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여의도에 웬 인문학 바람?
어지러운 여의도에 웬 인문학 바람?
  • 정동용 객원기자
  • 승인 2013.09.1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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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품은 황우여vs조정래로 맞선 김한길… 여의도, 인문학 열전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으로 잇따르는 촛불집회… 통합진보당 이석기 국회의원 내란음모혐의 사건으로 맞불을 놓으며 끝내 구속까지 시킨 국정원…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 단식… 민주당 김한길 대표 노숙투쟁… 정기국회 의사일정이 합의되지 않으면 단독 국회를 열겠다는 새누리당…

촛불집회와 이석기 사건으로 나라 안팎이 시끌벅적하지만 여의도 정가에서는 인문학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다. 정국이 이토록 어지러운데, 여의도 정가에 웬 인문학 바람이 부는 것일까. ‘독서의 계절’ 가을이 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라가 어지러운 때일수록 인문학을 더 깊고 폭넓게 공부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여의도 정가에 인문학 바람이 슬슬 불기 시작한 것은 민주당 신학용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5월 ‘책 읽는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면서부터다. 이 모임은 만든 지 두 달여 만에 회원이 40명을 넘는 등 국회의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를 비롯해 유승우·강은희 의원, 민주당 이용섭·최재천·김재윤·도종환 의원 등 여야 의원들이 당을 뛰어넘어 참여하고 있다. 6월 첫 모임에는 그때 개봉한 영화 ‘고령화 가족’ 원작을 쓴 소설가 천명관이 강사로 초청됐다. 7월 모임에는 기자 출신인 소설가 김훈을 초청해 ‘작가로서 본 우리 사회의 모습’을 들은 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신학용 위원장은 ‘책 읽는 국회의원 모임’에 대해 “훌륭한 작가들의 인생관, 세상을 보는 눈을 이해하면 직접 사회를 해부해 볼 기회가 생기고 입법활동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은희 의원은 “역사소설이 의외로 감성적인 면에 도움이 되더라”며 “정보기술(IT) 기업 CEO 출신이라 예전엔 경영서적, 디지털 관련 책들만 들여다봤는데 김훈 작가의 책을 읽으니 잠시 다른 세상으로 빠져나갔다가 오는 것 같아 매료됐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김세연 새누리당 의원은 요즘 친분 있는 당내 의원들 몇 명과 뜻을 모아 공부모임을 만들었다. 주요 테마는 ‘인문학 고전’. 김 의원은 “세계 주요 명연설과 선언, 국제협약, 헌법재판소 결정 등을 기본 삼아 공부한 이후에 인문학 고전 읽기로 범위를 넓혀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인문학을 통해서 정치 현안에 대한 시각을 더 깊게 만들어 가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는데 여름휴가 시즌이 끝나고 참석하는 의원들이 훨씬 더 늘어나고 있다”며 “고전 읽기 목록은 ‘서울대 선정 인문학 고전 50선’을 참고해 결정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국회의원들이 대출한 인문교양 1위,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국회도서관은 9일(월), 지난해 4월 11일부터 지금까지 국회의원들이 많이 대출한 인문교양 분야 도서 20권을 뽑았다. 그 결과 1위는 제임스 길리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가 차지했다.

2위는 장하준 교수 <나쁜 사마리아인들>, 3위는 로버트 B 라이시 <슈퍼 자본주의>. 올해 서정태(서정주 동생) 시인이 27년 만에 펴낸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 무라카미 하루키 베스트셀러 <1Q84>, 홍석중 소설 <황진이> 등도 국회의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법륜 스님 주례사를 모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남녀 마음 이야기>,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면 여야 지도부가 요즘 읽었고, 주변 국회의원들에게 권하는 인문학 책들은 무엇일까. 독실한 크리스천인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성경과 정도전 문집인 <삼봉집>, 필립 페팃 번역서 <신공화주의>를 추천한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메이커스>, <생각에 관한 생각>, <정글만리>다. 김 대표는 노숙투쟁을 벌이고 있긴 하지만 손에서 인문학 책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 김 대표 측근들은 “베스트셀러 소설가였던 만큼 신간은 두루 섭렵하는 편이고 책 읽는 속도도 굉장히 빠르다”고 귀띔했다.

강창희 국회의장은 평소 옆구리에 시집을 끼고 다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강 의장은 “강팍한 정치현장에서 심신을 달래 주고 삶의 해법을 찾아 주는 것은 순수 시”라고 못 박는다. 그는 장석주 시인이 쓴 ‘대추 한 알’, 김용석 시인이 쓴 ‘가을이 오면’을 즐겨 읽는다. 정몽준 전 새누리당 대표는 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을 늘 읽는다.

국회 사무처가 의원 및 1급 이상 국회 공무원을 대상으로 해마다 문을 여는 ‘인문학 최고지도자 과정’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지난 2011년 9월, 12주 과정으로 처음 문을 열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국회의원 38명이 신청했지만 지난해에는 51명으로 늘었다.

문화부장관을 지낸 4선인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정치권이 뒤늦게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정치가 가장 후진적’이라는 비판도 한몫했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 세상이 권력의 힘으로 장악됐다면 이제는 정보의 힘으로 장악된다”며 “인문학의 가치·철학적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면 빛의 속도로 변하는 기술변화 과정도 따라잡을 수 없고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고 귀띔했다.

인문학 책은 초·재선 의원들에게도 인기다.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은 “인류의 경험과 지혜가 녹아 있는 인문학에서 사회를 조정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찾기 위해 인문학 서적을 접한다”고 털어놨다. 같은 당 민현주 의원은 “인문학은 사회 현안을 최종 조율하는 역할을 하는 정치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해답을 준다”고 덧붙였다.

그래. 어쨌든 국회의원들이 책, 그것도 인문학 책을 많이 읽는 일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지난 2005년 미국도서관협회 연차대회 연설에서 “도서관은 항상, 보다 큰 세계에 연결되는 창으로 계속되어 왔다”며 “도서관은 미국 역사를 전진시키는 도움이 되는 큰 아이디어나 깊고 넓은 컨셉을 찾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방문하는 장소”라고 못 박은 바 있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