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정이처럼 쇠퇴해가는 노년의 몸, 그러나 마나님의 손길이 닿으면 그건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 마나님은 마치 자기만 아는 예쁜 오솔길을 걷듯이 추억을 아껴가며 영감님의 등을 정성스럽게 씻긴다. 물을 한꺼번에 좍좍 끼얹어도 안 되고, 너무 찬물도 안 된다. 영감님에게 맞는 등물은 자기만 알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에 마나님은 이 시간이 마냥 기쁘고 행복하다.”-‘예쁜 오솔길’에서)
소설가 박완서(1931~2011) 산문집 <노란집>(열림원)이 나왔다. 이 산문집에는 작가 박완서, 그가 살아온 ‘노란집’에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특히 숨겨진 보석 같은 짤막한 소설들 한 편 한 편 속에는 삶을 다 옮겨놓은 듯한 이야기가 마치 작가 박완서가 옆에서 동화를 들려주는 것처럼 정겹다.
<노란집>은 고 박완서 82회 생일을 기리는 때 나와 더욱 눈길을 끈다. 이 ‘노란집’에서 작가 박완서는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오곡백과를 익히는 가을햇살처럼 비추고 있다.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도 아늑한 글들, 그 글 하나하나를 마주 읽는 것만으로 그리운 작가, 박완서 실루엣이 절로 어른거린다.
이 산문집에는 ‘행복하게 사는 법’,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 ‘내리막길의 어려움’,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쓴다’, ‘황홀한 선물’ 등 산문 40여 편과 ‘그들만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을 매단 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열림원은 “이 책에 실린 산문과 소설은 모두 단행본으로 묶인 적이 없는 글들”이라고 못 박았다.
이 산문집에 실려 있는 짧은 소설은 2001~2002년 열림원이 만든 계간지 <디새집>에 실렸다. 원고지 2~3장쯤 되는 짧은 이야기 13개가 고리처럼 이어진 이 소설은 자식을 키워 도회지로 내보내고 시골에서 황혼기를 보내는 노부부가 주인공이다. 영감님과 마나님이 봄기운도 함께 맞고 혼자 굴비살 발라먹은 것도 타박하며 보내는 소박한 삶 사이로 긴 세월 땅을 일궈 자식을 키워낸 묵묵한 수고가 일렁인다.
“이 잡는 풍경까지도 그립게 만드는 유머 감각”
“이 글 속 영감과 마나님의 일상을 행복하다거나 복이 많다거나 하기에는 너무 안일한 표현일 것 같다. 그 행복은 영감님 등떠리의 지게 자국이나 흘린 땀의 농도처럼 깊이를 알 수 없다. 어쩌면 누추해 보일 수도 있는 노년의 삶을 때로는 쾌활한 다듬잇방망이의 휘모리장단으로 때로는 유장하고 슬픈 가락으로 오묘한 풍경 속에 보여준다. 어머니가 애써 선택한 마나님이라는 호칭이 마땅한 존칭임을 알기에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진다.”-호원숙, ‘서문’에서
작가 박완서 딸 호원숙은 서문에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어머니가 2000년대 초반부터 아치울 노란집에서 쓰신 글”이라며 “이 잡는 풍경까지도 그립게 만드는 유머 감각과 새우젓 한 점의 의미까지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철저함을 느끼고 따를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경쾌함과 진지함의 균형 감각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를 마음 깊이 아끼고 존경한다”고 적었다.
“봄이 얼마나 잔인한 계절이라는 걸 노부부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봄기운이 시키는 대로 한다. 영감님은 오늘처럼 밝은 햇볕 속에서 베갯모 수를 놓고 있는 처녀를 담 너머로 훔쳐보던 옛날얘기를 한다. 마나님은 귀가 좀 어둡다.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미루어 저 영감이 또 소싯적 얘기를 하나 보다 짐작하고 아무러면요, 당신 한창땐 참 신수가 훤했죠, 기운도 장사고. 이렇게 동문서답을 하면서 마나님은 문득 담 너머로 자신을 훔쳐보던 잘생긴 총각과 눈이 맞았을 때처럼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렇게 되면 이건 동문서답이 아니다. 아무려면 어떠랴. 지금 노부부를 소통시키고 있는 건 말이 아니라 봄기운인 것을.”-‘속삭임’에서)
작가 박완서는 1931년 경기 개풍에서 태어나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중퇴했다. 1970년 마흔이 되던 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등을 펴냈다.
소설집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이 있으며,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살아 있는 날의 소망>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어른 노릇 사람 노릇>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이상문학상·대한민국문학상·이산문학상·현대문학상·동인문학상 등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