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윤진섭] “예술이 팬시(fancy)해지는 추세…문제많다”
[인터뷰-윤진섭] “예술이 팬시(fancy)해지는 추세…문제많다”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정리-최영훈 기자
  • 승인 2013.11.1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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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가 제 역할을 해서 균형을 잡아줘야 한다”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작가, 대학교수. 윤진섭 이름 앞에 붙는 직함은 다양하다.

1976년 얼음에 구두끈 묶은 후 얼음이 녹는 과정을 찍은 사진 시리즈 작품으로 한국미술대상전에 입선을 했고,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포스트 모던의 풍경을 보여주는 글로 당선해서 평론가로 펜을 들게 됐다.

한국행위예술협회 초대 회장을 맡아 일하던 1988년 독일문화원에서 [장벽을 넘어서]란 전시회를 기획하며 큐레이팅을 시작했다. 1998년부터 호남대 교수로서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 성료된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총 예술감독으로서 호평을 이끌어냈고,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으로서 내년 총회 한국 유치라는 성과를 거뒀다.

이처럼 윤진섭은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작가, 대학교수로서 다양한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언뜻 복잡하게 보일 수 있는 삶에 대해, 윤진섭은 스스로 ‘크리큐라티스트’(CRICUARTIST)란 말로 단순화한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엔 비평가(Critic), 큐레이터(Curator), 예술가(Artist) 등 다양한 정체성이 포함돼 있으며, 그 안에서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고 있는 중이다.

복잡함을 단순화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그와 지난 6일 오후 서울 인사동 관훈갤러리 커피숍에서 만났다. 겨울비가 내려 세상엔 차분한 공기가 가득했지만, 그가 술회한 삶은 치열했고 그만큼 열기가 가득해 차분한 공기를 한껏 들뜨게 했다.

 

▲ 평론가 윤진섭이 6일 오후 서울 인사동 관훈갤러리 커피숍에서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윤진섭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일들을 하고 있나.

기본적으로 평론가로서 글을 쓰고, 전시 기획 일을 한다. 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예술가로서 작품 활동도 하고 있다.

-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는 평론 글을 올리며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됐다. 그래서 평론가라는 직업을 가장 앞에 둬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작가로서의 삶을 먼저 살기 시작했다. 1976년 대학 재학 시절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입선하며 데뷔를 했다. 그때도 퍼포먼스로서 얼음에 구두끈을 묶고 녹이는 과정을 통해 작품을 연출했다. 이후 현대미술, 개념미술, 퍼포먼스에 빠져들게 되고 이듬해 첨단의 전위미술 단체인 ‘S.T그룹’(Space & Time)에 참가하게 되면서 미술활동을 시작했다

서울화랑에서 이건용 선생님과 ‘조용한 미소’라는 퍼포먼스 이벤트를 하면서 행위예술에 빠져들게 됐다.

- 일반 독자에겐 생소할 수 있는 장르다. 작품에 대해 좀 더 설명해달라.

1986년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열린 [1986, 여기는 한국전]에는 대걸레와 빗자루로 먹물 드로잉을 한 적이 있다. 먹물이 묻은 대걸레를 들고 온몸으로 20미터에 달하는 흰 천을 가르는 행위였다. 무당의 베가름에서 힌트를 얻었다.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89 청년작가전]은 대중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행위예술가들을 처음으로 초대한 건데, 그때 중앙전시장 대형 유리창에 계란 180개를 던졌다. 일종의 정부기관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는 행위였고, 엄숙한 공간에 계란 던지는 걸 예술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경악했겠는가. 어떤 국회의원은 그 모습을 보고서 관장에게 전화로 ‘그런 게 무슨 예술이냐’고 따졌다고도 한다.

- 한국 전위예술의 2 세대쯤으로 여길 수 있는데, 최근에는 다양한 예명으로 활동하는 게 눈에 띄더라. 특별한 이유가 있나. 

왕치, 파자마준, 빈둥빈둥K, 돈판, 한큐, 천둥치는 이 밤에, 진자(晋子) 등 현재 약 20여개의 예명을 상황에 따라 달리 쓰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고 새로움을 추구하자는 뜻도 있고, 또 수많은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기도 한다.

추사로 알려진 김정희 선생도 그 명호가 334개라고 하더라. 이름이란 게 정체성을 뜻하는 건데 까도까도 끝이 없는 양파 같은 즐거움이 있지 않겠나. 일정한 의미를 담고 수행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다양한 이름에 담긴 특별한 뜻이 있나.

‘왕치’는 중국 미술계를 무조건 선망하는 세태, 중국풍 아류를 비판하는 이름이다. Wangzie라고 중국 이름인 것처럼 표기하고 있다. ‘돈판’이란 이름은 물질주의를 풍자하는 ‘판돈’을 의미하는 것으로 Don Fuan이라고 표기한다. 참고로 서양의 바람둥이 이름은 'Don Juan‘이다.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

- 평론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한 뒤에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으로 응모를 하게 됐다. ‘로즈 셀라비여, 왜 재채기를 하는가’라는 글을 통해 포스트모던의 풍경을 보여주는 글로 당선한 뒤 평론가의 길을 걷고 있다.

- 윤진섭이 걷는 또 다른 길, 전시기획자는 어떤가.

1992년 현대아트갤러리 총괄 관장으로 있던 때였다. 무역센터 현대미술관에서 ‘창작과 인용’이란 전시회를 기획하며 본격적으로 큐레이팅을 시작했다. 고전명화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들에 대한 전시였다.

- 전시기획자로서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걸로 알고 있다. 단색화에 대한 영문표기를 국어 음 그대로 풀어낸 것 말이다.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을 기획할 때다. 일본 모노하(物派)와 한국 단색화를 같이 놓고 비교해보는 전시였는데, 그때만 해도 일반적으로 단색화의 명칭을 서양의 모노크롬(monochrome)을 본 따 코리안 모노크롬 페인팅이라고 썼다. 그래서 이걸 ‘단색화(Dansaekhwa)’라고 고유명사 그대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이후 10년에 걸쳐 꾸준히 단색화를 알려오면서 이제는 세계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 왜 이름 표기에 신경을 썼나. 명칭이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건가.

단색화에는 서양, 일본의 모노크롬과는 차별화된 우리만의 미(美)의식이 배어있다. 끝없는 반복행위와 촉각성(물성), 그리고 정신성 등 세 요소가 결합된 결과물로서 우리의 집단적 미의식이 반영된 고유의 미학이다. 이걸 어떤 틀에 담아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명명(naming)작업이 필요했다.

또 모노크롬이라고 계속 표기할 경우, 서양미술사의 우산 속에 편입될 가능성이 있다. 고유의 브랜드를 쓰면 그걸 통해 우리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고, 우리 것으로 세계에 인식시킬 수 있다. 

▲ 평론가 윤진섭이 6일 오후 서울 인사동 관훈갤러리 커피숍에서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인터뷰 전 자신의 책에 사인을 하고 있다.
- 작가로서 바라보는 미술계의 동향은 어떤가. 

아방가르드를 통한 미술계 전반에 걸친 견제가 중요한데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은 상태다. 시장논리에 의해 작가들이 좌지우지된 지 오래다. 예쁘장하고 길들여진 그림, 팬시(fancy)한 그림만 그린다.

인체도 균형이 깨지면 병이 생기듯, 미술계도 밸런스가 붕괴되면 부조화 상태에서 앓게 된다. 아방가르드를 역설하는 이유가, 밸런스를 유지시켜주는 역할이란 점 때문이다. 삶과 예술의 일치를 통해 세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 큐레이터로서 보는 미술계의 동향은 어떤가. 

전시기획은 확실한 강세를 보이고 있다. 미술관과 아트페어 중심의 전시 문화도 큐레이터들이 힘을 받게 만들고 있다. 작가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작품을 골라주는 사람들이 큐레이터라, 전시기획자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전시 기획자도 자신의 틀을 가지고 이 시대를 보는 눈을 드러내고 있다. 큐레이터들의 글쓰기 행위 속에 비평적 시선이 스며들어가고 있다. 미술계의 추이를 추적해보자면 작가 중심의 큐레이팅에서, 비평가 중심 큐레이팅으로, 그리고 현재 전시기획자에 의한 비평가 시대가 열리고 있다.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대학교수로서의 얘기도 듣고 싶다. 

대학 전반의 문제를 들면 실용만을 강조해온 게 역효과를 내고 있다. 대학은 인재를 사회로 내보내기 위한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곳인데 원래 의도와 목적이 심히 왜곡돼 있다. 또 전인교육과 지덕체를 중심으로 대학이 움직여야 하는데, 취업 중심으로 가고 있다. 

지방 대학은 더 문제다. 3~4년 뒤에는 고교 졸업자 수보다 입학 정원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수요 공급의 완전한 불균형으로 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한 타개책으로 현재 50~60대 이상 세대를 재교육하는 곳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만학도를 위한 교육 기관으로 활용해 대학 본연의 기능에 충실해지자는 것이다. 

- 비평가 입장에서 미술계를 평해본다면. 

비평은 예로부터 시대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미술의 담론을 이끌어왔다. 선구자적인 시야를 가지고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처럼 당대 미술 담론을 주도해야 하는 게 사명이다. 문제는 현재의 비평이 거대담론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비평은 그 힘을 계속 잃고 있다. 그 이유로 첫째, 제대로 비평에 대한 글을 쓸 만한 곳이 없다는 것, 매체 그 중에서도 문화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비평만으로 먹고 살기 힘들고, 비평에 대한 지원도 없다보니 인력풀이 약해지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 이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윤진섭의 입장은 어떤가. 

최근 국제미술평론가협회 총회에서는 큐레이터와 아티스트를 합쳐 큐라티스트(Curartist)란 말도 나왔다. 나는 스스로를 크리큐라티스트(CRICUARTIST)라 칭하고 싶다. 비평가(Critic), 큐레이터(Curator), 예술가(Artist) 등 다양한 정체성을 합쳐서 역할을 하고 싶다. 내 정체성을 계속 파고 들어가다 보면, 새로움을 추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 평론가 윤진섭이 6일 오후 서울 인사동 관훈갤러리 커피숍에서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평론가와 큐레이터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말도 들린다. 

앞서 말했지만, 전시기획자의 역할이 커지면서 큐레이팅에 비평적인 시각을 담기 시작했다. 큐레이터가 글을 쓰면서도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담을 때도 많다. 하지만 그 역할을 해야 할 비평가의 설자리가 줄어들면서 이런 얘기들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 평론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예술 작품이나 문화 현상 따위에 대하여, 그 가치, 우열, 미추 따위를 논하여 평가함, 그 가치, 우열, 장단 등을 논의해 평가하다’란 뜻인데, 요새 평론에서 장단의 평가는 없는 것 같다. 소위 말하면 ‘주례사식 평론’이라는 비판이 있는데. 

비평가 인력 풀이 얇아지면서 생기는 문제점들이 있다. 전체적인 안목이 높아지기 어렵다는 것인데, 이러면 결국 좋은 작품이 발굴되기 어렵고 신뢰를 잃게 된다. 

‘주례 비평’이란 말은 개인전 도록 서문에 무조건 칭찬 일색으로 쓴다는 얘기다. 물론 결혼식에 비유하며 ‘신랑신부 앞에서 단점을 얘기하는 주례는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칭찬엔 인색하되, 작품 세계에 대한 분석만큼은 일반 매체에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수준에서 하자’는 마음으로 평론을 하고 있다. 

- 작가가 평론가에게 원고료를 내며 평론을 부탁하는데 그것도 사실 좀 모순적이지 않은가. 자신의 클라이언트를 비평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고 그 원리에 따라 가는 면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미술잡지가 극히 제한돼 있는 상황에서 매체에서 소화할 수 있는 평론의 양이 한정적이다. 작가는 많지만 자기 작품세계에 대한 글을 받을 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고. 평론가가 서문을 쓸 때 근거없이 칭찬하는 것은 비평이 아니다. 비평적 담론이란 미적 판단기준을 분명히 세우고, 글을 쓸 때 벽돌 쌓듯 촘촘히 이어가야 한다. 시대를 어떻게 성찰하고 바라보는지를 글에 담아야 한다.

- 그런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좋은 작품의 정의를 내린다면?

단색화의 예를 든다면 1970~80년대 작품이 좋다. 단색화에 이어져오는 ‘자신을 비우고 수양해서 높은 정신적 가치를 담는다’는 선비정신이 담겨 있는 시기의 작품들이다. 단색화 붐이 일어난 2000년대 이후를 살펴보면 공예품처럼 만들어진 작품들도 많다.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작품들이 망가진다.

안 팔리고 배고프던 시기에 순수한 정신을 이어가면서 만든 초기 작품들이 대개 좋은 작품이라고 본다. 본연의 예술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 앞으로 미래 미술계의 양상을 예상해보면 어떤 식으로 흐를 것이라고 예상하는지.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이 사진의 대중화를 촉발시킨 것처럼 3D 프린터의 등장은 조각과 공예 간의 경계를 더욱 흐리면서 동시에 예술과 일상의 구분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현재에도 일부 조각가들이 3D 프린터를 사용하고 있지만 만약 컴퓨터 프린터처럼 저렴한 가격으로 가정에 공급된다면 클라우드의 확산과 맞물려 누구나 조각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올 지도 모른다. 

이미 오래 전에 요셉 보이스가 말 한 것처럼 ‘누구나 예술가’인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 예상한다. 예술작품 뿐만 아니라 가구, 의료기구, 각종 전기용품, 살림살이를 평범한 대중이 스스로 제작해서 사용하는 획기적인 시대가 올 것이다. 

- 누구나 예술가, 예술과 일상의 구분이 없어진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면 2011년 부천국제행위예술제에 참가했을 때 즉흥적인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가서 살펴보니 전시 무대였던 부천역 광장이 소품 등으로 어질러져 있더라. 그래서 난 청소도구를 구해 와서 다른 예술가들이 퍼포먼스를 할 때 대걸레질을 했다. 그걸 본 관객이 “왜 방해하냐”는 식으로 얘길하더라.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게 됨으로써 관객과 즉흥적인 반응을 하게 된 것이다. 후에 진짜 미화원이 오더니 “왜 자기 밥줄 끊느냐”는 얘기를 하고 갔는데, 기획된 것은 아니지만, 미화원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술작품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지난해 익산국제퍼포먼스 때에는 나는 서울에 있었고, 다른 미화원을 고용해서 익산 공연장을 청소하기도 했다. 그분이 내 에이전트로서 예술행위를 한 것이다.

- 또 주목하고 있는 흐름이 있나. 

전 세계 미술의 구도가 중국으로 옮겨온다고 생각한다. 옥션같은 경우도 중국이 미국을 앞섰고, 중국의 방대한 힘이 이제 나타날 때다. 

우리나라 미술계에도 큰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도 이제 세계적인 작가가 나타날 때가 됐다. 몇 년 안에 스타가 생겨나야 하고, 외국에서 우리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단색화로 예를 들면 머지않아 뉴욕 현대미술관이나 런던의 테이트 모던,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우리 의 단색화 초대전을 할 날이 올 거라 생각한다. 

- 여러 활동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내년 국제평론가협회 총회를 한국에서 유치하게 된 것이다. 

현재 국제평론가협회 부회장이다. 이 단체는 1950년도에 창설된 가장 오래된 단체고, 현재 가장 큰 단체로서 유일하게 존재한다. 매년 총회 개최국을 바꾸게 되는데 내년 우리나라에서 유치하는 것을 확정지었다. 1998년 일본, 2003년 타이완에 이어 아시아 세 번째 개최다. 현재 가칭 ‘미궁 속에 빠진 예술’이라는 주제로 계획하고 있다. 

-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윤진섭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고 싶다. 

작가로서 김노암 예술감독이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내년에 초대전을 하자고 해서 준비하고 있고, 쿤스트독에서 시드니 예술대학 코린 학장과의 2인전 등 기상천외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내년엔 물론 국제평론가협회 총회를 열 계획이고. 

‘크리큐라티스트’로서 한가지에 치중하지 않고 여러 겹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면 성취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여러가지 정체성이 모여서 내 삶을 이룬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