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정호승 시인]“치유의 시인이라면 제가 부끄럽지요”
[인터뷰/정호승 시인]“치유의 시인이라면 제가 부끄럽지요”
  • 박설희 시인
  • 승인 2013.11.1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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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설희, 맨발 인터뷰] 등단 40년 11번째 시집 <여행> 펴낸 시인 정호승

이 글은 (사)한국작가회의 회보에 ‘인간의 비극성이 피운 꽃’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인터뷰 글입니다. 회보는 한국작가회의 회원들만 볼 수 있는 소식지여서,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일간문예뉴스 [문학iN]에 실어 여러 독자들에게 선보입니다.    -편집자 주-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중략)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서울의 예수’ 부분

▲정호승 시인
1970년대와 80년대에 정호승 시인은 그렇게 읊었다. 2010년대에 서울의 예수는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목이 마를까. 공교롭게도 서울광장에선 국정원 개혁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계속 이어지고 있고, 서울역 광장에서도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종북좌파 몰이에 여념 없는 집권당과 국정원, 소통 안 된다고 알려져 있는 통치자, 기시감일까, 30여 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너무 흡사한 구도다.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로 서울역은 여전히 활기차고 번잡스럽다. 서울역 KTX 매표소 앞 오후 3시 40분. 정호승 시인은 부산발 KTX를 타고 오는 길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시인이 올해 6월에 낸 시집 제목이 <여행>이다. 등단 40년에 열한 번째 시집이다.

“지금까지 시한테 버림받지 않고 시와 함께 살아올 수 있어 감사하지요.”

-슬픔에 관한 시가 많은데요, 슬픔의 철학을 듣고 싶어요.

“저는 인간을 비극적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의 시의 발화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인간의 비극성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인간에게 비극이 없다면 어쩌면 문학이 꽃피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비극은 인간 삶의 가장 본질이잖아요. 비극 속에서 비극의 반대 되는 어떤 부분을 추구하면서 살지요.

그 추구하는 과정이나 방법으로 문학이 꽃피고 예술이 꽃피는 것이지요. 수련이나 연꽃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물은 오염된 현실이지만 꽃만은 맑고 아름답고 순결하지요. 그래서 내 시의 꽃은 그런 꽃이 되어야겠다 생각해요. 혼탁한 물을 인간의 비극의 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슬픔을 위하여)이라 하셨는데 그 시의 배경은요?

“그 시대에 저는 눈물이 수동적 형태에서 액체화된 존재가 아니고 능동적 존재로서 고체화된 존재로, 시대의 아픔을 타파하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눈물을 깎는다’고도 표현했어요, 날카롭게. 지금은 눈물에서 물의 어떤 원형, 본질로 돌아왔어요. 그래서 물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선함, 물의 본질의 소중함과 가치를 제 시에서도 찾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산문집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 마디>에 사랑, 용서, 상처, 분노, 미움 이런 단어들이 반복되어 나오더군요.

“이번 시집 <여행>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시를 형상화하는 데 밑거름이 돼 있어요. ‘배반’, ‘상처’라는 시도 있어요. 우리 삶의 공통분모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지요. 시는 삶의 본질적인 공통분모를 떠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제가 시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게 가장 제대로 이해하는 게 아닌가, 바람직하다, 시를 쓰는 것도 인간인 나를 이해하고 우리를 이해하는 가장 바로미터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여행’ 부분

-제목이나 시구 중에 ‘-라’의 명령형 어미를 많이 쓰시고 계신데 의도적인가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같은 경우는 임제 선사의 말씀인데 그걸 시집 제목으로 가져온 거지요. 사랑하다가 죽어버리세요는 안 되잖아요.(웃음) 시가 스스로 화살이 되어서 사람의 가슴 속으로 날아올 때 부드러운 화살, 날카로운 화살, 따뜻한 화살 등 여러 가지 시의 화살이 있겠지요. 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화살촉을 지니고 있는 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가슴에 이 시의 화살이 제대로 날아가서 그 가슴을 불태울 수 있을까 하는 걸 생각하다 보니 그런 명령형이 다소 사용된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침묵을 배경으로 하잖아요. 더 이상 이야기를 안 하려고 거기서 끊어버리는. 우리가 절벽 앞에서 서 있다고 해서 산맥이 끝나는 건 아니지요. 오히려 절벽 앞에 섬으로써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의미지요.”

-힐링의 시인이라는 표현도 있는데요. 요즘 힐링이 사회의 화두처럼 돼버렸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상처에 대한 시가 많잖아요, 위안을 주는 시.

“시의 본질 속에 인간을 위로해 주는 역할이 있지요. 먼저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그 성찰을 통해서 스스로 위안 받고 싶은 부분이 있거든요. 자신만 위로받는 게 아니고 그 시를 읽는 다른 사람들도 위안을 받아요. 그래서 치유의 목적으로 시를 썼다고 할 수는 없고요, 요즘은 시가 치유의 방법론으로 이야기 될 때가 있더라고요. 제 시가 그런 시로 인용되는 것을 본 적도 있어요. 저를 보고 치유의 시인이라고 이야기하면 제가 부끄럽지요. 제가 누구를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시의 역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따름이지요. 

그리고 힐링이 화두가 된 것은 우리 시대가 그만큼 상처받고 고통받는 이가 많은 시대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지요.”

-민감한 부분이긴 한데요, 유관순 연작을 쓰게 된 동기가 있을 것 같아요.

“민감한 건 안 물어봐도 됩니다.(웃음) 동기만 얘기할게요. 유관순 열사를 우리 시대 우리 민족의 모성성으로 바라봤어요. 38년 전 <반시>라는 동인지에 발표했지요. 70년대라는 어두운 시대에 사는 여성들의 고통을 누구를 통해 이야기하고 위안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유관순 열사의 모성성에 빗대어서 노래하고 싶었던 거에요. 시의 바탕은 은유입니다. 은유를 이해 못 하면 시를 이해 못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은유가 없으면 시가 이루어지지 않지요. 거기까지만 얘기할게요.(웃음)”

-시에서 기독교 뿐 아니라 불교적 성향도 많이 보이는데요.

“시가 종교와 만날 때 종교적 시가 되면 종교시가 돼버리지요. 기독교적 문화, 기독교 정신을 삶의 바탕으로 깔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에서 용해되는 게 중요해요. 그러니까 불교적 이미지도 얼마든지 시에 가져와서 용해시킬 수 있는 거지요. 저는 80년대 중반에 운주사 석불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불교 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했고 읽다보니 시적 이미지로 차용할 게 많았어요. 그 무렵에 우리 사찰을 다니면서 ‘선암사’, ‘그리운 부석사’, ‘운주사에서’를 썼고 운주사 관련 시들도 몇 편 있어요. 제 책상 위에는 앉아 계신, 주먹 만한 부처님이 한 분 있어요. 그 옆에는 제가 가톨릭 신앙인이기 때문에 십자가상이 같이 있어요.”

-요즘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20세기 마지막 영성가 헨리 나우웬이 쓴 책 <탕자의 귀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관계가 힘이 들 때 사랑을 선택하라.’ 그 말씀이 화두에요. 우리는 누구나 관계 속에 살잖아요. 가족, 이웃, 이 시대, 자연, 절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데 제 경우에 그런 관계들이 좋지 않았을 때 항상 미움을 선택해왔어요. 남은 인생이라도 관계가 힘이 들 때 사랑을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사랑도 노력하는 거거든요.

어떤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관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미움에다 관점을 두면 나는 너를 미워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에다 관점을 두면 나는 너를 덜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거지요. 미워하는 게 아니고 덜 사랑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도 미움이 아니라 사랑에다 관점을 두고 살아왔더라면 누구를 미워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지금까지 노래로 불린 시가 60여 편이나 된다.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서정성 짙은 시들이 대중의 가슴을 파고들기 때문일 것이다. ‘정호승은 타고난 시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본인은 가슴 속에 아무리 많은 시가 들어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슴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은 노력이다, 노력에 의해 시인으로서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고 잘라 말한다.

“전 교사, 전 금융인, 전 국회의원은 있는데 전 시인, 전 소설가는 없어요. 항상 시를 쓰는 사람인 거지요. 현재진행형의 존재. 시인으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쓸 수밖에 없는 존재니 열심히 시를 써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정호승 시인은 서울역에 관한 시도 몇 편 있거니와 서울역을 좋아한다고 했다. 어느새 퇴근 시간과 겹치면서 서울역엔 더 많은 인파가 몰려들고 있다. 더 어두워지기 전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시간. 문득“우리들 생의 슬픔이 당연하다는 / 이 분단된 가을을 버리기 위하여”(‘슬픔은 누구인가’ 부분)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시인 박설희는 2003년 계간 <실천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이 있다. 지금 사)한국작가회의 회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