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윤동주 사촌 송몽규와 연희전문문학지 [문우]
[단독]윤동주 사촌 송몽규와 연희전문문학지 [문우]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 승인 2013.10.0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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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서 문학청년으로서 고뇌와 나라 잃은 슬픔을 문학을 통한 저항으로

지난 9월28일은 간도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연희전문대 졸업 후, 교토제국대 유학 중에 치안유지법 혐의로 사촌동생인 윤동주 시인과 20대에 후쿠오카 형무소서 옥사한 송몽규의 만96세 생일이었다.

   
▲오른쪽이 송몽규

송몽규와 윤동주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같은 집에서 태어나서 같은 형무소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일제강점기 공간의 비극적인 희생이었다.

성큼 다가온 가을 바람 속에서 그들의 짧았던 삶 속에 문학 청년으로서의 꿈을 키우던 연희전문대 시절에 그들이 적었던 [문우] 속의 기억을 되새겨본다.

참고로 윤동주 시인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작품집 등이 널리 알려져 있고, 일본에서도 양심적인 일본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곳곳에서 추모기념을 개최하고있고, 다양한 형태의 관계 시설이 개관 되는 등, 움직임이 활발하기에 여기서는 그의 고종사촌형이자 문학청년이었고 독립운동에 참가했었던 송몽규를 떠올리며 그가 잡지 후기를 적었던 [문우]에 대해서 소개하려 한다.

 

   
▲연세대 내에 있는 윤동주 시비. 아쉽게도 송몽규에 대한 조형물은 없다.

송몽규는 1917년9월28일 간도성 연길현 용정신촌 명동(間島省 延吉縣 龍井新村 明東,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윤하현 장로 집 맏 딸인 윤신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치안유지법 혐의의 재판 판결문에는 본적이 조선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 422번지(朝鮮咸鏡北道慶興郡雄基邑雄尚洞四百二十二番地)로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12월에 윤신영의 동생이자 윤하현의 외아들인 윤영석도 아들을 낳으니 그가 윤동주였다. 그들은 집 주변의 미루나무 사이로 비치는 맑은 하늘처럼 티없이 순수하게 자라며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 소년으로 성장했다.

다섯 살까지 같은 집에서 자란 둘은 향후 서울의 연희 전문학교와 교토 유학 생활, 그리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옥사 때 까지 생애의 동반자이자 운명적 존재로 살다 간다.

송몽규는 여덟 살 때 윤동주, 문익환 등과 현지의 명동소학교(교장은 외숙부였던 김약연 선생)에 입학, 월간잡지 [아이 생활]을 구독하였다. 그 뒤, 화룡현립 제1 소학교 6학년에 편입 후 1년동안 한족학교에 다니다 1932년 4월에 은진 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송몽규는 문학 활동 및 학업에 열중하게 되고, 1934년(은진중학 3학년) 12월에는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꽁트부문에 [숟가락]이 송한범이란 필명으로 당선되어 당시의 고향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한편, 은진중학에서 동경제대 사학과 동양사학 출신으로 민족 의식이 강했던 명희조 선생의 영향도 받게 된다. 명희조가 다녔던 당시의 동경제대엔 제국주의 비판과 민주주의 의식이 강한 계몽적 사상운동이 전파되고 있었다. 일본이 패전할 때 까지 학생운동의 중핵적이었던 [신인회]엔 조선인 학생 김두용 등도 활동했다. 그런 민족의식이나 신념이 강한 지식인운동의 흐름에 영향을 받았던 명희조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송몽규는 1935년에  남경의 김구 산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반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는다. 그 뒤, 제남(済南) 소재의 이웅일 산하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다 1936년 4월경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본적지인 웅기 경찰서에 구류되어 취조를 받은 뒤, 같은 해 8월에 석방되지만 경찰로부터 [요시찰인]이란 낙인을 받고 일제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

 

   
▲윤동주 기념관에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는 필자.

1936년 8월에 석방된 송몽규는 다음해 4월 용정의 대성중학교에 입학 후 문학 활동 및 학업에 열중하였고, 1938년에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함께 문과에 입학한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1938년의  8월에 적은 시를 9월12일『조선일보』에 《밤》이란 제목으로 당시의 어두웠던 제국주의 지배하의 조선 민족의 굴하지 않는 희망을 시사하는 글을 발표하는 등, 문학적 재능을 나타낸다.

또한, 연희전문대 문과학생회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1932년에 창간)를 이어받은 송몽규는 문예부장으로 활동했는데, 시대의 압박으로 마지막호 발간이 되는 1941년판 [문우]에서는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부러](목차에는 [하늘과 더브러]로 표기)를, 윤동주는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발표했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나중에 일본 유학을 하게되는 강처중(姜処重)이 되어 있다.

잡지 광고는 주로 서점 및 양복점,학교지정 운동구 판매점 등의 광고이고, 서문에는 명예 교장(총장)인 Horace H.Underwood 의 메시지가 게재되어 있다.

詩는 한글로 표현되어 있으나 나머지 글들은 전부 일본어로 적혀져 있다.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 금지, 조선의 민간 언론이 폐간을 당하던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그나마 [시]의 표현적 특성상 한국어가 아니면 감정적 토로가 한계가 있었기에 그대로 사용이 인정된 것 같다. 그렇기에 짧은 시 속에 내포된 의미 해석이 중요하다.

발행 후기에는 송몽규의 폐간 인사 및 발간 과정의 고충을 암시하는 글들이 게재되어 있다.  1941년 6월에 발행한 연희전문학교 문우회 문예부의 [문우](비매품)의 폐간 후기를 담당한 송몽규의 복잡한 심경이 응축된 후기 문장을 소개하기로 한다.

원문은 당시 시대를 반영한 일본어 문장으로 되어 있다(번역은 필자).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받고 싶다. 국민 총력 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서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연세대 핀슨홀의 [윤동주 기념실]에 소장 중인 연희전문 시절의 교내 문학잡지인 [문우]표지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

이 내용을 읽다보면 문학을 사랑했던 그였기에 숱한 고생 속에 겨우 모았던 원고 대부분이 검열에 걸려서 게재 불가능이 되었던 사실과, 식민지 공간 속에서 총력전의 군국주의 체제 강화로 인해 교우회 발행의 [문우] 최종호로 그들이 해산하지 않으면 안되는 억압속의 현실이 더더욱 서글프게 느껴졌음을 행간에서 엿볼 수 있다.

   
▲표지 다음 페이지의 삽화

그들이 보인 마지막 저항이었다면  [문우] 앞 페이지의 강가에서 어머니가 빨래를 방망이로 두드리는 삽화(엄달호 작)가 아니었을까?

필자가 지난 2013년6월의 미국 강연에서도 역설했듯이 이 삽화는 한민족의 어머니가 흘러가는 시대의 흐름(흐르는 강물) 속에서 일제 강점기의 참혹한 지배통치행위를 빨래 방망이로 두드리는 터프한 모습으로 은유한 삽화라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존재는 민족의 자존이고, 흐르는 강물에 군국주의 정책의 모순과  침략지배 속에서 파생하는 갖은 때를 씻어 내리는 정화 작업을 어머니가 하고 있는 그림을 최종호에 장식했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조선의 소박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가장 희망적인 메시지로 저항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문우] 표지에는 ‘총력으로 구축하여 밝은 신동아(総力で築け明るい新東亜)’라는 슬로건이 적혀져 있고, 잡지 앞쪽의 삽화 옆에는 ‘황국시민의 서사(皇国臣民の誓詞)’가 게재되어 있는데, 여기서 이미 당시의 전시체재를 강화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기에 검열에 통과되기 위해서는 황국시민의 서사를 넣긴 하였으나 바로 옆에 그들의 강한 저항 의식이 내재된 삽화를 자연스럽게 넣으면서 자신들의 희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아픔이 어떠했을지는 근대사 공간 속의 아픔들을 규명해 온 필자에겐 절실히 다가온다.

2005년의 10월에 필자의 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대학원의 자매결연 체결로 연세대를 방문했을 때, 필자가 윤동주 시비를 보고싶다고 했더니 당시의 교육대학원 원장님 및 관련 교수들이 안내를 해 주셔서 처음으로 윤동주가 다녔던 캠퍼스 공간에 젖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윤동주 시비 바로 뒤에 송몽규가 재학 중에 묵었던 핀슨홀이 있고, 그 건물 2층에 [윤동주 기념실]이 있다.

이 동인지 [문우] 1941년호는 필자가 2011년8월23일에 연세대 국학자료실 서고에 소장되어 있을 때 대학측 협력으로 내용을 제공받았으나, 지금은 핀슨홀의 [윤동주 기념실]에 소장 중이다. 그 곳에는 송몽규와 윤동주가 학창시절에 찍었던 사진 등 많은 자료들이 그들의 기억을 더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