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섭의 여행칼럼]파블로 네루다의 시상(詩想) 발파라이소
[정희섭의 여행칼럼]파블로 네루다의 시상(詩想) 발파라이소
  • 정희섭 글로벌문화평론가/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겸임
  • 승인 2013.11.18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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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섭 글로벌문화평론가/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겸임교수
길이가 너무 길어서 그런지 좁아도 너무 좁아 보이는 나라 칠레.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의 길이는 무려 4650킬로미터에 육박하는데 남반구 전체 길이의 약 43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지도를 봐도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도 잘 모르겠는 이 길고 긴 나라의 중간쯤에 발파라이소(Valparaiso)가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Valley of Paradise’ 가 되니 우리말로 하면 ‘천국의 계곡’ 이라 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남미 제 1의 무역항인 이 도시는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미니 샌프란시스코’ 라 부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이상으로 이곳이 좋았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가 눈을 뜨고 느끼는 것이라면 발파라이소는 눈을 감고 느끼는 것이랄까.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발파라이소는 심장의 고동 소리같이 다가온다.

발파라이소의 라 세바스티아나(La Sebastiana). 칠레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긴 대문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다의 집 이름이다. 그는 언덕 위의 이 집에서 태평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를 써나갔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천국의 계곡에서 파시즘에 저항했고, 민중을 부르짖었으며, 때로는 초현실을 논하며 여체(女體)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그의 집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난 네루다와 시상을 공유했다. 이미 영면한 위대한 문학가의 모방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이 향기를 발했다. 무색무취(無色無臭)였지만 향기였다. 그가 있어 발파라이소는 더 의미가 있었고 아름다웠다. 시인이 만들어 내는 외침과 찬양이 온 도시를 언덕 위에서 휘감아 버린다.

▲거리를 지나가는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도 스스럼없이 음식을 권하는 발파라이소 사람들

항구도시답게 이곳에는 큰 배들이 정박해있다. 선상 레스토랑에서 아로마 향이 나는 칠레 와인을 식전주로 시켜 한 모금 머금어 본다. 그리고 곧이어 칠레의 대표 요리라는 깔디요 데 콘그리오(Caldillo de congrio)를 시킨다. 생선 수프의 일종이라는 이 요리의 맛 보다는 모든 것의 어머니 같은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 좋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맛있는 생선 요리도 바다가 주는 분위기를 앞도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배에서 내려와 이름을 확인하지 않은 광장 주변을 걸었다. 그 날이 주말이라서 그런지 음식을 싸가지고 나온 가족들이 많이 보인다. 지나가는 나에게도 스스럼없이 가져온 음식을 먹고 가라는 그들의 친절. 극동에서 온 아시아의 여행객이 그들의 눈에는 한없이 신기하게 보이는 듯하다.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동양의 온화함이 표현된다. 이런 것을 동질성이라고 불러야하는 것인가. 춤과 노래 소리가 들리고 저 쪽에서는 작은 가요제가 열리는 듯 앰프의 굉음이 시작된다.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자동차로 이동하려면 꼬박 5박 6일이 걸린다는 나라 칠레 여행은 다양성을 보고픈 열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다양한 기후와 그 기후 아래 조금씩 변해가는 동식물의 모습에 구태의연함과 쓸데없는 고집은 사라질 것이다. 내려가다 안식할 수 있는 도시 발파라이소가 있다. 네루다는 시로 말했다.

“ 나는 고양이처럼 자고 싶구나.” 위대한 시인의 시를 느끼고 간다면 더없이 좋다. 유명한 곳만 휙 보고 사라지는 여행 따위는 이 곳 칠레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아니 휙 보고 지나가려고 해도 놔주지 않는다. 칠레는 너무 길어서 한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오히려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곳이다. 가장 잘 그려지는 중심에 발파라이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