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김운미 교수] “무용단 20주년 공연, 춤·미디어아트·테크놀러지 융합된 퍼포먼스”
[인터뷰-김운미 교수] “무용단 20주년 공연, 춤·미디어아트·테크놀러지 융합된 퍼포먼스”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정리-최영훈 기자
  • 승인 2013.10.19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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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예술쪽으로 치우친 현 세태 안타까워”

 

한국 무용계의 큰 축으로 당당히 자리 잡은 김운미 한양대학교 예술학부 교수. 교훈적이고 사실적인 주제들을 우리 춤사위로 풀어내고 형상화해 예술인으로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중이다. 또 한국 최초로 대학교 내 부설 우리춤연구소를 발족하여 후학 양성과 더불어 예술에 대한 학문적 성과를 이뤘다.

김 교수는 전통의 기본 춤사위를 바탕으로 독창성과 보편성을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며 동시대에 부합하는 한국 창작 춤을 발전시켰다. 특히 대중적인 삶의 궤적들, 그 중에서도 한국의 특수한 여성적 삶의 여정을 현대적 관점으로 풀어냈고, 질곡의 역사 속에서 나라에 대한 사랑과 애국선열의 삶을 이야기해왔다. 또한 한국창작무용계에서 처음 '옴니버스 형식'이라는 독창적 예술형식을 시도하고 '다큐댄스(documentary-dance/기록춤)'라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냄으로써 사회의식을 일깨우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다양한 성과의 시작을 더듬어 보면 1993년 무렵으로 올라가야 한다. 김운미 무용 인생은 1993년 김운미 무용단을 창단하면서 또 다른 전기를 맞이했다. 무용가로서 착실히 경력을 쌓던 그에게 후학 양성의 기회가 주어졌고, 춤의 학문적 탐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이다. 그로부터 20년. 김운미 무용단 20주년 기념공연을 앞두고 김 교수의 성장 배경과 예술적 역량, 학문적 성과를 정리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김운미 무용단의 첫 출발지는 '호암아트홀'이었다. 오는 11월9일 20주년 특별 공연을 갖는 무대도 호암아트홀이라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김운미 교수

가장 의미 있는 곳에서 공연을 하게 돼 정말 감격스럽다. 이번 공연 또한 20년 전 첫 공연과 상당 부분이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둘 다 새로운 실험에 의한 '융합'으로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993년 공연은 한국 창작 무용과 서양 라이브 음악이 최초로 만난 공연으로서의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이번 20주년 기념 공연 또한 한국 전통춤사위에 미디어아트, 테크놀러지가 만난 융합의 장(場)이다. 20년 전 그 장소에서 당시와 같은 맥락으로 새로운 것들의  결합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 두 공연 모두 내가 승무를 선보이면서 판을 벌린다는 점이 동일하다. 제자들이 중심이 된 무대지만, 전통춤을 보여줌으로써 생소할 수 있는 무대에 대한 관객과의 거리감을 좁히기 위한 역할이다.

관객에게 한국 전통 춤사위의 복합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싶었다.

▲ 신화상생-가을

-20주년을 맞이한 무용단의 여정, 그 출발점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다.

1993년 첫 공연 당시 사회는 남아선호사상이 한참 심각할 때라 남녀성비 불균형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런 문제를 다루고 싶었고, 또 내가 직접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느꼈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 제시였다. 고부간의 갈등과 여성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는, 여성 스스로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과는 시대를 둘러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교수가 된 이후 첫 작품이라 소재를 여성으로 하여 되짚어보고 싶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한국무용의 대외적 활동이 많던 시절이 아니라 학교에서 대외  활동을 요구했고, 학생들 또한 공연에 대한 열망이 매우 컸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공연을 선물하고 싶었다.

강은구 음악감독과 함께 비올라·첼로 등 악기를 이용해 서양음악을 라이브으로 연주하며 무용수와 공연을 했고, 고인이 되신 한상근 선생님(전/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 2013년 별세)이 기본적인 지도를 맡아 스파르타식 교육을 해서 학생들을 전문 무용수로 이끌어주셨다. 새로운 기법을 표현해줄 연출이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외국에서 돌아오신 지 얼마 안 된 황두진 선생님(현/ 서울예술대학 공연창작학부장)이 맡아주셔서 걱정을 덜었다. 특히 무대장치와 조명에 뛰어난 식견을 지니신 분이라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학생들이 반주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국춤사위를 서양음악에 맞춰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고, 반주 강사가 정착되지 않았을 시기라 1년 가까이 무용가와 반주가 함께 연습을 통해 음악적 리듬과 감각을 느끼게 했다.

-20주년 기념 공연으로 선택한 신화상생은 어떻게 탄생한 작품인가.

우주 속에 작은 우주인 인간의 본분을 그려낸 작품으로  '신화상생(神話相生)'을 내용으로 재구성 했다. 인간의 삶을 '신화'로 풀어내 거대한 우주와 음양오행의 자연법칙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서로 균형 있게 어우러지는 모습을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겨울·봄·여름·가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이미지화해 옴니버스 형식으로 표현한 소통과 치유의 축제다.

지난해 신화상생은 동물을 이용해 색과 계절의 흐름에 맞춰 구성되었다면, 올해는 십이지신과 계절의 어울림을 표현 했고, 영상과 첨단 테크놀러지의 만남을 통해 표현의 극대화를 시도했다. 공연장 3면의 벽과 무대 바닥을 영상 공간으로 활용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획기적인 미디어 퍼포먼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 신화상생-여름-정열

 - 이번 공연에서 무용과 테크놀러지의 만남을 시도한 게 특히 눈에 띈다.

지난해 공연했던 신화상생과 같은 작품이지만 미디어 아트와 한국무용을 연관시킨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테크놀러지를 더해 완성도를 높였다.

융합, 컨버전스라는 시대적 흐름과 걸맞게 한국적 소재와 기술이 만났을 때 어떻게 보여질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또 다른 도전이자, 20년 전 첫 실험적인 작품이 올랐던 그 장소에 다시 공연되는 것이라 뜻 깊다.

-늘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 예술인이란 생각이 든다. 다큐댄스라는 장르도 처음시도 하지 않았나.

어렸을 때부터 무용가로 살아왔지만, 한양대 교수 부임 이후 교육적인 측면에서 춤을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학생들과 함께 하면서 내 작업들이 어떻게 표출되는지 알게끔 하는 시도였다. 또 역사적 사건들에 관심이 많으셨던 어머니(이미라 전/ 예총 충남지부장)의 영향도 컸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 금수강산 무궁화, 성웅 이순신, 천추의열 윤봉길 등 무용극을 맡으면서 나도 그런 부분을 계속 가슴 속에 담아오게 됐다. 박사논문(한국 근대 교육무용사 연구)도 일맥상통한 주제였다. 갑오경장이나 88올림픽 등 주제로 하면서 다큐댄스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어머님을 잠깐 언급하셨는데, 무용가로서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나.

1930년 함흥에서 태어나셨는데, 월북 무용가 최승희 선생님의 제자셨다. 그분께 많은 영향을 받으셨다.

어머님께서는 한국에 오신 뒤 1958년 금수강산 무궁화라는 무용극으로 처음 활동하기 시작하셨다. 1969년에 성웅 이순신을 하시고 이후 천추의열 윤봉길, 열사 유관순 등 민족적 소재를 다룬 작품 등 국가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을 춤으로 표현하셨다.

또 1950∼60년대부터 대사를 읽는 성우를 두고 내레이션을 하면서 무용극을 이어가가는 등 새로운 시도로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성웅 이순신은 1975년도에 국립극장에서 다시 공연되면서 우수한 작품성을 다시 평가 받기도 하였다.
 

-무용 입문에 어머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머니 통해 춤은 생활이 되어 네 살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리틀엔젤스 무용단 전신인 선화 어린이 무용단 초대 멤버로 활동했고, 충남지부 특상을 받아서 전국의 특상 수상자들과 같이 공연했다. 내가 가장 어린 나이였고, ‘시집가는 날’이란 작품의 주인공인 색시 역할을 맡았다.

해외 공연을 다니며 국위 선양에 일조하던 때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고, 김치가 정말 그리웠다. 힐튼 호텔에 머물면서 김치를 먹기도 했는데, 당시만 해도 후진국 냄새라 해서 외국 사람들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봤던 게 기억난다.

그래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우리의 공연을 보고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무척 이쁘고 잘한다.” 며 감탄했다는 소리를 듣고 애국이란 것에 대해 어렴풋이 느끼던 시절이었다.
 

-김 교수의 또 다른 업적이라고 한다면 2005년에 발족한 우리춤연구소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전국 대학 최초였고, 우리 춤을 다각적으로 발굴하고 익히는 연구사업의 기초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감성공학 권위자인 박종일 교수님과 함께 한국인의 감성을 정량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연구소의 시발점이었다. 그때만 해도 융합은 생소한 개념이었고, 통섭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 국문학·의학·생명공학·연극·음악·미술·컴퓨터공학·생체공학·융합전자공학·해부학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여 연구 성과를 냈고, 다른 분야에서 춤의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우리가 참여하게 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연구재단 등에서 융합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또한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계속 성과를 내고 있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성과를 쌓고 있다.

-교육자, 예술가, 학자로 활동하며,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역할을 하는 게 놀라울 정도다. 가족은 어떤 존재인가.

항상 힘이 되는 존재들이다. 남편과 자녀들이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모자란 부분은 서로 채워주려 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서로 소통이 적어질 수밖에 없다는 건데,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가족끼리 모여 서로 진중한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 개인적인 일들에 대한 고민이나 국가적인 일들에 대한 토론을 나누기도 한다.(웃음)

- 지금까지 무용가로서 김운미, 그리고 인간으로서 김운미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앞으로 계획을 듣고 싶다.

교육자로서 이제까지 해온 일들을 좀 더 탄탄하게 구체화 시키고, 우리춤연구회를 통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분출되는데, 그것들을 구체화하고 싶다. 특히 우리춤연구소는 융합연구소로서 의미 있는 결실이 나오면 좋겠다.

각 지역의 특성과 문화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좋은 성질, 본을 찾아내 구체화하고 싶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이 있으면 그 목표에 좀 더 빨리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거시적 안목에서 무용생태계에 대한 전망은?

춤이라는 순수예술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다. 춤은 문화 사절단이며  생동감의 원천이다. 그러나 대중 전반적인 현상은 순수예술보다는 상업 예술 쪽으로 치우쳐 있어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또 우리 춤을 지켜야할 학생들에 대한 관심, 정부의 지원, 다른 학문들의 관심 세 박자가 어우러지면 춤의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적 측면에서도 문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전통예술에 대한 지원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춤의 상업화할 부분과 지킴이를 따로 나눠, 근간을 유지하면서도 춤에 대한 관심을 전폭적으로 이끌어내는 방법이 필요하다.   

  ◇김운미 프로필

출생 :
1957년 서울
학력 : 한양대학교 무용학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체육교육학 석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무용학 박사
경력 : 현/ 한양대 예술학부 교수(1992∼), 김운미무용단 창단(1993∼), 한국무용사학회 회장(2009∼), 우리춤연구소 소장(2009∼), 유네스코연맹 서울협회이사(1994∼), 한국춤문화 자료원 부원장(2009∼), 전/ 한국연구재단 문화융복합단 전문위원, 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평가위원, 전/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1995),
수상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공로패(1996), 서울시 문화예술지원금 수혜(1996, 조선의 눈보라), 서울시 문화예술지원 선정(1997, 온달 1997), 서울시 문화예술지원 선정(1999, 1919), 서울시 문화예술지원 선정(2001, 함 II), 국가보훈처, 문화일보사 ‘2001보훈문화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