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나온책] 이 잡는 풍경까지 그립게 한 어머니
[새로나온책] 이 잡는 풍경까지 그립게 한 어머니
  • 유시원 객원기자
  • 승인 2013.09.1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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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완서 산문집 <노란집> 나와… 짧은 소설도 실려

“삭정이처럼 쇠퇴해가는 노년의 몸, 그러나 마나님의 손길이 닿으면 그건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 마나님은 마치 자기만 아는 예쁜 오솔길을 걷듯이 추억을 아껴가며 영감님의 등을 정성스럽게 씻긴다. 물을 한꺼번에 좍좍 끼얹어도 안 되고, 너무 찬물도 안 된다. 영감님에게 맞는 등물은 자기만 알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에 마나님은 이 시간이 마냥 기쁘고 행복하다.”-‘예쁜 오솔길’에서)

▲소설가 박완서
소설가 박완서(1931~2011) 산문집 <노란집>(열림원)이 나왔다. 이 산문집에는 작가 박완서, 그가 살아온 ‘노란집’에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특히 숨겨진 보석 같은 짤막한 소설들 한 편 한 편 속에는 삶을 다 옮겨놓은 듯한 이야기가 마치 작가 박완서가 옆에서 동화를 들려주는 것처럼 정겹다.

<노란집>은 고 박완서 82회 생일을 기리는 때 나와 더욱 눈길을 끈다. 이 ‘노란집’에서 작가 박완서는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오곡백과를 익히는 가을햇살처럼 비추고 있다.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도 아늑한 글들, 그 글 하나하나를 마주 읽는 것만으로 그리운 작가, 박완서 실루엣이 절로 어른거린다.

이 산문집에는 ‘행복하게 사는 법’,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 ‘내리막길의 어려움’,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쓴다’, ‘황홀한 선물’ 등 산문 40여 편과 ‘그들만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을 매단 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열림원은 “이 책에 실린 산문과 소설은 모두 단행본으로 묶인 적이 없는 글들”이라고 못 박았다.

이 산문집에 실려 있는 짧은 소설은 2001~2002년 열림원이 만든 계간지 <디새집>에 실렸다. 원고지 2~3장쯤 되는 짧은 이야기 13개가 고리처럼 이어진 이 소설은 자식을 키워 도회지로 내보내고 시골에서 황혼기를 보내는 노부부가 주인공이다. 영감님과 마나님이 봄기운도 함께 맞고 혼자 굴비살 발라먹은 것도 타박하며 보내는 소박한 삶 사이로 긴 세월 땅을 일궈 자식을 키워낸 묵묵한 수고가 일렁인다.

소설가 박완서 산문집 <노란집>(열림원)
“이 잡는 풍경까지도 그립게 만드는 유머 감각”

“이 글 속 영감과 마나님의 일상을 행복하다거나 복이 많다거나 하기에는 너무 안일한 표현일 것 같다. 그 행복은 영감님 등떠리의 지게 자국이나 흘린 땀의 농도처럼 깊이를 알 수 없다. 어쩌면 누추해 보일 수도 있는 노년의 삶을 때로는 쾌활한 다듬잇방망이의 휘모리장단으로 때로는 유장하고 슬픈 가락으로 오묘한 풍경 속에 보여준다. 어머니가 애써 선택한 마나님이라는 호칭이 마땅한 존칭임을 알기에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진다.”-호원숙, ‘서문’에서

작가 박완서 딸 호원숙은 서문에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어머니가 2000년대 초반부터 아치울 노란집에서 쓰신 글”이라며 “이 잡는 풍경까지도 그립게 만드는 유머 감각과 새우젓 한 점의 의미까지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철저함을 느끼고 따를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경쾌함과 진지함의 균형 감각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를 마음 깊이 아끼고 존경한다”고 적었다.

“봄이 얼마나 잔인한 계절이라는 걸 노부부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봄기운이 시키는 대로 한다. 영감님은 오늘처럼 밝은 햇볕 속에서 베갯모 수를 놓고 있는 처녀를 담 너머로 훔쳐보던 옛날얘기를 한다. 마나님은 귀가 좀 어둡다.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미루어 저 영감이 또 소싯적 얘기를 하나 보다 짐작하고 아무러면요, 당신 한창땐 참 신수가 훤했죠, 기운도 장사고. 이렇게 동문서답을 하면서 마나님은 문득 담 너머로 자신을 훔쳐보던 잘생긴 총각과 눈이 맞았을 때처럼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렇게 되면 이건 동문서답이 아니다. 아무려면 어떠랴. 지금 노부부를 소통시키고 있는 건 말이 아니라 봄기운인 것을.”-‘속삭임’에서)

작가 박완서는 1931년 경기 개풍에서 태어나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중퇴했다. 1970년 마흔이 되던 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등을 펴냈다.

소설집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이 있으며,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살아 있는 날의 소망>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어른 노릇 사람 노릇>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이상문학상·대한민국문학상·이산문학상·현대문학상·동인문학상 등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