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랑 이종상 화백 특별기고]'그림공부'와 '어머님의 눈물'
[일랑 이종상 화백 특별기고]'그림공부'와 '어머님의 눈물'
  •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승인 2013.11.1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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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공부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전 서울대 초대 미술관장/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장/평창문화포럼 이사장
내가 아주 어렸을 적, 그러니까 8.15 광복이 되고 그 이듬해 서울 후암동에 있는 삼광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해방교육 1세대로서 우리 교육을 받기 시작할 무렵의 일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워낙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데다가 덕산에 계신 고암 이응노 선생과 친분관계로 화가의 꿈을 키우셨던 아버지 덕분에 유치원 때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었다. 아버지께서는 완고하신 할아버지의 반대로 고암 선생을 따라 동경유학 길에 오를 수 없게 되자, 청운의 뜻을 접고 본래 전공 하셨던 원예학으로 복귀하시어 지방 군청의 연구기관 공무원이 되셨다.

아버지께서는 직접 과수원을 경영하셨고, 예산 읍내 발연리에 손수 설계하신 집 울타리 안에 미니 동물원을 만드셔서 갖가지 관상용 조류들을 사육하며 나와 함께 스케치 하시는 것이 유일한 취미셨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 곧잘 그리는 걸 대견스레 칭찬하시며 늘 "작은 놈은 화가로 키울 거야" 라고 어머니에게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광복 이듬해에 텅스텐 광산을 하셨던 할아버지께서 거래하시던 명동소재의 적산 전구공장을 불하 받아 경영하게 되셨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서울 용산구 후암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나는 곧바로 삼광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고 가장 자신 있는 도화시간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림 그리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태어난 예산에서부터 서산으로 이사하여 지금은 정치가가 된 변웅전이랑 유치원에 다닐 때 까지 아버지로부터 그림수업을 단단히 받은 바가 있어 어린 나이에도 도화시간만은 칭찬을 들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던 도화시간이 찾아 왔을 때,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우리 반 담임이셨던 여자 선생님께서 내가 그린 그림에 대해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광복 직후라서 인쇄술이 낙후되어 원색도판이 들어가야 하는 새나라의 도화책을 새로 발행 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로 2년이나 지나도록 일본시대 쓰던 도화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만 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바로 그 일본시대 도화책을 1학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임화를 하라는 것이 첫 도화시간의 수업내용이었다. 해방직후 아무리 궁색하고 질서가 아직 잡히지 않았을 때라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쨋든 아무 짬도 모르던 어린 나는 나눠주는 도화책을 펼쳐놓고 구도가 그럴싸한 그림을 골라 등나무 밑에 앉아서 열심히 그려댔다.

도화책의 내용이 하나같이 일장기를 그린 비행기와 군함이 미,영 연합군과 싸워 이기는 전쟁기록화 같은 그림이었다. 어려서부터 닮게 그리는 그림이라면 많이 그려본 솜씨여서 남들보다 쉽게 도화책을 보고 임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다만 수위 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일장기를 지우고 태극기를 그려 넣은 것 말고는 너무도 똑같이 그림을 모사해 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신 담인 선생님께서 “그려준 사람을 바른대로 대라”시며 어린 나에게 추궁을 하시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급기야는 수위아저씨와 옆에 있던 친구들마저 증인으로 세워야하는 큰 사건으로 비화해 버렸다.

그래도 못 믿던 담임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심판을 구한 분이 바로 미술전담 교사이셨던 고수머리 조봉현 선생님이셨다. 전문가의 눈으로 보았을 때 내가 그린 그림이 “1학년 학생의 수준으로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 소질 있는 학생이라면 이 정도를 그려낼 수도 있다"라는 결론을 내려주시는 바람에 나는 가까스로 담임의 혐의선상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그 덕분에 3학년 선배들과 방과 후에 미술실에서 따로 그림공부를 지도 받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너는 싫증도 않나니?. 온종일 그림공부만 하게....." 초등학교 때부터 도화지와 크레용을 손에 든 채 하루 왼 종일 그림만 그려대는 나에게 참다못해 곁에 다가오시어 짐짓 조용한 말투로 타이르셨던 어머님의 꾸중(?)이셨다. 그러나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고 있는 나에게 '그림 공부만'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은 '그림도 공부'라는 잠재의식을 심어줌으로써 나를 화가로 까지 만들어준 엄청난 말씀이 되었다.

만일에 그때 어머니께서 "하라는 공부는 않고 그림만 그린다 " 며 윽박이나 지르셨다면 그림은 '하라는 공부가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그림그리기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어른들 몰래 숨어서 그림을 그렸을 터이다.

하여간 어머니의 이 한마디 말씀은 평생 내가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그림공부'를 하게 만든 큰 원동력이 되었고, 실기와 이론은 하나라는 생각으로 살다보니 한국에서 화가 최초의 철학박사 학위 소지자가 되기도 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