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벽파 박재희]“춤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
[인터뷰-벽파 박재희]“춤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정리-최영훈 기자
  • 승인 2013.11.12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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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주년 기념 공연 앞둔 ‘반세기 춤 외길’ 벽파 박재희 선생

여섯 살에 우연히 본 영상이 그의 운명을 이끌었다. 영상 속 등장인물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은 어린 숙녀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마음 속에 깊이 남았다. 이후 그 어린 숙녀의 머리는 무용으로 가득 찼고 눈길은 무용가의 춤사위로 향하게 됐다. 무엇이 용기를 내게 했는지 이 어린 숙녀는 스스로의 발길로 무용학원을 찾았고, 이후 50년 동안 춤이라는 외길 인생을 걷게 된다.

올해로 춤 인생 50년을 맞이한 벽파 박재희 선생의 얘기다. 나이 50을 일컬어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의미로 지천명(知天命)이라 표현한다. 박재희 선생은 사람으로 한번 태어난 뒤 춤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고, 무용가로 50년을 살았다. 춤이란 예술 장르에 눈을 뜨고(志學) 춤을 향한 뜻을 세운 뒤(立志) 춤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파에 흔들리지 않았으며(不惑) 이제 춤으로 하늘의 뜻을 알아가며(知天命) 50주년을 맞이했다.

   
▲ 벽파 박재희 선생

일생을 춤과 함께 해오며, 끊임없는 도전과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외길을 걸어온 벽파 박재희. 스스로 대견하고 자부심을 느끼지만 아직 하늘의 뜻을 깨우치기엔 멀었다는 그는, 50년 기념 공연 ‘강산연파’(江山延波, The Eternal Waves of The land)로 지난 반세기를 반추하고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고 있다.

박재희 선생은 1973년 故한영숙 선생으로부터 태평무를 전수받았고,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의 전수장학생으로 선정된 뒤 1976년 전수발표회에서 문화재관리국장상을 수상하며 1980년 승무 이수자가 됐다. 이후 그가 직접 무대에 오를 때는 한영숙류의 춤을 중심으로 전통춤만을 구사해왔다. 이와 함께 청주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1982년부터 후학들을 양성하며 1985년 새암무용단을 창단해 창작 무용에 대한 연구 개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벽파 50주년 기념 공연 ‘강산연파’

오는 21일 아르코대극장에서 펼쳐지는 벽파 50주년 기념 공연 ‘강산연파’는 전통춤꾼으로서의 박재희와 지도자로서의 박재희가 혼재된 기념비적인 무대를 예고하고 있다.

“올해로 제가 무용에 입문한지 어느덧 50년이 됐습니다.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50년이란 세월을 한 번도 다른 길이 있다고 생각지 않고 오로지 무용이라는 한 길만을 바라보며 오늘날까지 달려온 것에 대해 안도와 함께 감사함을 느낍니다. 오는 2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갖는 50주년 기념 공연은 제 춤 인생을 반추해보고 정리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강산연파는 김종길 시인의 시(詩) ‘바다로 간 나비’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한 모금의 생명수가 산속 옹달샘에서 태어나 계곡의 시내, 고을의 개천, 도읍의 강을 거쳐 망망한 바다에 다다르는 여정을 한 예인의 춤의 구도행으로 비견한 무용서사시로 풀어낸다.

“제가 그동안 안무했던 작품 속 인물들과 춤의 구성 등을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제자들이 그것을 재현 또는 재창작하여 하나의 새로운 작품으로 선보이는 것이 이번 공연의 콘셉트입니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수십 년간 제 작품에 출연하며 동고동락한 제자들이 안무를 하고, 오랜 기간 함께 해 온 스태프들과 함께 하기에 그 누구보다 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는 제가 이끌고 있는 새암무용단과 벽파춤연구회가 모두 참여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제 제자들은 전통과 창작을 넘나들고 있습니다만 전통무용에 더 관심을 가진 사람은 벽파춤 연구회에서, 창작에 더 관심을 가진 사람은 새암무용단에서 활동합니다.  언제나 각각 따로 활동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한 작품 안에 두 단체가 모두 참여하여 저와 저의 제자들 모두가 함께 한다는 것이 소중하고 특별합니다.”

우연처럼 만난 무용…필연으로 이끌린 운명

그에게 무용이란 필연적인 이끌림이었다. 여설 살 때 처음 본 무용 영상에 홀린 뒤, 자연스럽게 춤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국민학교 때에는 흥부놀부 동요에 맞춰 안무를 짜고 급우들을 가르치며 장기자랑을 펼쳤고, 무용반이 없던 중학생 시절에도 학교 건물 옥상에서 친구들을 모아놓고 춤을 알렸다. 고 3때는 무용반을 맡아서 작품 발표회를 준비하며 일찍부터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이런 그에게 춤이란 단순히 음악과 어우러진,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의 한 장르를 넘어선 인생 그 자체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무용인생의 완성은 고 한영숙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 벽파 박재희 선생

“이화여대 재학시절 한영숙 선생님을 만나 선생님의 춤을 전수받게 됐습니다.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한국무용이 지닌 특성, 즉 전통춤의 호흡법이나 단아하고 깨끗한 선과 함께 여백을 느끼게 하는 절제미, 그리고 심오한 내면의 멋을 표출하는 격조있는 한국 전통춤의 특징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터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박재희 선생의 춤은 한영숙류의 전통춤에 뿌리를 두게 된다. 그 스스로도 자신을 ‘전통춤꾼’이라 칭하며 전통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자신을 통해 한영숙의 춤을 올곧게 이어가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이런 ‘춤사위’는 철학은 곧 벽파춤연구회의 탄생과 맞물려 있다.

“벽파춤연구회는 홀춤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으셨던 故 한영숙 선생님의 춤을 제자인 저를 통해 올곧게 계승, 발전시키고 우리의 근본인 전통춤을 제대로 가꿔 나가고자 결성된 단체입니다. 한영숙 선생님과 그의 조부이신 故 한성준 옹이 계셨기에 오늘의 제 춤이 있고, 또 벽파춤연구회가 있는 거죠.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신 한성준 옹은 한국춤을 집대성하고 전통예술의 토대를 만드신 우리 춤의 뿌리이며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춤의 맥을 이으신 손녀 한영숙 선생은 이를 더욱 깊게 천착하여 전통춤의 화려한 꽃을 피우신 한국춤의 대모(大母)이지요.

이렇듯 충청지역은 한국의 근대무용을 태동시킨 요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청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벽파춤연구회는 더욱 의미가 있고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원들은 대구, 대전 등 각지에서 전통춤을 연구하고자 일주일에 한 번씩 청주에 모여 연마를 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무용지도자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즐겁게, 열정적으로 해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벽파춤연구회는 실기와 이론을 더욱 연구하여 진실로 우리춤의 우수성을 확인시켜 나가고자 합니다.”

“새암무용단 설립 당시, 학생조차 춤을 모르던 시절”

박재희 선생의 다른 축은 새암무용단과 맞닿아있다. 그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청주대학교 무용학과가 주축이 돼 1985년 탄생한 단체다. 벽파는 한영숙 춤을 계승한 2년 뒤 청주로 내려가 무용가이자 학자, 교육자로서 인생의 폭을 넓히게 된다. 지금은 무용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많아졌고, 교육계에서도 체계적인 과정을 들여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청주대학교 무용과에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환경은 척박했다.

“당시 청주의 무용 환경은 그야말로 황무지였습니다. 무용과 학생들은 무용공연에 참가해 본 경험은 물론 공연 관람조차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용과 학생들이 그럴 정도면 일반 시민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무용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우선 무용공연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학생들과 함께 그 해 가을 충북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 제자들을 중심으로 무용단을 만들어 좀 더 무용을 활성화 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에 졸업생이 배출되던 1985년도에 박재희새암무용단을 창단했습니다. 그 당시의 관객들의 수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관객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서 사진을 찍는 등 공연을 제대로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였지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제가 출연하지 않을 때에는 공연 중에 플래시를 터뜨리지 못하게 막는 것을 비롯하여 객석에서 조용히 관람하도록 권유하기도 하면서 공연을 했습니다.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박재희새암무용단이 점점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제자들의 기량이 그만큼 발전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지역민들의 문화의식도 점차 높아지게 되어 많이 힘들었지만 힘든 만큼 보람도 컸습니다.”

새암무용단은 창작 무용을 통해 한국 춤의 세계화를 꾀하는 곳이다. 한영숙류 춤을 계승한  전통춤꾼인 박 선생이었지만, 후학들에게는 전통춤만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여기엔 그가 가진 거시적인 안목과 진정으로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저는 원래 한영숙선생님의 제자로 전통춤꾼입니다. 그러나 청주대학교에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폭넓은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지요. 전통무용은 물론 학생들의 창의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창작무용도 병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전통춤을 기저로 하여 우리의 정서를 일깨울 수 있는 창작 작품을 발표 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저 자신은 한영숙선생님의 춤을 올곧게 계승 발전시키고, 우리의 근본인 전통춤을 지켜나가고자 전통춤만을 췄습니다.”

   
▲ 벽파 박재희 선생

“춤은 마음을 담는 그릇, 무용가 스스로 먼저 인간이 돼야”

그는 무용가로서 우선시 해야 할 가치를 춤에 대한 이해나 기술이 아닌 인격이라고 강조한다. 인격이 완성된 상태라야 진정한 예술을 보여줄 수 있고, 춤은 동작을 이용해 추는 게 아니라 마음에 따라 ‘추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다. 30여 년 이상 교육자로 살아온 경험적인 성과다. 그 밑바탕에 깔린 철학은 ‘솔선수범’이다.

“춤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담아내는 거울입니다. 춤은 추는 것이 아니라 추어지는 것이라 생각해요. 다시 말해서 인위적으로 꾸며서 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저절로 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춤을 추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가다듬어야 하지요.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만 진실한 춤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을 닮아가며 자기를 비우고 무아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을 춤의 철학으로 삼고 있습니다.

춤 교육자들을 위한 당부를 감히 해본다면 어떤 분야이건 교육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솔선수범이라는 것입니다. 춤이란 더욱이 몸에서 몸으로 전수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가다듬지 않고는 제대로 지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춤의 테크닉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정신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생활에서 정신이 나오고 그 정신은 곧 춤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다스려 춤을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너무 서두르지 말라. 그러나 게으르지 않게, 누가 뭐라 해도 꿋꿋하게 자기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가라’는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자기가 처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서두르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 한다면 무용계도 나름대로 내실 있게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남긴 말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순간 순간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것. 이런 마음가짐은 사람의 내면을 풍성하게 만들고 인격을 올곧게 만든다고 믿고 있다. 인터뷰 말미 그가 읊은 구상 시인의 시 구절은 인생의 나침반으로 활용해도 좋을 만큼 큰 의미를 안고 있었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벽파 박재희

이화여자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업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

국민포장, 충청북도 문화상 수상

대한무용학회 학술상, 청석학술상 수상

제15회 전국무용제 대상(대통령상) 수상

현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공연예술(무용) 전공 교수

벽파춤연구회 이사장

박재희새암무용단 대표

한영숙 춤보존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벽파 박재희 50주년 기념 공연  ‘강산연파’

일시/장소 : 11월 21일 아르코대극장

출연 : 박시종(박시종무용단 대표), 노현식(구미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안무자),김진미 (김진미 풍유무용단 예술감독),홍지영(홍지영 무용단 예술감독), 손혜영(손혜영 아정무용단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