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아트 아카이브의 현실과 대비책
[윤진섭의 비평프리즘]아트 아카이브의 현실과 대비책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3.12.0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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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이틀에 걸쳐서 연구실 대청소를 했다. 참으로 오랜 만에 하는 대청소다. 세세한 곳까지 들쳐 털어내고 나니 묵은 때와 먼지, 잡동사니들의 천국이다. 세월이 가져다준 삶의 더께다. 먼지 쌓인 팜플렛에서부터 각종 도록, 포스터, 엽서, 학생들의 리포트, 책, 자질구레한 소도구들에 이르기까지 15년간 쌓인 세월의 흔적이 방안 구석구석에 가득하다.

캐비닛 안은 또 어떤가? 나의 게으름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공간이 바로 캐비닛 안이다. 생활에 쓰이는 각종 물건들을 비롯하여 책, 서류, 슬라이드 등이 4단의 캐비닛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나에 관한 기록물들이다. 나는 나 개인의 아카이브는 비교적 잘 챙겨왔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그저께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자료실 개관식 행사에 다녀왔다. 진열된 여러 아카이브 중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단연 길진섭의 해부학 노트와 변월용의 편지들이다. 오랜 세월의 잠에서 깨어나 대중에 공개된 그것들은 가위(可謂) 국보급에 가깝다. 정성들여 쓴 육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숙성된 아우라를 뽐내는 듯하다. 그것들은 당사자들이 이미 고인이 된 상태기 때문에 벌거벗은 채 연구자의 분석을 기다리고 있다.

개인자료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을 생명으로 한다. 편지를 비롯하여 일기, 노트, 대담문, 서적, 보고서, 사진, 공문서, 녹음과 녹화 테이프 등 모든 개인적 기록물은 순도 99%(아마도 100%란 불가능할 것이다.) 상태로 보존돼 있다가 아카이브 전용 기관에 이관되어야 한다. 부끄러운 기록물, 따라서 생애에 누가 되는 기록물을 스스로 파기하는 것은 생의 일부를 부정하는 일이다.

아카이브에 대해 갈증을 느끼던 차에 마침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마침내 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가 창립된 것이다. 동 협회는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사계의 권위자 및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11월 19일 동숭동 소재 예술가의 집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1. 아트아카이브의 위상정립, 2. 아크 아키비스트의 자질 향상, 3. 아트아카이브 기관간의 협력체계 구축을 창립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사실, 우리의 오랜 현대미술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인체의 두뇌에 비유할 수 있는 아카이브에 시선을 돌리게 된 것은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규장각 도서 등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우리의 미술 아카이브는 바로 그런 전통의 힘에서 나온다. 미술사 기술이 그런 실질적인 아트 아카이브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아트 아카이브의 유용성과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에 한국 아트 아카이브의 선구자인 김달진 선생이 평생 동안 모은 미술자료를 가지고 세운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존립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현재 위치한 홍대 앞의 건물은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기금으로 세를 들어 있는데, 2 년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이제 환수를 해야 할 시점이란 것이다. 그 기간이 내년 9월말이다. 그 안에 가닥을 잡지 못하면 길거리로 나앉을 판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공동의 대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울러 정부도 이 문제를 깊이 인식, 특단의 대비책을 세워 줄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 윤 진 섭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미학과 졸업.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 철학박사.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 총감독,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국립현대미술관 초빙큐레이터(한국의 단색화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현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 호남대 교수,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저서로 <몸의 언어>,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현대미술의 쟁점과 현장>, <한국의 팝아트>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