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일본속보]화장 문화의 현실 ; 공수래 공수거를 느끼며-②
[이수경의 일본속보]화장 문화의 현실 ; 공수래 공수거를 느끼며-②
  • 이수경 교수/도쿄가쿠게이 대학
  • 승인 2013.11.25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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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

▲필자 이수경 교수/도쿄가쿠게이대학
면회까지 다른 가족들과 합류한 뒤, 낮 면회를 마치고 주치의의 설명을 듣고 싶어서 신청을 했더니 진료실로 가라고 한다. 간병을 맡아주던 분이 주치의를 챙겨야한다기에 그런 문화에 익숙치않게 살아왔던 필자지만 챙겨들고 집도한 의사를 찾았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낀 것은 개인 성격인지 혹은 한국의 병원 분위기 탓인지 모르지만 일본의 수술 전후에 행해지는 정중한 설명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필자보다는 분명 젊어보이건만 영어와 반말을 섞어가며 시술상황과 대응책을 설명하는 의사의 표현은 의료종사인 치고는 친절하고 성실한 태도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영어 용어 사용이 많기에 간단한 영어로 되받으니 [우리는 영어로 하니 대화가 되네요]라고 말하고선 다음 부턴 경어를 사용한다.

그 뒤, [아빠(이런 표현도 필자는 익숙할 수 없었다)는 10%의 가능성 밖에 없지만 열악한 한국 의료보험시스템의 현상 이해와 보험외 약을 마음껏 투약해보면 살 확률도 있다]고 말하기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말하며 나왔지만, 필자로선 익숙이 안 된 탓인지 씁쓰레함을 불식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조금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차라리 지인들 소개를 받고 다른 곳으로 옮겨보고 싶었지만, 이미 몸은 부기로 가득했기에 아버지의 생명력을 믿으면서 다음 날의 서울 교포정책포럼 발표에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드린 뒤,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울행 열차를 탔다. 열차 속에서 주마등같이 스쳐가는 아버지와의 숱한 기억땜에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나왔다.

넋 나갔던 탓에 서울역에서 숙소까지 택시를 탔는데 어리석게도 택시에서 내리면서 중요한 책 자료나 컴퓨터가 들어있는 트렁크 가방을 택시에 놓고 내렸다. 이미 차는 멀리 가버렸고, 현금 지불을 했던 터라 필자가 기억하는게 없었다. 단지 흰머리 안경의 운전기사였다는 사실 밖에.

망연자실하면서 주최측 기자들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하고선 지인들에게도 연락하여 교통 방송과 유실물 센터, 전국 경찰 연락망 등, 가능성이 있는 왠만한 곳은 다 찾도록 수배 부탁을 했다. 물론 관련 CCTV도 물었으나 내린 곳이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물건을 놓고 내렸을 때는 택시번호 혹은 회사, 그리고 신용카드 결제가 중요 실마리가 된다는 것을 체험한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다짐하며 11월2일에 포럼 발표장에 들어가니 와이파이가 연결 되더니 새벽에 아버지가 운명하셨다는 동생들의 SNS대화창이 떴다. 누나에겐 일부러 전화 하지 말라는 배려의 대화들도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으나 아버지라면 내가 맡은 일을 제대로 마치는 것을 더 원하시리라는 생각에 내색을 않고 발표를 마쳤다. 인내하기에는 참으로 벅차고 길기도 긴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포럼을 마치고 간단히 인사를 한 뒤, 지인 교수 안내로 서울역에서 부산행 열차를 탔다. 중간에 대구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는 제자가 장례식장에 먼저 갔다가 동대구역에서 필자를 기다린다고 하여 경황없이 플랫폼에서 만났다. 깊은 배려로 정신없는 필자를 지탱해 준 그녀가 고마웠다. 역에서 헤어져 부산역에 도착하여 병원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더니 웃으시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의 빈소가 마련되어져 있었고, 관계자들이 보낸 조화가 입구 양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필자를 기다렸던 형제와 가족들이 내 준 상복은 어릴 때 필자가 봐왔던 소복이 아니라 검정색 개량 한복이었다. 유교식 절차로 동생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절을 하자니 겉잡을 수 없는 눈물을 결국 참지를 못 했다.
하지만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는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내면서 느낀 것은 많은 친인척 지인들의 방문으로 시끌벅적하였기에 비애에 찬 시간 만은 아니었다. 또, 필자에겐 몇 십년 만에 만나는 친인척들도 있어서 함께 기억을 더듬기도 했고, 서울서 수업 중에 와 준 동료 교수나 감기를 앓으면서도 와 준 언론사 친구도, 예상 밖의 제자들도 알고 찾아와줬기에 참으로 마음 따스한 시간들이었다.

발인 당일, 입관 직전에 아버지 마지막 모습을 끌어안으니 마냥 주무시는 듯하였지만 몸의 온기는 사라진 뒤여서 [삶과 죽음]의 현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장례식을 통하여 상주인 아들 중심의 절차가 되었고, 다음에 며느리, 친손주, 그 다음에 딸이라는 순서(저출산의 사회화가 계속 되는 시대 상황에선 개선할 점도 많았다)를 확인하였다. 필자가 생전 처음 장례식에 임했기에 다른 식장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이 부분은 각설하기로 한다.

동생들의 친구들이 운구를 옮긴 뒤, 버스와 영정차로 나눠서 타고 병원서 예약한 부산 근교의 화장터로 옮겼다. 우리는 아침 일찍 화장터를 향했으나 화장 순서가 밀리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3남1녀의 장녀인데, 장남이 아버지와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았었기에 특히 눈물이 많았었다. 화장 소요시간은 약 2시간 가량, 각자의 기억 속의 아버지와 이별을 하며 오열을 하는 가운데 재가 되어 납골을 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한 줌의 재]가 될 것을 그토록 고통스러이 사시다 가셨나? 하는 생각과, 건강하게 살기 위해 남은 우리도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각종 수속을 마치고는 병원으로 돌아와서는 상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친척들과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 후에 손님을 배웅하고선 형제와 어머니만 남게 되자 필자도 학교로 돌아가야 하던 터라 아버지의 사망신고 등의 급한 행정상 수속을 마치려고 서로 협력을 하였다. 그리고 도쿄로 돌아오기 위해 마음을 추스리는 와중에 4일만에 나를 태웠던 서울의 택시 운전기사로 부터 동생 휴대전화로 연락이 들어왔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었고, 방송, 경찰 유실물 조사 등의 수배가 다양한 형태로 들어간 4일 뒤에 연락이 왔기에 다른 것은 일체 묻지를 않았고, 그냥 교포문제연구소에 전화하여 가방을 받아놓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선 오후에 서울로 향했다. 트렁크 속의 내 노트북 체크를 했더니 누군가가 매일 만졌던 흔적이 데이터에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사용해선 안될 필자만의 정보가 많기에 무단 사용은 법적 제재가 수반된다는 것 쯤은 상대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다른 물건이 분실되지 않았던 터라 모든 것을 잊기로 하였다. 더 복잡히 생각해본들 내 구멍난 듯한 공허한 정신만 어지럽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입원에서 납골까지 경황없이 흐른 시간 속에서 화장 문화의 경험과 가슴앓이와 치유, 아버지를 통해 본 나의 가야할 길 등, 실로 다양한 산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자식에 대한 큰 교육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도 학교 캠퍼스를 걷다가 낙엽이 떨어지면 절제를 못하고 눈물이 쏟아진다. 엊그제 교수회의를 마친 뒤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를 잃은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모두 4-50대의 중년들이지만 부모님에 대한 아픔으로 가득했고, 도쿄가쿠게이대 통곡 모임을 만들자고 의견 투합까지 하기도 했다. 한 동료는 사찰의 승려인데 10월 말에 밀장으로 했기에 12월에 다시 장례식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의 가족과의 이별을 아파하며 서로 협력해서 위로하며 건강하게 살자는 결의 아닌 약속까지 하게 되었기에 학교가 따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좋은 기억들만이 떠 올라서 더더욱 믿겨지지 않는 아버지의 죽음을 치룬 뒤, 덩그러니 남겨진 내 영혼이 주체하지 못할 때, 팔순이 된 일왕 부부도 화장을 선택했다는 뉴스가 나오길래 필자의 마음도 토로할 겸 소개를 해 보았다.

장례식에 직간접적으로 필자를 지탱해 주신 한일 양국의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생각지도 못 했던 제자들의 감동적인 배려에도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시간이 흘러야 감정이 추스려지겠지만, 지금은 불편한 몸으로 아버지 이야기만 하시는 어머니가 부디 건강을 되찾아서 올 겨울을 버텨주시기만을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