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벽파 박재희]“춤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
[인터뷰-벽파 박재희]“춤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정리-최영훈 기자
  • 승인 2013.11.11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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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주년 기념 공연 앞둔 ‘반세기 춤 외길’ 벽파 박재희 선생

여섯 살에 우연히 본 영상이 그의 운명을 이끌었다. 영상 속 등장인물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은 어린 숙녀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마음 속에 깊이 남았다. 이후 그 어린 숙녀의 머리는 무용으로 가득 찼고 눈길은 무용가의 춤사위로 향하게 됐다. 무엇이 용기를 내게 했는지 이 어린 숙녀는 스스로의 발길로 무용학원을 찾았고, 이후 50년 동안 춤이라는 외길 인생을 걷게 된다.

▲ 벽파 박재희 선생

올해로 춤 인생 50년을 맞이한 벽파 박재희 선생의 얘기다. 나이 50을 일컬어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의미로 지천명(知天命)이라 표현한다. 박재희 선생은 사람으로 한번 태어난 뒤 춤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고, 무용가로 50년을 살았다. 춤이란 예술 장르에 눈을 뜨고(志學) 춤을 향한 뜻을 세운 뒤(立志) 춤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파에 흔들리지 않았으며(不惑) 이제 춤으로 하늘의 뜻을 알아가며(知天命) 50주년을 맞이했다.

일생을 춤과 함께 해오며, 끊임없는 도전과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외길을 걸어온 벽파 박재희. 스스로 대견하고 자부심을 느끼지만 아직 하늘의 뜻을 깨우치기엔 멀었다는 그는, 50년 기념 공연 ‘강산연파’(江山延波, The Eternal Waves of The land)로 지난 반세기를 반추하고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고 있다.

박재희 선생은 1973년 故한영숙 선생으로부터 태평무를 전수받았고,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의 전수장학생으로 선정된 뒤 1976년 전수발표회에서 문화재관리국장상을 수상하며 1980년 승무 이수자가 됐다. 이후 그가 직접 무대에 오를 때는 한영숙류의 춤을 중심으로 전통춤만을 구사해왔다. 이와 함께 청주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1982년부터 후학들을 양성하며 1985년 새암무용단을 창단해 창작 무용에 대한 연구 개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벽파 50주년 기념 공연 ‘강산연파’

오는 21일 아르코대극장에서 펼쳐지는 벽파 50주년 기념 공연 ‘강산연파’는 전통춤꾼으로서의 박재희와 지도자로서의 박재희가 혼재된 기념비적인 무대를 예고하고 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제자 그리고 공연 스태프들과 함께 꾸민 축제의 자리로 만들었어요. 이질적인 두 집단, 창작에 중점을 둔 새암무용단과 전통춤을 연구하는 벽파춤연구회가 함께 모여 무대를 만드는 만큼 새로운 느낌을 줄 거라 기대합니다. 제자들이 제 작품들을 새롭게 구현해내서 창작한 작품이지만, 이 안에는 지금까지 제 작품과 경향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

▲ 벽파 박재희 선생

강산연파는 김종길 시인의 시(詩) ‘바다로 간 나비’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한 모금의 생명수가 산속 옹달샘에서 태어나 계곡의 시내, 고을의 개천, 도읍의 강을 거쳐 망망한 바다에 다다르는 여정을 한 예인의 춤의 구도행으로 비견한 무용서사시로 풀어낸다.

“창작 공연이지만, 저도 무대에 오르게 됐습니다. 50주년을 맞아 제 춤을 다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그동안 작품에 나왔던 인물이나 춤의 구성을 제자들이 안무를 짜서, 새롭게 만든 작품이죠. 큰 배역을 맡은 건 아니지만 한영숙 선생님의 전통춤이 아닌 창작춤을 추는 거라 설레기도 하네요. 창작이라곤 하지만 제 기본이 전통적인 춤사위를 밑받침으로 하기 때문에 전통의 정서는 묻어나겠죠.”

우연처럼 만난 무용…필연으로 이끌린 운명

그에게 무용이란 필연적인d 이끌림이었다. 여섯 살 때 처음 본 무용 영상에 홀린 뒤, 자연스럽게 춤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국민학교 때에는 흥부놀부 동요에 맞춰 안무를 짜고 급우들을 가르치며 장기자랑을 펼쳤고, 무용반이 없던 중학생 시절에도 학교 건물 옥상에서 친구들을 모아놓고 춤을 알렸다. 고 3때는 무용반을 맡아서 작품 발표회를 준비하며 일찍부터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이런 그에게 춤이란 단순히 음악과 어우러진,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의 한 장르를 넘어선 인생 그 자체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무용인생의 완성은 고 한영숙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대학교 때 현재의 명동예술극장에서 태평무 공연을 하시던 것을 보게 됐어요. 터벌림이나 푸살이란 장단을 처음 듣는 거였는데 한순간에 마음을 사로잡혀 버렸죠. 태평무에 홀딱 반해버렸어요. 그 춤을 꼭 배우고 싶었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게 우연이 겹쳐 필연이 됐다는 거에요. 원래 졸업하고 바로 선생님께 배우려 했는데 국가예술단에 뽑혀서 해외 순방을 하게 됐어요. 거기에 한영숙 선생님도 함께 가셨구요. 1년 정도 지난 뒤에 귀국하고선 바로 태평무를 배우겠다고 찾아갔죠. 그때가 승무 전수자가 이수자가 된 시기랑 맞물렸던 거에요. 쉽게 말하면 T.O(결원으로 인한 인원 공백)가 생겼던 거죠. 그래서 선생님께 춤을 사사하게 됐죠. 참 운이 좋았죠.”

이후 박재희 선생의 춤은 한영숙류의 전통춤에 뿌리를 두게 된다. 그 스스로도 자신을 ‘전통춤꾼’이라 칭하며 전통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자신을 통해 한영숙의 춤을 올곧게 이어가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이런 ‘춤사위’의 철학은 곧 벽파춤연구회의 탄생과 맞물려 있다.

“전통춤을 연구 개발 전승해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려고 해요. 우리 민족의 밑바탕이 되는 여러 무형적인 것들과 춤을 함께 연구해서 전통춤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싶어요. 무엇보다 함께 활동해주시는 분들이 정말 즐겁게 참여해주시고 계신 덕에 조만간 성과를 이룰 것이라 생각합니다.” 

▲ 벽파 박재희 선생

“새암무용단 설립 당시, 학생조차 춤을 모르던 시절”

박재희 선생의 다른 축은 새암무용단과 맞닿아있다. 그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청주대학교 무용학과가 주축이 돼 1985년 탄생한 단체다. 벽파는 한영숙 춤을 계승한 2년 뒤 청주로 내려가 무용가이자 학자, 교육자로서 인생의 폭을 넓히게 된다. 지금은 무용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많아졌고, 교육계에서도 체계적인 과정을 들여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청주대학교 무용과에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환경은 척박했다.

“무용을 모르는 걸 떠나서, 무용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죠. 무용과였는데도 학생들 중 무용 공연을 보거나, 무대에 서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용이 어떤 것이라는 걸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무대를 통해 보여주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가르친 학생들이 졸업하던 1985년 새암무용단을 만들게 됐죠. 관객들도 무용이 생소하기만 한 시절이었어요. 작품 공연 중에 무대 위로 올라와서 사진을 찍는 등 개념조차 성립되지 않았던 때였죠. 고생을 많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보람찬 시절이었어요. 그 덕분에 청주 시민들 관람 태도는 어디에도 빠지지 않을 만큼 성숙하게 됐죠.”

새암무용단은 창작 무용을 통해 한국 춤의 세계화를 꾀하는 곳이다. 한영숙류 춤을 계승한  전통춤꾼인 박 선생이었지만, 후학들에게는 전통춤만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여기엔 그가 가진 거시적인 안목과 진정으로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 벽파 박재희 선생

“청주대 부임 뒤 학생들을 보니 전통춤만을 가르치면 안되겠더라구요. 일단 학생이란 나이가 창의력이 한창 좋을 때이기도 하고, 상상력을 더 자극시켜줘야할 때이기도 하니까요. 제자들에겐 다양한 춤을 섭렵할 수 있도록 하다보니 자연스레 성격이 좀 달라지게 됐죠.”

“춤은 마음을 담는 그릇, 무용가 스스로 먼저 인간이 돼야”

그는 무용가로서 우선시 해야 할 가치를 춤에 대한 이해나 기술이 아닌 인격이라고 강조한다. 인격이 완성된 상태라야 진정한 예술을 보여줄 수 있고, 춤은 동작을 이용해 추는 게 아니라 마음에 따라 ‘추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다. 30여 년 이상 교육자로 살아온 경험적인 성과다. 그 밑바탕에 깔린 철학은 ‘솔선수범’이다.

“예술이란 관객들에게 정신적인 해방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술 작품을 통해 영혼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여기에 춤은 한가지가 추가됩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란 의미죠. 사람 자체가 춤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분야보다도 인간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춤을 추기 위해선 자기 자신부터 가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주입식으로 알려준다고 제자들이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더라구요. 이런 마음가짐을 배우게 한다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게  배운다는 게 아니라 자연히 스며들어가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도자로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려 노력합니다. 교육자 스스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단 얘기죠.”

그가 제자들에게 남긴 말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순간 순간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것. 이런 마음가짐은 사람의 내면을 풍성하게 만들고 인격을 올곧게 만든다고 믿고 있다. 인터뷰 말미 그가 읊은 고은 시인의 시 구절은 인생의 나침반으로 활용해도 좋을 만큼 큰 의미를 안고 있었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벽파 박재희

이화여자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업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

국민포장, 충청북도 문화상 수상

대한무용학회 학술상, 청석학술상 수상

제15회 전국무용제 대상(대통령상) 수상

현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공연예술(무용) 전공 교수

벽파춤연구회 이사장

박재희새암무용단 대표

한영숙 춤보존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역임

 

◇벽파 박재희 50주년 기념 공연  ‘강산연파’

일시/장소 : 11월 21일 아르코대극장

출연 : 박시종(박시종무용단 대표), 노현식(구미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안무자),김진미 (김진미 풍유무용단 예술감독),홍지영(홍지영 무용단 예술감독), 손혜영(손혜영 아정무용단 예술감독) 

외 3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