 만큼 설득력 있는 사람인가‘하는 의문이 있었었다.

하지만 그는 머리말에 내가 우려한 생각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자신이 성공한 인생을 살지 못 했다고 밝혔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책을 써내려가겠다고 말하며 걱정을 잠재웠다. 난 성공과 실패를 제쳐두고 유시민의 삶 방식을 좋아했다. 성공하지 못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큰 감동을 주었다. 실패 할 것이 뻔했지만 도전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실패 했어도 현실에 무릎 꿇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좋았다.

그랬던 그도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제대로 깊게 고민해보고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해본일이 없다고 썼다. 그저 현실에 잘 적응해서 목표도 방향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았다고 적었는데, 마구잡이로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들을 나름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다는 의미였다.

그동안 나는 눈앞의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전투적으로 맞서지 않고, 어렵고 골치 아프게 느껴지면 피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의 충고를 통해 삶에서 생기는 어려운 문제들에 당당히 맞서는 방법과 맞서야만 됨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의 문제와 전투적으로 싸울 자신감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멋있고 아름답게 사는 법을 배웠고, 요즘 개인적으로 많이 혼란스러웠던 나의 도덕적 가치와 경계선을 확실히 정리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내가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으려고 했던 나의 꿈도 찾았다.

나에게 이 책은 목표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아와 항로를 잃어버린 배 같던 나의 삶에 등대 같은 책이 되었다. 이제 그 빛을 바라보며 나의 항로를 바로 잡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입 선2★
 죽음이란 무엇인가?

본부근무대 상병 권 동 환

 “큰아버지 돌아가셨단다. 학원 밑으로 내려와라.”

15년 전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 어머니의 일방적인 통보이자 나에겐 첫 ‘죽음’의 경험이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에게 큰아버지의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였을 것이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나를 예뻐하시던 큰아버지와 당신을 잘 따르던 나와의 끈끈한 정신적 유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큰아버지와 했던 약속이 하나 있었다. 자택인 대구에서 조부모님 댁이 있는 경북 영천까지 자전거 여행을 하자던 약속이었는데 큰아버지께서는 그 여행을 불과 1주일을 앞두고 급작스러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렇게 큰아버지께서는 제대로 된 인사 한번 없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물론 처음 접한 죽음이라는 경험은 너무나도 낯설어서 실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큰 집에 놀러가도, 집안 제사 때도, 나타나지 않는 그의 존재의 부재 속에서 죽음을 느끼기엔 내가 너무 어렸을지도 모르겠다. 큰아버지와의 이별 이후 나름대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심각하게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과연 죽음이 무엇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이 정리되기는커녕 오히려 머릿속이 뒤죽박죽되곤 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 물어볼 용기도 없었거니와 학교에서 죽음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선생님 또한 없었다. 그렇게 나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미해결된 과제로 큰아버지와의 추억과 뒤섞여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정기휴가 중에 서점에서 만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어쩌면 나에게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영역인 죽음에 대한 강의를 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이 책은 셀리 케이건 교수가 1995년부터 예일대에서 진행해온 교양철학 정규강좌 “DEATH”를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고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3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첫 번째는 “영혼을 인정해야 할까?”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원론과 물리주의의 논쟁으로 귀결된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원론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고, 물리주의는 육체만이 인간이며 영혼은 없다는 것이다. 이원론의 입장을 가진 대표학자로는 데카르트가 있겠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육체가 없는 정신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존재여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개밥바라기별이 없는 샛별을 상상할 수도 있고, 샛별 없는 개밥바라기별을 상상할 수 있지만 그 두 별은 결국 같은 금성이 아닌가. 또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한 플라톤의 <파이돈>에 대해서 저자는 ‘설령 육체와 다른 비물질적인 영혼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사실이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판함으로써 이원론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결국 나는 ‘영혼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럽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정신 또는 영혼에 대한 개념들은 육체에 의존하고 있으며 육체(특히 뇌)가 제대로 작동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기능이고 육체가 사라지면 정신도 사라지지 않을까? 위의 질문을 통해서 나는 인간을 육체적인 존재로 바라볼 때, 죽음에 대해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죽음이라는 주제를 영혼과 사후세계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면, 철학적인 토론은 어렵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의문을 던짐으로써 죽음이라는 개념을 영혼 또는 사후세계로 넘기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함을 권유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의 두 번째 질문은 “인간은 혼자 외롭게 죽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이 의문은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며 통상적으로 제기하는 질문일 것 같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혼자 죽는 것이 바른 표현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비록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예로 소크라테스나 영국의 철학자 흄 또한 죽는 그 순간까지 철학 논쟁을 펼치거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가. TV 프로그램에 나온 의사는 환자의 병명을 꼭 환자 본인에게 알려주도록 가족들을 독려한다고 인터뷰한 내용을 보았다. 그 예로 말기 폐암은 호흡 곤란이 심하기 때문에 병을 알고 있는 것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데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일을 알고 숨이 찬 것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숨이 찬 것은 공포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는 환자는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려 심리적인 압박감 때문에 숨이 더 차고, 숨이 차오르면 그 만큼 또 불안하고 두렵다.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환자는 지쳐가고 편안한 죽음은 점점 멀어지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죽음을 안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고 죽음을 준비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스스로가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유서나 의료 지시서를 쓰기도 하고 입관체험도 하는 것이 될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책상 서랍을 정리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적적인 죽음관’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데 죽음은 결코 인생의 실패가 아니다. 누구나 거쳐 가야 하는 인생의 한 부분이다. ‘이제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은 인생의 큰 사건이다. 죽음을 힘들고 무서운 것이라고 인식하면, 비현실적인 희망 뒤에 절망을 감내하지 못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해버리고 자신의 마지막을 긍정적으로 마무리할 기회, 남겨진 삶을 여행할 기회마저 놓쳐버리게 된다. 우리가 죽음을 외면하는 진짜 이유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 등 뒤로 다가온 나쁜 소식의 정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죽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불행한 소식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나쁜 소식을 불행으로 연결시키지 않기 위해선 떠나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나 슬픔을 견딜 용기가 필요하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떠날 사람과 함께 죽음의 문턱에 서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응어리진 일에 관해 화해하며 서로의 슬픔을 애도하고 위로할 것이다. 그것이 진짜 죽음의 해피엔딩일 것이다.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마지막 질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은 나쁜 것일까, 좋은 것일까?”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들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죽음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론 중에 하나는 ‘박탈이론’이다. 박탈이론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죽음은 삶이 가져다주는 좋은 것들을 모조리 빼앗아간다. 이것이야 말로 죽음이 나쁘다는 결정적인 이유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죽음을 나쁘다고 인지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당연히 죽음은 좋지 않다. 죽고 나면 삶이 주는 모든 축복을 더 이상 누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박탈이론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죽음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영생은 형벌이다.”라고 까지 말한다. 신화를 많이 읽어본 사람들은 알고 있듯이 신이 인간에게 질투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죽기 때문에 영생의 신은 도무지 가질 수 없는 그 아름다움을 질투하는 것이다. <죽음의 중지>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부터 시선을 끌지 않는가. 누구나 한번쯤은 마음속으로 ‘죽음의 중지’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집어든 나는 첫 문장을 읽고 다시 한 번 호기심을 느꼈다.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어느 나라에서 죽음이 사라진다.

사람들은 테라스에 국기를 걸어 죽음의 중지를 반긴다. 아픈 사람도 있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고 교통사고도 일어나지만 그 누구에게도 죽음은 찾아오지 않는다. 물론 노화가 진행되어도 죽지 않는다. 불로가 아닌 불멸의 삶. 이제 사람들은 죽어야 할 이들 때문에 골치가 아파지고 세상은 일대 혼란에 휩싸인다. 누군가는 간절히 죽음을 바라고 누군가는 죽음이 있는 나라로 도피한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첫 문장과 끝 문장은 조사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똑같지만 두 문장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은 판이하게 다르다. 첫 문장이 반가웠다면 마지막 문장은 절망스럽다. 어느 설문 조사에서 평균수명이 100세로 연장되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고 대답한 사람이 43.3%라는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오래 사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의미하는 건 뭘까. 대다수 노인들의 우울한 노년생활을 보여주는 건 아닌지. 늙음은 똑같은데 죽음은 늦춰진 시대. 기나긴 노년 시절을 보내야 하는 우리는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혼란과 갈등을 그대로 경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자식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 환자들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얼마 남지 않은 미래를 생각할 수도 없다. 과거와 미래라는 양쪽 출구가 모두 막힌 채 어두운 미로를 헤매는 그들에게 장수는 신의 축복일까. 아마 ‘죽음의 중지’에서 말하고자 한 것도 죽음의 긍정적인 의미였을 것이다. 죽음은 중지 되지 않았어도 수명은 고무줄처럼 늘어난 시대.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긴긴 생에 인간의 아름다운 색을 입힐 때 죽음은 조금이나마 나쁘게 생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주제에서 저자가 묻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대답은 물론 Yes이다. 영생보다는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자세와 죽음은 항상 너무 일찍 온다는 생각이 공존할 때 인간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비로소 직면하고 우리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는 ‘동기’이자 ‘근거’가 바로 우리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는 동안 저자는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정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A가 될 수도 있고 B가 될 수도 있다는 식의 애매한 입장을 고수했다. 책을 읽으면서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이 있었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어쩌면 죽음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다른 사람의 머리에서 찾는다는 생각자체가 오류라고 생각했다. 결국 저자는 죽음이라는 막연한 개념과 규명되지 않은 해답을 독자 스스로가 찾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결론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이 책 속의 재미있는 상상 실험이 떠오른다. 우리가 원하는 최고의 경험들을 데이터파일로 다운로드해 마음대로 경험할 수 있는 ‘경험 기계’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자면 암을 정복할 수 있는 획기적인 치료법을 개발하는 경험을 선택하게 되면 연구실에서 갑자기 놀라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서 암을 치료할 수 있는 단백질 억제재 개발에 성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험 기계 속 인생이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마음껏 경험할 수 있는 이와 같은 경험 기계 속의 삶은 과연 멋지고 환상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이런 경험 기계 속의 삶에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려는 노력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무엇이든 원하면 경험할 수 있는 삶에서 하루하루 죽음을 항해가면서 남아있는 한정된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려는 노력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죽음이 우리의 삶에 던져주는 최고의 선물이자 가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얼마 전 조용히 흥행몰이를 했던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위해 벽돌을 구워 병원을 짓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학교를 꾸려나가는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담고 있다. 의사이기도 한 이태석 신부님은 대장암에 걸려 짧은 투병 생활을 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눈물을 보이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딩카족 주민들이 이태석 신부님의 영정을 들고 음악을 연주하며 행진하는 모습은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고 사랑과 소통으로 가득 찬 그의 가치 있는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이태석 신부님의 죽음이 멋진 것은 죽음 이전에 빛나는 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남에게 기쁨을 주며 살았던 그의 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들 중 하나는 결국 좋은 죽음은 좋은 삶에서 비롯된다는 진실이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사는 동안 죽음 없고, 죽음 뒤엔 우리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내용이긴 하지만, 죽음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시간을 제시한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첫 경험이자 마지막 경험이다. 어떤 일이든 ‘첫’은 미숙하고 어설프다. 첫사랑을 할 때 우리는 사랑의 기술은 알지 못한 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사랑과 연애를 감정과 기술을 동일시하다가 실패한다. 다행스럽게도 사랑에는 두 번째 세 번째 기회가 있다. 끝장난 사랑을 교훈 삼아 처음보다 더 뜨겁게 사랑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은 다르다. 삶으로부터 갑작스러운 실연인 죽음은 미리 경험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 “죽음의 신이 온다는 사실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의 신이 언제 오는가보다 불확실한 것은 없다”는 독일의 격언처럼, 건강한 우리에게 내일 당장 찾아올 수도 있다. 죽음은 자신이 찾아가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인생에서 얼마나 기막힌 일을 겪었는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자비도 연민도 베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을 고찰해야 한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만날 가능성이 없는 연예인의 일상은 꿰고 있으면서 또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을 영어 단어를 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정작 우리가 한번은 가야 할 죽음의 길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다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인생이라는 웅장한 공연의 커튼이 내려가는 순간 나는 무엇을 뜨겁게 느끼면서 육체와 이별을 해야 할까.

 

★입 선3★
 가장 아름다운 변명을 읽고 

본부근무대 참모소대 상병 이 세 호

아침이면 득달같이 앞산의 개구리를 잡으러 뛰어나간 대구의 산골소년은 어느새 훌쩍 자라 강원도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다. 무려 20년, 그 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흔히들 인생이란 바다에서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인생의 바다와 삶이라는 항해, 참 공감 가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느새 20년 동안이나 인생이란 바다위에서 항해를 하고 있다.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 보니 진로가 틀어지기도 하고, 풍랑을 만나 정신 못 차리고 물먹었던 적도 있다. 그리고 흔들흔들 울렁이는 속을 부여잡고 앞을 보니 어딘지도 모를 바다 한 가운데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나.

‘오늘날까지 왜 그렇게 흔들리고 방향을 못 잡았을까? 왜 그렇게 방황했을까?’ 후회를 그만두고 나룻배를 찬찬히 살펴보니 알았다. 나룻배 한쪽에 굴러다니는 내 나침반이 고장나있었다. 고장 난 나침반으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니, 주변 말에 진로를 틀어버리고 어떻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니 멍하니 휩쓸릴 뿐이었다.
‘아 , 늦기 전에 다시 나침반을 구해야겠다. 그래 이왕이면 멋진 항해사들의 나침반을 구해야지!’ 20년 전에 개구리를 잡으러 앞산으로 뛰어나갔던 것처럼 나는 도서관으로 뛰어갔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기준을 세우는 것,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항해에서 나침반을 가지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오래 전부터 왜, 어떻게,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 성찰하고 연구해 온 철학자들과 성인들이 어떻게 삶을 항해해 왔는지, 그들은 어떤 나침반을 가졌는지를 인문학이라는 창을 통해 만나보고 내가 삶을 살아오면서 느꼈던 자신의 모습들과 비교해 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내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철학으로 삼는다면 셰익스피어가 만든 고통의 바다에서 키르케고르가 던지는 후회의 풍랑에 맞서 보바리 부인이 찾아 해매이던 진정한 만족이라는 육지를 찾아 항해하는 나에게 든든한 하나의 나침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 아래서 조금 늦었을지 몰라도 나의 삶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인문학 책을 펼치게 되었다. 그중에 가장 감명 깊게 읽고, 내 양심과 도덕성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된 플라톤이 기원전 4세기에 썼던 인류를 위한 위대한 항해사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대해 독후감을 쓰게 되었다.

만약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한 일에 대해 사형을 선고받는다면 나는 죽음 앞에서도 내가 한 일에 대해 당당할 수 있을까? 또 나는 내가 평소에 남들에게 했던 말들에 책임을 지고 있었나? 나 스스로 내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고 있었나?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나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준 책이었다. 책을 읽으며, 그리고 읽고 나서도 시원하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 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인 소크라테스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렇다!” 하고 세상에 외친 위대한 철학자였다. 자신의 사상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책을 읽는 내내 양심과 도덕을 마음 한구석으로 슬그머니 밀어놓은 내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길다면 길었던 22년의 삶에서 나는 양심과 도덕의 올바른 기준을 세우지 못한 채 그저 내 앞의 상황에 맞춰서 일관 되지 못한 행동들과 양심을 속이는 행동들로 스스로를 실망시키고 후회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반해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인류의 양심과 정의를 위해 뜻을 굽히지 않았던 위대한 철인 소크라테스. 과연 그는 어떤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을까? 변명에서 나온 두 가지 유명한 명언을 소개하며 이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를 대표하는 말로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 학창시절 그와 관련된 일화를 읽다가 이 격언을 봤을 때는 막연히 스스로의 분수에 맞게  행동해라 혹은 자기 양심을 지켜라 하는 뜻에서 소크라테스가 그의 제자들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며 이 격언에는 생각보다 훨씬 심오한 뜻이 담겨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명언의 유래는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의 신전으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다.” 라는 신탁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철학자로서, 지성을 상징하는 사람으로서 신탁은 그를 우쭐하게 할법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자신을 세상의 이치나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이 부족한 무지의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가장 현명하다고 지목하는 신탁의 모순에 혼란스러워진다.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자신보다 더 현명한, 아테네에서 현명하다고 소문이 난 당시의 정치인이나 학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다면 신탁이 거짓이 되어 자신의 무지의 상태가 현명함의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으므로)

하지만 무릇 그들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현명한 체 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가장 현명하다는 것은 진리에 다가서기에는 보잘 것 없는 인간 지식의 한계를 알고 무지의 각성을 통한 끊임없는 진리의 탐구만이 진정한 현명함의 경지로 가는 길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깨달은 바를 알리기 위한 시험과 논쟁들로 아테네 지식계층인 소피스트들의 공분을 사게 되어, 그를 추종하던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소피스트들의 음해로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전하자 했던 말로 그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격언인 ‘너 자신을 알라’는 수사학적인 말들과 궤변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그것으로 스스로 현명하다는 착각에 빠져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에 소홀했던 지식인들에게 일침을 놓았건 것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진심어린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법정에서 그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며 그들의 오해를 풀고자 했던 위대한 변명을 무시했던 것이다.

나 역시 변명을 처음 읽을 때는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그의 말에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 현명한 것을 구분하지 못해 최근에 다시 정독해 봄으로서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만약 내가 처음 변명을 읽고 책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해 다시 변명을 펼쳐보지 않았다면 나는 소피스트들과 다를 것 없이 단순한 생각으로 내가 변명을 이해했다고 착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직 변명을 읽고 그의 말이 어떤 뜻인지 이해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다시 읽어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무지를 인정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반영하여 군생활 간에도 내가 숙지하고 생각했던 업무와 그리고 생활에 대해서도 이런 무지의 원동력을 바탕으로 내가 아는 것들에 있어 자만하지 않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나의 무지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악법도 법이다.” -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이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대표하는 말이라면 ‘ 악법도 법이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말하고 전파했던 철학을 행동으로 지켰음을 보여주는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대표하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있는 소크라테스에게 그의 절친한 벗인 크리톤이 감옥으로 찾아와 자신의 돈을 써서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라고 설득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테네인들에게 법을 지키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라며 계몽하고 꾸짖는 자신이 아테네의 법을 존중하지 않고 탈옥을 결심한다는 것은 모순적이고 자신이 추구했던 철학이 아니라며 거절한다. 소피스트들의 음해로 누명을 썼지만 자신이 사랑하고 마지막까지 걱정해야할 아테네의 법에 의한 판결을 받은 자신은 그것을 피해서는 안된다는 말로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을 때 소피스트들이 말하는 그의 죄목을 조금이나마 인정하여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다면 분명 사형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 잘못된 점이 추호도 없다고 믿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아테네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기에 재판장에서 비굴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다. 죽움이 두려워 자신이 설교하고 전파했던 사상에 맞지 않는 행동을 보였다면 오늘날과 같은 소크라테스의 위상은 없었을지 모른다. 마지막까지 일관된 태도로 자신의 철학을 지키게 해준 아름다운 죽음이 그를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올라서게 한 것이다.

자신의 국가와 그것을 존재하게 해준 국민들을 위해 자신을 죽게 만든 법조차도 사랑했던 소크라테스를 보면 군인인 나와 비교하게 된다. 나를 존재하게 해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수호를 위해 입대한 나에게 조국과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각오를 다지게 하는 격언인 ‘악법도 법이다.’는  입대한 지금의 나를 위해서, 또 전역 후에도 내가 했던 말들과 내 철학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서 자신의 변명을 마치며 말한다.

“우리는 이제 떠나야 합니다. 각기 자신의 길을 갑시다. 여러분은 살기위하여, 나는 죽기 위하여 어느 것이 옳은가는 오직 신만이 알뿐입니다.” 아테네 소피스트들의 음모로 재판에 올라 결국 사형을 받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받은 판결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조차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누를 수 없었기에 자신 앞에 놓아진 독배를 마치 승리의 축배처럼 마실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의 표지에는 감옥안의 절규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한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손으로는 독배를 잡고 있는 의연한 표정의 소크라테스가 그려져 있다. 처음 책을 잡았을 때 무던히 보이던 이 그림이 책을 덮은 후에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울리는 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수없이 속였던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 앞에서는 도덕과 양심을 지키는 척 했지만 정작 위급한 상황이 되면 그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지 않았던가... 군생활 중에도 눈앞의 것들에 정신이 팔려 가슴속에서 조그맣게 울리던 양심의 목소리를 무시했던 내가 진실로 좀 더 나은 군 생활을 찾길 원한다면 나는 소크라테스의 행동과 말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입 선4★
The Alchemist를 읽고

                                  8연대 3대대 9중대 상병 장 한 빈

 나는 22살이다. 날짜로 환산하면 대략 7,570일, 시간으로 계산하면 약 181,680시간 정도를 살아왔다.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는 이 시간동안 나는 죽지 않고 살아왔다. 다소 부정적이고 음습하게 보일 수 있는 말이지만, 틀리지 않은 표현이다. 현재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죽지 못한 것이 아니라, 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죽지 않는 것일까?

역설적 질문으로 “당신은 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학교 수업시간이나, 사람들과의 대화, TV속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등 여러 곳에서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들의 답은 대게 “죽지 못해서”라던가 “특별한 이유 없이”, “꿈을 이루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정도로 축약 할 수 있다. 전부 옳은 답이다. 개개인에겐 인생에 대한 나름의 분명한 기준들이 있는데 어찌 틀린 답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답에 국한하지 않고 복수의 답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런 답들 중에서 이 책은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 간다” 라는 내 목표를 새롭게 각성시켜줬다.

저자는 흔히들 우리가 말하는 ‘꿈’이라는 것을 ‘자아의 신화’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자아의 신화’는 “젊음의 초입에서 알게 되는 항상 이루기를 소망해오던 그것”이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 있어 나한테 직업이라는 범주의 꿈은 KBS 방송국장이 되는 것이고, 위에서 상기했던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방송국장이 되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방송국장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쉽거나, 편한 일이 아니다. 때문에 젊음의 초입에서 목표를 정했을 때보다 최근(정확히는 책을 읽기 전)에 꿈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많이 식어있었다. 보다 얻기 쉽고, 도달하는 과정이 편한 목표가 더 매력적인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니까. 이러한 사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아의 신화”가 소망되기를 주저하게 만들었고, 실현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패배주의적 본능이 나를 지배하게 만들었다. 결국 최근에 나는 장래희망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고, 그런 고민 속에서 이 책을 만났다.   

이 책의 주인공은 양치기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젊은 청년으로, ‘보물찾기’라는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여행을 떠나게 되고, 그 여정 속에서 나에게 삶의 지표를 제시해줬다. 이러한 지표들은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즉, 인생사는 법을 알려주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의 첫 번째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나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옳고 그름을 판단 할 수 있다고 해서. 옳게만 행동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어떠한 행동이든, 이를 실천함에 있어서 그 결과에 순응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소신 있게 행동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결정에 의해 초래되는 결과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실패가 두려워 어떠한 도전도 하지 않는 인생이야 말로 실패한 인생이다”라는 명언처럼 도전해보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손에 거머쥘 수 없다. 선천적으로 고통 받기를 싫어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포기’와 ‘외면’을 통해 꿈을 포기해 버릴 수는 있지만, 이러한 태도로 자아의 신화를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욕심이 아닐까. 이런 교훈은 나를 용기 있게 만들었고, 꿈을 바꾸거나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다.

두 번째는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자아의 신화’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허나 숱한 실패를 겪게 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지치고 힘에 부쳐 성공의 문턱에서 포기해버리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1,000번 두드리면 되는데 999번에서 포기하면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때문에 우리는 자아의 신화를 이루는 그 순간까지도 평정심을 잃어선 안 되며, 곧 노력의 결실을 맺을 거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 믿음은 용기와는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이며, 삶과의 교감이라고 저자는 내게 역설하고 있다. 우리는 자아의 신화를 이루는 거룩한 과정 속에서, 모든 과정에는 삶이 부여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런 믿음은 나를 신화의 완성까지 인솔 해 줄 것이다. 

마지막 교훈은 ‘실천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떠나는 ‘여정’ 그 자체가 곧 보물이라는 점이다. 용기와 믿음이 결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마지막 교훈은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을 여정으로 묘사한다면, 여정 속에서 숱한 눈보라와 모래폭풍을 맞이하여야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난과 역경은 나로 하여금 보다 성숙하게 만들고, ‘자아의 신화’를 거머쥘 수 있는 자격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아무런 노력과 대가 없이 얻은 보물이 어떻게 가치가 있고, 만족스러울 수가 있겠는가. 어떤 식으로든 인생의 모든 일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을 배우는 건 좋은 일이라고 저자도 글로서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나 역시 책의 주인공처럼 쉽게 자아의 신화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번에 방송국 취직을 못할 수도 있고, 취직 후에도 승진 및 진급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패기 있게 도전해 갈 것이며, 그런 도전들이 모여 나에게 소중한 보물이 될 것이다. 내 인생을 살맛나게 해주는 건 꿈이 실현되리라 믿는 것이고, 또한 실패 했을 때는 이미 ‘여정’이라는 소중한 보물을 얻고 난 후 일 텐데, 결국에 실패하면 어떠랴. 혹여나 장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꿈에 대해 도전하기를 망설이거나 포기하는 전우 및 친구들이 있다면, 이 책을 읽고 모두가 진정한 자신들의 신화를 이루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 중에 ‘마크툽’이라는 말처럼 어쩌면 이 책을 읽은 본인이나, 이 책을 읽을 전우들의 미래는 이미 ‘성공’이라는 결과로 정해졌 있을 것이라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며 글을 마친다.

“신화를 이룩해보자. 이룩하기 위해 꿈꾸고 시도해보자. 저자의 말처럼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가 너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줄지 또 모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