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일본속보]한일 화장 문화의 현실 ; 공수래 공수거를 느끼며-①
[이수경의 일본속보]한일 화장 문화의 현실 ; 공수래 공수거를 느끼며-①
  • 이수경 교수/도쿄가쿠게이대학
  • 승인 2013.11.25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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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수경 교수/도쿄가쿠게이 대학
2013년 11월 14일, 일본 궁내청은 1617년 이래 처음으로 현 아키히토(明仁) 일왕(일본에선 천황이라 칭함)부부의 사후 장례는 매장이 아닌 화장을 하여, 도쿄 하치오지시 무사시료(八王子市武蔵陵)에 선친보다 작은 규모의 묘에 안치한다는 발표를 했다.

유교성향이 강한 한국도 요즘은 화장 및 납골 문화가 널리 퍼져있고, 바쁜 현대사회에 맞춘 간소화 경향에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해의 한국 화장률이 74%라고 발표했는데, 일본의 화장률이 99.9%임을 감안한다면 한국 보다도 일본이 화장 및 납골당 문화가 일반적이다. 현재의 일왕 부부도 그런 시대적 흐름과 사회적 경향을 반영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기왕 소개한 김에 필자가 일본서 느낀 현재 일왕 부부와 한국 관련 기사를 소개한다.
2차대전 말기 연합군의 공습을 피해서 피난을 했다가 돌아온 어린 왕세자(현 일왕)는 참혹하게 폐허가 된 도쿄의 현실을 목격하게 되고, 전쟁의 잔혹함이 두번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는 평화론을 염두에 둔 연호 헤이세이(平成, 일본에서 사용되는 연호)시대를 명명하였다. 그리고, 과거 식민지 통치지배를 해 왔던 한반도와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둔 그는 2001년 12월23일의 68세 생일에 교토 헤이안시대를 연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임을 밝혀서 일본과의 관련성을 역설한 바가 있다. 갑작스런 그의 속내가 표출되었던 터라 당시 궁내청 및 일본 정부는 언론의 언급을 규제하는 듯 하였고, [News week]지에서만 다양한 분석 기사가 게재되었다.

일본은 1868년의 메이지유신과 더불어 강력한 제국주의 전개를 노렸던 세력들에 의해 [천황의 神格化]가 형성됨과 더불어 군국주의 노선에서 침략전쟁을 자행해왔고, 패전후인 1946년 1월에는 일왕의 [인간 선언]과 더불어 [일본국의 상징과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적 존재로 헌법1조에 게재된다. 결코 군대를 가지지 않고 국제 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헌법에 명시하면서 국제사회에 복귀한 일본에서의 일왕의 정치적 활동은 한정되어 왔으나 여전히 일본 국민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로 남아있기에 그들의 존재는 여느 정치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활동에 대해 각계 각층이 예의 주시할 뿐 아니라, 일거수 일투족이 정책적 영향력과 관련되는 사회 환경상, 일왕부부가 쉬이 속내를 토로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2005년6월28일, 과거 일본의 격전지였고, 전쟁 노동자로 1천 여명의 한국인이 끌려가서 희생이 된 사이판에 [지난 2차대전 때 전몰한 모든 해외 전몰자들을 추도하고 세계 평화를 염원한다]는 취지로 방문했던 일왕부부는 일본측이 건립한 [중부 태평양 전몰자의 비] 및 패망 때 미군에게 투항을 거부한 일본군 병사 및 일본인들이 뛰어내린 만세 절벽(죽을 때 일본 및 일본 천황 만세를 외치고 자살했다는 절벽, 일본에서는Banzai Cliff로 칭함)에서 추도를 한 뒤, 그 곳에서 200미터 가량 떨어진 한국인 전몰자 위령탑 ‘태평양 한국인 희생자 추념 평화탑’에도 일왕 부부가 방문해 묵념으로 추도를 하였다.

애초 일본 외무성조차 한국인 유족 단체의 방문 요구에도 일왕의 평화탑 방문은 없을거라 표명했던 터라 급작스런 일왕부부의 일정 변경은 한국측에서도 놀랐고, 무엇보다도 그런 상황이었기에 당시 평화탑에는 한국인 관계자가 한 명도 없었다 한다. 그만큼 주변 관계자들에 관리되는 스케쥴인 만큼 미리 알리면 그들의 취지대로의 실천이 쉽지 않으리란 예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2010년10월, 나라(奈良)에서 개최된 ‘제1회 동아시아 지방정부 회합’에서도 2001년의 “‘속 일본기’에 따르면 간무 천황 생모는 백제 무령왕을 선조로 하는 백제 도래인(渡來人)의 자손이다”라는 언급을 재차 강조하며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강조했었다.  군사적 재무장 정책과 시대역행적인 우경화 노선이 현저해지면서 일왕의 정치적 이용을 위한 정책 전략이 꿈틀거리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과거 식민지 지배통치에 대한 반성과 희생자 추도에 대한 일왕부부의 행동 및 발언에 가해지는 행동적 제약도, 주변 간섭도 적지는 않은 듯 하다.

우익세력들의 일왕부부 절대 숭배화 움직임이 여전한 가운데 천황제 폐지론을 논하는 시민운동의 움직임 등, 다양한 왕족 존폐론이 있지만 지금도 일왕 부부는 일본 시민들의 정신적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다.

팔순을 맞이한 노부부는 3.11 동북대지진 직후, 여느 정치가들보다도 빨리 현장 피해자들 위문을 갔었고,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후 불거졌던 영토문제 재론 때 미치코 왕비(민간인 출신)는 한국관련 역사책을 주문하였다는 소리도 들렸다. 일왕 측근의 얘기에 따르면 왕실 생활을 보다 축소시키며 검소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부부라고 평가되는 만큼, 이번 장례식 준비에 임한 화장론은 그만큼 현실적 시대 상황을 반영하며 불필요한 절차 등을 줄이고 화려한 매장 문화를 가급적 축소시키겠다는 그들의 의도라고 볼 수 있겠다.

필자가 이 뉴스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지난 11월 2일, 필자가 코리아나 호텔에서 개최된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주최의 정책포럼에 참가, 발표를 하던 당일, 부친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당뇨병과 류마티스 합병증 등으로 오랜 세월 힘들게 살다 가신 분이셨기에 생전에 당신은 조상들을 모신 강릉의 선산보다 아파했던 삶을 훨훨 털고 세상을 떠나고 싶다며 화장을 강하게 원하셨기에 토장보다 화장을 선택하게 되었다.

필자는 어린 시절 개인적 트라우마 때문에 각국의 무덤은 많이도 찾아 다녔으나 이 나이가 되도록 장례식을 가 본 것은 내 부친상이 처음이었다. 화제를 바꿔서 아버지의 입원 및 화장을 보고 느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려한다.

아버지는 당뇨병 합병증 증세 등으로 몇 번인가 입원을 하셨는데, 처음 입원을 한 것은 25년 전 쯤, 필자가 일본에서 잠시 아버지를 모셨을 때 였다. 당뇨병 후유증이 오면서 87Kg의 아버지는 47Kg으로 체중이 격감했고, 합병증 증세가 다양하게 나와서 몇 개월 동안 간병에 임했던 적이 있었다.

필자의 친구 의사들이 집도를 한 후유증 관련 수술 후, 몇 개월 동안 인슬린 투약을 했더니 건강은 회복되셨는데, 그 때 처음으로 약한 아버지 모습이 안타까워 간병에 몰입하다 필자가 쓰러졌던 기억이 있기에 환자를 간병하는 가족의 건강도 중요함을 절실히 느꼈던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내 사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정작 부모님이 노쇄하여 가는 것에 무관심한 사이에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참으로 불효자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10월 초, 동생들로부터 아버지의 중환자실 입원 소식을 듣고선 일본의3연휴 첫 날, 비행기표 찾기를 도와 준 제자들 배려로 겨우 Air Busan이란 비행기 티켓을 구해서 부산진구에 있는 B병원으로 향했다.

필자는 한 때 삶의 전환을 시도하려고 처음 일본에 왔을 때 의대를 지망하며 공중위생학 등의 공부를 하면서 지인 의사들의 협력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해부된 니코틴 가득한 사체의 간장을 본 순간, 아무래도 필자에겐 용기가 부족함을 느끼고선 역사학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수술 현장 입회나 의사 친구들 덕분에 병원을 가까이 하고 살았기에 중환자실은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았다. 단지, 예상 밖으로 노쇄하고 변형된 손의 뼈 상태 등을 보면서 세월의 무심함과 나의 무관심에 대한 반성만이 일 뿐이었다.

정해진 하루 두 번 30분 씩의 면회는 짧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속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고, 50년 넘게 함께하신 아버지의 입원으로 오열과 자책만 하시며 몸을 가누지 못 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오랜만에 목욕까지 시켜드렸다.

하지만 결국 휴강하고 급하게 갔기에 며칠 뒤엔 도쿄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회복을 보이시고 일반 병실로 옮기신 아버지는 직후에 다시 중환자실로 옮기셨다. 면역이 약해진데다 폐렴으로 폐에 물이 차고 의식을 잃었기에 가망성이 30%라는 소리를 듣고선 학교 중요 업무를 동료 교수들 4명에게 부탁한 뒤, 250명의 인권학 수업만 마치고선 부산행 티켓이 없어서 하네다와 김포간 티켓을 급조 후, 저녁 비행기로 김포로 향했다. 도착하여 짐을 찾으니 밤 11시 30분.

부산으로 가는 KTX 마지막 열차는 밤 11시 30분에 끝났었고, 형제들은 이미 부산으로 떠난 상태라서 425킬로 떨어진 부산 가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처음으로 고속버스 심야우등을 타고 부산을 향했다. 12시 넘어서 출발한 고속버스는 새벽 네시를 넘어서 부산 노포동이란 곳에 도착하였고, 앞뒤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택시로 바로 B 병원으로 갔다.

도쿄서 도착한 절박한 상황을 말하자 잠시 기다렸다 짧은 면회 시간을 배려해 주길래 들어갔더니 지난 번과는 달리 이미 입에는 인공호흡기가 부착되어 있었고, 호스 거부로 생긴 입 주변의 상처가 고통에 대한 처절함을 말 해 주고 있었다. 미어지는 가슴을 자제하고선 겨우 버티시는 아버지 귓가에 대고 지난 날의 에피소드와 함께 꼭 재기하셔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청각의 반응 탓인지 가슴 언저리가 벌겋게 변하며 답을 해 주셨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