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 난 수완과 리더쉽, 의회를 주름잡다
타고 난 수완과 리더쉽, 의회를 주름잡다
  • 편보경 기자
  • 승인 2009.07.06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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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의회 복지건설위원회 임용혁 의원

 

▲중구의회 복지건설위원회 임용혁 의원

재향군인회 부회장이 바이올리니스트라고?
그의 이력이 예사롭지 않다. 중구의회 임용혁 의원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먼저 ‘재향맨’이라는 걸 뺄 수 없을 것이다.

근 19년 동안 재향군인회 임원을 하면서 많은 공을 세워 결국 병장 출신으로는 최초로 부회장까지 역임하게 됐다.

그는 동회장으로 재임할 당시 2800명의 향군을 가입시키며 동회장 최초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고 이 전무후무한 일로 향군 50년사 책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또 구회장을 하면서는 의장단 협의회 사무총장을 맡아 당시 각 구의 의장들을 설득해서 재향 군인회 조례를 제정했다.

구에서 제대로 재향군인을 위한 예산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이 공로를 통해 국민 훈장석류장 받기도 했다.

의회에서는 묵묵히 굵직한 일을 해 내기로 유명하다. 지난 2006년에는 중구의회 의장직을 맡기도 했지만 현재는 일반의원으로서 또 복지건설위원회의 위원으로 맹활약 중이다. 그가 의원 활동을 하면서 이룩한 가장 뿌듯했던 일을 묻자 그는 명동을 중심상업지구로 변경하는데 일조 한 것이란다.

“저는 진정한 지방 자치는 지역특성에 맞는 개발을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명동 지구단위개발을 할 때 명동에는 어차피 차가 못 들어가도록 돼 있으니까 건물에 주차장을 만들 필요가 없는데 안 만든다고 해서 불법이라면 말이 안되죠.

명동 같은 도심지를 일반 건물과 똑같이 건폐율이 60%를 적용한다면 상권 형성이 제대로 안 된다는 문제가 있지요. 그래서 결국 주차장 면제를 허가하고 건폐율을 90%로 변경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잡음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임 의원은 명동을 개발하면서 어려웠던 일도 털어 놓는다. 

“북창동도 지구단위개발을 했지만은 기본 단위를 100평으로 할 경우 북창동의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지요. 하지만 명동은 땅이 평당 2~3억은 하다 보니 100평단위로 묶어 놓으면 개발이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지주들이 많이 반대를 하고 젊은 의원이 와서 망하게 한다고 난리들을 한바탕 했었지요. 그래서 명동상가번영회하고 김장환 회장도 반발이 너무 심해서 멈추자고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개발 평수 단위를 없애고 끝까지 추진했지요. 결국 시의 승인을 얻고 중심사업지구로 변경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동이 여전히 미완성이라고 말한다. 임 의원은 명동을 프랑스 파리와 비견할 만한 대한민국의 진정한 관광명소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할 일이 산재해 있으며 그렇기에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명동이 좋은 기회를 맞이한 거지요. 저는 명동이 명실공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관광 명소로 거듭나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언젠가 프랑스 파리와 관련한 세미나를 간 적이 있었는데 파리의 경우도 200년 전에 파리도시 내 건축물의 소재와 형태가 통일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 시대 지도자가 그런 의지가 있어서 건축물을 통일을 한 거지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파리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명동의 지주들에게도 그런걸 주문할 필요가 있어요.

지금 기껏해야 간판을 통일하고 있는 모양인데 간판이야 언제든 바꿀 수 있지만 한번 지은 건축물을 리모델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제가 이 문제를 두고 집행부에 항상 발의를 하고 있지만 정작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아 너무 아쉬워요.”

이런 공로는 임 의원 자신만이 뿌듯할 뿐만 아니라 결국 지방자치 연구원과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 전국 의정대상 최고 의원상을 수상하게 하는 쾌거도 이룩하게 했다.

명동과 관련한 일을 잘 마무리하고 북창동을 30년 동안 재개발지역으로 묶여 있던 것을 해제한 것도 크지만 ‘향군맨’ 으로서 6.25 유공자 지방 자치 단체 조례를 여러 건 발의를 해 명예수당을 지급하게 한 것도 큰 공로다.

“국가가 가장 어려울 때 목숨 바쳐 전쟁터 간 분들을 지방 자치에서 지원 안하면 누가 국가 위기에 나서려고 하겠어요. 여러 저항에도 불구 이 일을 해낸 것은 저에게도 정말 의미 있는 일입니다.”

‘여러 반대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일을 척척 해내는 그는 사실 알고 보니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수완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유명 일간지 신문기자로 활약한 적도 있는 눈에 띄는 이력 때문에 기자가 질문을 하자 명문 경주 중 ‧ 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 위해 레슨비를 직접 벌었던 당시를 회고했다.   

“집에서는 법대를 가라고 했는데 저는 음악이 너무 좋아서 바이올린을 배웠어요. 그때 레슨비를 마련하기 위해 J 신문 배달을 했어요. 당시는 J신문이 신생 신문사여서 신문 확장 수당이 많았지요. 제가 6년 동안 만부 가까이 확장을 했습니다. 제가 열 집을 확장 해야겠다 목표를 세우면 집 주인이 면박을 주든 어쩌든 계속 무가지를 넣는 거죠. 그러면 결국 제 고객이 되고 말았어요.”

그렇게 결국 염원하던 음대를 진학하긴 했지만 군대를 다녀오고 머리가 좀 더 굵어지고 나서는 명동에 빵집 ‘뚜레쥬르’를 열었다. 빵집을 운영하면서도 그의 사업수완은 남달랐다. 빵이 식어지면 맛이 없어진다는 단점을 보강하기 위해 하루에 두 번이 아니라 4번 빵을 구웠던 것.

이러한 그의 노력이 통했는지 명동에 밀레오레가 생기고 부터는 갑자기 매출이 급성장해 SBS성공시대에 방영되는 ‘성공한 기업인’이 되기까지 했다.

“그때 남은 빵들을 명동성당, 고아원, 양로원 등에 보냈는데 그런 일들이 결국 제가 의원을 하게 되면서는 저의 밑거름이 되어주더군요. 한 국회의원분이 찾아오셔서 저에게 구의원으로 출마할 것을 권유 하셨고 이렇게 의원이 됐습니다.”

현재도 임 의원은 여전히 바이올린을 놓지 않고 아마빌레실내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도 활동하며 음악을 통한 나눔의 실현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런데 임 의원의 ‘발걸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나라 다문화 가정이 100만 명입니다. 중구에도 상당히 많지요. 현재 다문화 가정 공동체의 사단법인을 만들고 있는데 곧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공동 대표로 취임하고 이 재단을 통해 여러 아름다운 일들을 추진하기 위해 문화계의 덕망 있는 분들을 모시고자 합니다.

가령 금난새나 김덕수 그런 분들을 세팅하는 거죠. 현재 세계 평화 봉사단 거기 총재를 맡고 있는 영화배우 신영일 씨로 이사장을 맡게 했어요. 그 분들에게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받고 싶습니다.”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신중하게 날아올라 결국 타깃을 이루고 마는 임 의원의 내년 꿈은 뭘까?

“꿈대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현재 한나라당 천주교 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고 대외 협력 위원도 하고 당에서 핵심적인 일도 하니까 당에서 공천 하는 대로 움직이고 자 합니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은 있을 것 아니냐. 비밀로 할 테니 한번 말해달라는 말에도 빙그레 웃고 만다. 정말 비밀인가 보다. 

 

서울문화투데이  인터뷰- 이은영 국장 young@sctoday.co.kr    

                         정리-편보경 기자 jasper@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