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화폭 뚝심있게! 한국 대표 여류화가 김종복
60년 화폭 뚝심있게! 한국 대표 여류화가 김종복
  • 이은영 기자
  • 승인 2013.12.1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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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림만 바라보고 생각하고 살아왔을 뿐이에요”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여류 화가의 대표주자인 김종복 작가에게 ‘헌정하는’ 대구 김종복미술관에서 내년 2월 28일까지 개관 기념전을 선보이고 있다.

개관 기념전에서는 1947년부터 올해까지 김 화백이 50여 년간 걸어온 화가로서의 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 39점을 선보인다.

▲ 김종복 화백

이번 기념전에서는 김 화백의 대표작 중 대작인 ‘산’ 연작을 비롯해 대구의 지역적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기 작품, 다채로운 색채와 강렬한 붓터치가 인상적인 유화 등이 소개된다.

대구가톨릭대 효성캠퍼스에 들어선 김종복미술관은 대구와 경북지역 캠퍼스에 있는 미술관 중 작가의 이름을 딴 첫 미술관이라는 데서도 의미를 가진다.

또 김종복미술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 지어진 미술관으로서 큰 의의를 지닌다. 상당수 작가의 이름만 빌려오면서 대표작 한 점 놓지 않은 미술관, 예술적 평가가 낮은 생존작가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이 운영되는 것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면이다.

이 미술관은 대구가톨릭대 교수로 정년 퇴임한 김종복 화백이 기증한 유화 77점, 수채화 3점, 드로잉 20점 등 모두 100점의 작품이 바탕이 돼 건립됐다.

김 화백은 평생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려왔다. 1975년 프랑스 파리 르 살롱 국제전에서 금상을 받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뒤 20여 회 개인전과 300회 단체전에 참여했다.

일본과 프랑스에서 그림 공부를 한 뒤 대구가톨릭대 교수 및 학장으로 20여년 재직하며 후학 양성과 학교 발전에 힘썼다.

희끗한 머리카락에서만 세월을 짐작할 수 있을 뿐, 여든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종복 화백의 인생과 작품세계에 대해 들어본다.

오랜 생각 끝 용단…작품 기증으로 지어진 김종복 미술관

1930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종복 화백은 경북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과 프랑스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프랑스 파리 아카데미 그랑 쇼미엘을 수료하고 파리 국립미술학교 특수응용미술학교 도안과 대학원 (연구과) 졸업한 뒤 1976년부터 대구가톨릭대학교(구 효성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며 1995년 정년퇴임했다.

▲ 동산의 선교사 지대(현. 제일교회 자리) 1947

 

▲ 무한(하늘과 대지) 1984

출생지와 교수로서 정년 퇴임을 한 곳이 대구인 만큼 그는 한국을 대표하면서도 대구를 사랑하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지역 화가’였다. 그래서 그의 초기 작품에는 대구의 지역적인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1960년대 과감한 구도와 굵은 윤곽선, 상징적인 색채로 개성을 드러내며 명성을 쌓았다.

그래서 ‘김종복 미술관’은 대구(경산 하양)에 들어설 수 밖에 없었다. 김종복 미술관은 김 화백이 2011년 5월 자신의 대표작인 ‘설악산’(200호), ‘남프랑스’(200호)를 비롯해, 유화·수채화·드로잉·기념출판물 등 80여 점 작품을 무상으로 기증하며 토대를 쌓았다. 금액으로만 200억 원이 넘는다는 평가였다.

당시 김 화백은 “20년간 몸담은 학교여서 애정과 추억이 남다르다”며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작품을 기증하게 돼 기쁘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어 “자녀들에게 줘도 되지만 오랜 생각 끝에 결단을 내렸다”며 “한자리에 모아 영구보존할 수 있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추억이 많은 학교”라며 “20년동안 모교같은 애정이 쌓이게 됐다”는 말로 학교 측에 감사의 인사도 잊지 않았다.

2년 여가 지난 2013년 9월 27일, 마침내 대구가톨릭대 효성캠퍼스 내 김종복미술관이 개관식을 통해 대중에 모습을 공개했다. 한국 서양화 1세대인 김종복의 명성에 어울리는 시설을 갖췄다.

▲ 김종복 미술관 전경

기숙사 입구 성바오로관 1층에 660여㎡ 규모로 지어진 미술관은 총 5개 전시실과 영상전시실, 리셉션홀 등을 갖추고 있다. 1~2 전시실은 자연의 채광을 그대로 머금은 곳이고, 리셉션홀과 로비에서는 캠퍼스의 아름다운 모습이 통유리를 통해 그대로 들어온다.

세계적 수준의 수장고와 보안시설도 마련됐다. 최첨단 시설과 안락한 전시공간, 김종복이란 이름 석 자가 주는 무게감 덕분에 대구를 벗어난 곳임에도 하루 평균 100여 명 안팎의 관람객들이 방문하며 관심을 방증하고 있다.

김종복 작품 세계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 선보여

현재 이곳에서는 개관기념전으로 1952년부터 2013년까지 김 화백의 50여 년간 일대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 39점이 선보이는 중이다.

대구의 지역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기 작품을 비롯해 다채로운 색채와 강렬한 붓 터치가 인상적인 유화들을 만날 수 있다.

전시되는 주요 작품은 `오데옹 꽃집`(1974) `무한(하늘과 대지)`(1984) `달의 사막`(2008) `산`(2013) 등이다.
이 중 달의 사막은 김 화백의 여전한 ‘소녀 감성’과 ‘초기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 달의 사막 2008

“중학교 때 배웠던 노래 중에 ‘달의 사막’이란 게 있었어요. 왕자와 공주가 달밤에 긴 여행을 노래한 곡이죠. 그 시절 무작정 사막을 가고 싶다는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가 붓으로 표현해봤습니다. 제 마음 속에 있던 상상의 풍경이죠.”

70년이나 지났음에도 김 화백의 붓은 앳된 소녀의 마음을 표현했고, 그 화폭에 담긴 몽환적인 분위기는 관객들마저 환상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일제 치하·한국전쟁에도 꿋꿋이 걸어온 60년 화폭 인생

그러나 김 화백의 다른 쪽에는 그림을 향한 열정과 60년 외길 인생을 걸을 수 있던 뚝심이 담겨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등 한국 역사상 암흑기를 거쳤지만,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뜻을 두고 꾸준히 붓을 들었다. 중학교때 미술선생님 눈에 띄게 됐고 주변 친구들도 다 화가를 권유할 정도로 미술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시대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고, 경제적 형편도 넉넉지 않았던 때였다.

“미술 재료는 고사하고 하루 먹고 살 걱정이 앞서던 때였죠. 해방된 뒤에는 정부도 흔들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제대로 된 교육이 어려운 상황이었죠. 그래서인지 우리 세대에 지금까지 남아서 그림 그리는 분들은 거의 없어요. 그때는 미술학원 같은 것도 없었고 오로지 학교에서 배우는 수 밖에 없었죠. 다행히 학교 미술부에 있으면서 혼자 많이 그렸죠. 도쿄에서 공부하다 오신 장석수 선생님께서 실력이 뛰어나신 분이라 많이 배울 수 있었고 미술이 천직이 됐죠. 그때만 해도 작가들에 대한 인식도 안 좋고 입에 풀칠도 못한다고 해서 부모님들은 반대를 하셨는데 꿋꿋이 붓을 들었죠.”

프랑스에서 새로운 눈을 떠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의 미술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고 그림을 배우려는 열망을 가진 채 일본으로 밀항해 도쿄에 머무르게 된다. 이후 마흔이 넘어 파리로 유학을 떠나 이응로·이성자 화백 등과 친분을 쌓았다.

“외국에 쉽게 갈 수 없던 때였어요. 프랑스에서 온 초대장이 없으면 공항 근처에도 못 가던 시절이었죠. 여권 내는 것도 1년이나 걸렸습니다. 다행히 파리로 간 뒤에 앙드레 웨유라는 세계적인 화랑에서 데뷔하고 작품활동을 많이 했죠.”

당시 그는 프랑스 파리 아카데미 그랑 쇼미엘과 파리 국립미술학교 특수응용미술학교 도안과 대학원을 거치며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72~1982년 France Salon D'Automne 입선, 1973년 Cote D'azur 칸느 국제전 최우수상, 1974년 프랑스 도빌 국제전 대상과 파리 아카데미 콩쿨 국제전 동상을 받았다. 1975년 프랑스 파리 르 살롱 국제전에서 금상을 받고 1975~1976년 프랑스 국립미술연감에 작품이 수록되며 작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화가로서 큰 전환점을 맞이한 프랑스 유학시절이었다.

“큰 충격을 많이 받았죠. (우리나라에선) 현대 미술 다른 계통의 작품을 옳게 보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구상 추상 다 나름대로의 존재가치를 알아보는 법을 배웠어요.”

1970년대 그의 작품세계는 프랑스, 스페인, 이집트, 이탈리아 등 풍경을 분방한 필치로 과감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1975년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그는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응로 화백이 거기 계셨는데,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제가 귀국 얘기를 했어요. 이 화백께서 ‘교육자가 되려하면 가고, 작가가 되려면 파리에 있으라’고 하시더라구요. 참 서운하고 안타까웠지만 귀국해야 되는 형편이라 서운하지만 오게 됐어요.”

다시 한번 인연 맺은 도시 대구

이후 대구와 그의 인연이 다시 한번 시작된다.

“부산여대와 경남여대에서도 오라는 얘기를 했는데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로 오게 됐어요. 왜냐구요? 서울에서 제일 가깝고 친정 근처였기 때문이었죠. 1976년부터 20년 꼬박 이 학교에 있었죠. 학생들과 늘 봄가을로 전시회 준비하면서 늦게까지 있던 적이 많았고 모교같은 애정이 쌓인 곳이에요.”

이렇게 김 화백은 그가 태어난 곳이자, 성장한 곳, 후학들을 양성하고 화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들어선 곳에 다시 섰다. 성성한 백발에도 늘 붓을 든 채.

 

▲ 지난 9월 27일 김종복미술관 개관식에서 김종복 화백이 본지 이은영 발행인(위쪽)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화가 김종복

그는 60년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자연’이란 말로 응축한다. 그의 작품에 유독 산, 대지, 하늘 같은 자연이 많이 담긴 까닭이다.

“자연을 무척 좋아해요. 하늘과 땅 사람과 하나가 돼 우주의 총체를 이루는 무한한 세계를 표현하려 해요. 특히 산은 봄여름가을겨울 다양한 색채와 생물이 존재하는 곳으로 변화무쌍한 자태를 볼 수 있는 곳이죠. 인간을 압도할 수 있는 대자연요. 자연에서 오는 공기와 바람과 소리를 선과 점으로 일필로 자유분방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산을 참 좋아하는데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직접 가는 것보다는 차를 타고 구경을 많이 하죠. 바라보는 것도 참 즐거운 일이죠.”

자연을 사랑하는 김 화백은 ‘산(山)의 작가’로 널리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는 산에서 드로잉을 해서 집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 보이는 것 외에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극도로 엄격하게 화면을 단순화시켜서 자연에서 오는 모든 느낌을 감정을 토로한다.

이런 감정이 담겨있는 화풍은 강렬하고 웅장하다. 대자연의 기운을 강한 색으로 주로 표현해왔다.

 

▲ 설악산 1995

그는 18일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전화인터뷰에서도 작품세계에 대한 열정을 가득 담아냈다. 늙고 병들었지만 붓을 들 힘이 없어질 때까지 자연을 담아내겠다는 그의 의지는 앳된 소녀의 마음가짐 그대로였다.

“예술의 길이 멀고도 험난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하는 게 중요해요. 꾸준하고 지속적인 작업으로 자신의 개성과 자신만의 감정이 담긴 작품세계를 가지는 게 예술가의 바른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 역시 더 오래도록 작품을 통해서 대중과 소통하고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요.”

◆김종복 화백 프로필
약력
1930 대구 출생
1950 경북여자고등학교 졸업
1956 일본유학
1972~1975 프랑스 파리 유학 프랑스 파리 아카데미 그랑 쇼미엘 수료
1974~1975 파리 국립미술학교 특수응용미술학교 도안과 대학원 (연구과) 졸업
1976~1995 대구가톨릭대학교 (구.효성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역임
1995 대구가톨릭대학교 (구.효성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정년퇴임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 신미술회 회원, 프랑스 르 살롱(Le Salon) 회원

주요 수상 내역
1991 제2회 최영림 미술전 수상
1985 대구시 문화상 수상
1976 파리 Sud a Juvisy 국제전 동상
1975~1976 프랑스 국립미술연감 작품 수록
1975 Le Salon전 (Le Salon Artistes Francais) 금상
1974 프랑스 도빌 국제전 대상
1974 파리 아카데미 콩쿨 국제전 동상
1973 Cote D'azur 칸느 국제전 최우수상
1972~1982 France Salon D'Automne 입선
1969 제18회 국전 입선
1954 제3회 국전 입선
1954 3.1절 기념전 대구USIS화랑
1953 제2회 국전 입선(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