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백자 달항아리의 여유와 순수-남영호의 현대 춤
[이근수의 무용평론]백자 달항아리의 여유와 순수-남영호의 현대 춤
  • 이근수(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3.10.26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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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근수 교수
조명이 꺼진 캄캄한 무대공간에 하얀 달 항아리 한 개가 떠 있다. 밤하늘에 낮게 걸린 달덩이를 보는 듯하다. 달 항아리는 보름달을 닮은 둥근 곡선을 살려낸 우리나라 특유의 백자항아리다.

중국과 일본자기의 화려한 색채나 형태를 따르지 않고 높이와 지름이 거의 동일한 원형으로 40cm 이상의 크기를 가졌다. 곡선이 주는 후덕함과 담백한 유백색이 주는 편안함으로 한국미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무대 안쪽 깊은 곳에서 북소리가 울린다. 둥 둥 딱, 둥 둥 딱, 둥둥 딱딱... 북소리의 리듬을 따라가며 언뜻언뜻 비치는 백자의 흰 살결, 그 안에는 방아 찧는 토끼의 이미지도 살짝 드러난다.

북소리가 빨라지면서 어둠 속에서 흰 치마저고리의 여인이 걸어 나온다. 이대 무용과를 졸업하고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무용가 남영호다. 2007년에는 파리에서 ‘꼬레그라피(La Coree'graphie)’무용단을 창단하고 전통적인 한국의 상징물들에 디지털댄스 테크놀로지를 접목하여 전통 미의 현대화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무용가다.

2009년 가을 대학로 예술극장에서 있었던 ‘S.U.N’ 공연에서는 출연자들의 몸에 부착된 마이크와 센서를 이용하여 전통적인 선무도 기본동작을 포착하고 소리와 동작신호를 실시간으로 스크린에 전송하는 디지털기술을 보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무대에 선 무용가의 움직임이 그 때와 동일한 모션 캡쳐링(motion capturing)기법을 통해 뒷면 스크린에 점으로 찍혀진다.

달 항아리의 궤적이다. 어깨에 얹거나 머리에 이고 있는 물동이는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이고 삶이 가져다주는 슬픔인지 모른다. 때로 무겁게 느껴지던 한복 춤사위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훨씬 경쾌해졌다. 움직임을 따라가며 여러 가지 상념들이 스크린 위에 문자로 나타났다 스러져 간다.

▲남영호의 '달 항아리' 작품의 한 장면

‘예술은 자연의 모방’, 이것이 남영호가 생각하는 예술관이라면 ‘변하지 않고 굳건함’ 은 자신의 삶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그녀의 다짐일 것이다. ‘온건함과 인생의 순리’가 그녀가 지향하는 삶의 진실이라며 평화로운 초원의 정경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춤이 가져다 줄 위로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몸과 소리, 몸과 문자를 일체화하고 현대무용과 전통무용의 간극을 해소하려는 미적 시도가 느껴지는 표현들이 인상적이다. 물, 북, 징, 물동이 등의 소도구에서는 한국의 정서가 살아 있고 흰색이 주조가 된 느린 춤사위에서 스며 나오는 정밀한 에너지가 깔끔하고 세련된 형태로 객석으로 전이되면서 60분의 솔로공연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었다.

국제무용협회(CID-UNESCO)한국본부(대표 이종호)가 주최하는 2013년 서울세계무용축제(SI DANCE)의 개막 전 작품으로 첫 선을 보인 남영호의 신작 <달 항아리(Moon Jar): 10.7,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를 보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발견한 넉넉한 저녁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