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설희, 맨발 인터뷰] 한국문단 산 증인, 강민 시인
[시인 박설희, 맨발 인터뷰] 한국문단 산 증인, 강민 시인
  • 인터뷰 박설희 시인
  • 승인 2013.09.13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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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술을 같이 마시는 게 진짜지'

문단에 강민 밥·술 안 얻어 먹은 사람 없어

이 글은 (사)한국작가회의 회보에 '나는 문학을 살았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인터뷰 글입니다. 회보는 한국작가회의 회원들만 볼 수 있는 소식지여서,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일간 문예뉴스 [문학in]에 실어 여러 독자들에게 선보입니다. -편집자 주

 

가장 좋아하는 시인 조지훈
마지막 휴머니스트’. 누군가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강민 시인을 만나기 전부터 어떤 분인가 궁금했다. 한국 문단사에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강민 시인에게 여쭤 보라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명동성당 길로 발길을 옮긴다 / 길모퉁이, 여기쯤이던가 / 이산 김광섭 선생이 내시던 문예지 <자유문학>사가 있었지 / 편집을 하던 이는 시인 김시철, / 또 다음에는 소설가 박용숙이었던가 / 거기를 통해 / 남정현, 최인훈, 송혁, 남구봉, 권용태, 황명걸 등이 등단했고 / 아니지 결국 나도 그리로 등단하지 않았던가 (중략) 소금으로 안주를 삼고 동동주라는 카바이트술을 마시던 / 언덕배기의 <몽파르나스>는 이일 시인의 명명이었던가 / 이현우가 자주 노숙을 한 공원이었던 / 제일백화점 자리는 흔적도 없고 / 그 앞에 있던 음악 감상실 <돌체>, <엠프레스> -강민, 「명동, 추억을 걷는다」 부분

모 예대 교수는 위의 시를 한국문단사 강의자료로 쓴다던가. 강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미로에서』는 자신보다 먼저 정보과 형사가 출근해 기다리던 1970년대 상황, 을지로 입구 내무부 청사 앞 4․19 혁명의 모습, 6․25 때 장정 소개령에 끌려가던 모습, 생과 사를 오가며 투병하던 젊은 시절 등이 그대로 담겨 있다.

“박봉우, 민영, 신동엽, 김관식, 천상병 시인 등과 친했어요. 김수영 시인은 연배가 높아 개인적으로 접촉이 별로 없었고요. 이현우, 김관식, 천상병은 명동 3대 기인이라 불리는데 그 중 이현우는 아폴리네르 투의 시를 썼어요. 소설가 김말봉 선생의 의붓아들이지요. 대학 일 년 선배로 「끊어진 한강교에서」를 내가 뺏어다가 『자유문학』에 발표했는데 그게 그의 출세작이 됐어요.

방랑벽이 있어 명동 아무 데서나 자며 떠돌아다니다가 1980년대 초반에 거리에서 행방불명 됐어요. 시집도 한 권 없이 사라져 내가 무수막 출판사를 경영할 때 시문집을 발간해줬어요. 친구 21인이 이현우에 관한 글을 써서 문집 뒤에 실었지요.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죽지 않았나 생각해요.”

다음은 박봉우 시인으로 이어진다. 박봉우 시인은 어렵게 살았는데 죽기 한 달 전쯤 애들을 데리고 찾아와 점심을 함께 먹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아저씨를 찾아와 상의해”라고 했다는 것. 그리고 강민 시인이 일본출장 간 사이에 숨을 거두었고 돌아와 보니 장례도 끝나고 연락이 끊어졌다.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 영도동인인 강태열 시인 출판기념회에 갔더니 박봉우 시인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다. 그 아들이었던 것.

▲문단 뒷 이야기에 열정을 쏟아내는 강민 시인. 사진=김이하

-문인 중에 누구를 가장 좋아하세요?

“조지훈 시인을 가장 좋아해요. 미당과 조지훈 시인의 가르침을 받았어요. 내가 동국대 들어가니 조지훈 선생이 시를 가르치고 계셨는데 강의에 일이십 분 늦게 들어와 일이십 분 빨리 나가셔서 건방지게도 강의 똑바로 하라고 말씀드렸어요. ‘너는 내 얼굴을 보는 것만도 영광이야. 내가 너한테 시를 이렇게 쓰고 저렇게 쓰라고 말하는 거는 가짜야. 만나 술을 같이 마시는 게 진짜지.’ 대단한 가르침이었어요. 우리 마누라가 나랑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조지훈 선생의 덕이었지요.

미당 선생이 사람들을 많이 추천할 때였는데 ‘너는 글을 왜 안 가져와’ 하기에 ‘선생님 이쁜 여자애들 팔짱 끼고 다니고 남자들은 술병 들고 가면 추천해주던데 나보고 그러란 말이요?’ 했더니 선생이 눈이 이만해 가지고 ‘이 피라미야, 너 세상에 정실이 얼마나 좋은 건줄 알아? 난 이쁜 애가 좋거든? 같은 값이면 너처럼 건방지게 안 가져오는 놈보다는 술병 들고 찾아와 원고 좀 봐달라고 하는 놈이 더 좋거든? 사람 사는 게 그런 거지. 너처럼 가져오지도 않는데 찾아다니면서 해주냐?’

결국 미당 선생에게서 추천 못 받고 조지훈 선생에게도 추천 못 받고 김광섭 시인이 하던 『자유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친구들에 비해 뒤늦게 등단했지요. 우리가 미당 욕을 많이 하지마는 나는 탁 터놓고 얘기하는 부분이 괜찮더라구요.”

-미당의 친일 행각은 어떻게 보십니까?

“친일행각은 구분해야지요. 이광수, 최남선은 강요를 받은 거지만 서정주, 모윤숙, 조연현은 자발적인 거예요. 미당이 친일 시 쓸 때엔 이삼십 대의 젊은 나이였어요. 일제가 강제로 이런 시를 쓰라고 할 리가 없어요. 미당 선생은 해바라기처럼 향일성이 있어요. 이승만 정권 때 문교부 예술과장으로 있으면서 이승만 자서전을 써주려고 했지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이원수 선생 돌아가셔서 문상 후 바로 밑에 미당 선생 집이 있어 신경림과 함께 인사차 갔더니 매우 좋아했어요. ‘선생님, 우리 시의 최고봉이시니 제발 가만히 시만 쓰세요.” 했더니 “아, 그래야지. 앞으로 그럴라네.’ 그 삼일 후에 전두환이 단군 이래 성군 운운하며 티비에 나왔지요. 그 다음부턴 안 찾아갔어요. 아버지가 부통령 지낸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는데 그게 머슴이거든요. 집안이 어렵게 살아서 한이 맺혔나 봐요.”

-조지훈 시인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면요?

“지사적 풍모지요. 「지조론」에서 보듯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거. 우리나라 최초의 종군문인단 ‘창공클럽’이 있었어요. 단장 마해송, 부단장이 조지훈 선생인데 그 무렵 「다부원에서」라는 시를 썼어요, 종군작가는 대부분 반공이 주내용인데 「다부원에서」를 읽으면 유일하게 반공이 없어요. 피아 없이 슬픔을 느끼는 인간적인 시를 썼지요. 그 점도 좋아요.”

강민 시인. 사진=김이하
-사람 중심의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추구하신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요?

“두레정신이 있어요. 농사를 짓다가 느티나무 아래 사람들이 모이지요. 대개 그곳에선 마을이 내려다보여요. 저녁에 굴뚝에 연기가 안 나는 집이 있으면 저 집에 곡식이 떨어졌구나 알고서 곡식을 모아서 갖다 주며 살았는데 그게 두레고 정자나무지요. 새마을운동하며 그걸 다 없애버렸어요.

도로 닦고 초가 허물고 그걸 근대화라고 하지요. 냉장고와 티비가 집안에 들어가면서 정자나무 아래 모임이 없어졌어요. 집 밖으로 안 나와요. 농촌이 붕괴된 거지요. 예부터 지켜왔던 두레 정신이 이어졌다면 더 따뜻한 농촌이 됐을 거예요. 거기서 인간이 없어졌어요. 남북문제만 해도 그래요. 간단히 해결될 것 같지 않아요? 오늘도 격이 안 맞아서 어쩌고? 그런 심보로 남북이 어떻게 만나요.”

‘독서회’로 인해 고초를 겪은 일을 듣는다. 9․28수복 때 학련(전국학생연합)에서 잡으러 와서 무조건 사흘을 두드려 팼다. 빨갱이니 불라고 했다. 광복 됐을 때 중1이었는데 ‘독서회’에 가담했다는 게 이유였다. 45년과 50년 사이에 집안이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다말다 했는데 말 그대로 책 읽는 모임인 줄 알았던 것.

학련 간부 중 이태준 조카가 교회를 같이 다녔는데 두 집안 어머니들이 친한 덕분에 그 애가 보증해주고 “대한민국 만세”라고 혈서 쓰고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독서회’는 일제 때 항일독립운동을 했는데 사회주의계열이었다.

사람 하나 죽어도 그만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원해서 군대 갔다. 그리고 전쟁 중에 잊지 못할 두 사람을 만난다. 경안리 주막에서 “우리 죽지 말자.”며 손 내밀던 인민군 병사, 다 죽어가는 그에게 농사지을 씨감자를 쪄주며 “살아남아야 한다.”고 당부하던 생면부지의 할아버지.

그렇게 살아남아 한국현대사를 거치면서 동시대 문인들에게서 ‘대형’으로 호칭된다. 잘못 가고 있는 세상을 외면하고 쓰는 시는 가짜다, 차라리 뒤에서 친구들을 돕자고 살았던 것. 그래서 강민 시인에게 밥을 안 얻어먹은 시인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 운동권 출신 학생이거나 형편이 어려운 문인들은 출판사에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 자리를 많이 마련해주었다. 그렇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강태형 문학동네 사장 등과도 인연을 맺었다. 문단의 산 증인으로서 힘들고 암울한 시기에 문인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고 그것이 끝내 오래 몸담았던 금성출판사를 떠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늘 쓰고 다니던 모자를 벗어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노조원들과 함께 금성출판사를 떠나는 과정에 겪었던 우여곡절이 하도 많아 스트레스 때문에 숱 많던 앞머리가 듬성듬성해졌다고.

요즘 「인사동 아리랑」연작을 쓰고 있는데 한국의 장터를 찍는 조문호, 정영신 부부 사진작가가 시사전(시와 사진의 만남)을 하자고 요청해 ‘아리랑 연가’ 전시회를 가을에 열기로 약속했다. “나는 문학을 하지 않고 문학을 살았다.”는 말에서 격동의 역사를 살아오는 동안 시작에 전념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리고 후배작가들에게 ‘사람을 잊어버리지 말자’는 당부를 남긴다. 옆에 밥 굶고 있는 사람 있는데 시만 잘 쓰면 뭐 하냐는 일침도 잊지 않는다. 또 그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너무 이거 아니면 저거라고 딱 가르지 말라는 것. 일단 수용하고 대화를 나눠 공통점을 찾아야 해결점이 나온다고.

인사동 뒷골목 포도나무 그늘에서 기념촬영을 하는데 전후 명동시대와 그 뒤를 이은 70년대 관철동 시대, 80년대 인사동 시대를 거치면서 문인들이 나누었던 인간애와 에피소드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다. ‘시대와 인간’이 화두였다는 강민 시인의 말과 함께.

*시인 박설희는 2003년 계간 <실천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이 있다. 지금 사)한국작가회의 회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