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랑 이종상 화백 특별기고]수묵화와 필묵2
[일랑 이종상 화백 특별기고]수묵화와 필묵2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서울대 명예교&
  • 승인 2014.01.12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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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술양식에 맞춰 보완 발전시켜야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전 서울대 초대 미술관장/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장/평창문화포럼 이사장
역대화론이 거의 전부가 필묵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보면 역시 동양화의 중심사상은 수묵정신으로 집약되며 이러한 정신을 표현하거나 이해하는데 필묵의 운용을 알아야 되기 때문에 용필용묵에 대한 사상적 배경은 동양의 모든 학문과도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일농묵을 사용하는 서예속에서도 용필의 조화에 따라 육채의 묵기가 신채를 발휘하는 것을 보면 묵기의 오색육채라는 것이 외화적 변용에 있기 보다는 운필의 묘리에 있으며 그 묘리는 곧 사의에 좌우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흉중 일기는 필세를 통해서 묵기에 머무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림에 육요라는 것이 있는데 기, 운, 사, 경, 필, 묵이 그것입니다. 여기서도 묵에 우선해서 필을 내세운 것은 바로 그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필에는 사세가 있는데 근, 골, 혈(氣), 육이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무생체의 필묵에 생명을 불어넣는 마술사와 같은 얘기입니다. 원래 필이란 비록 법칙에 따라 운전되고 변통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질(太質)해지거나 형사(形似)에 매이지 않고 무위자연스러워야 되며 묵은 높낮음과 깊고 얕음이 있어 문채가 자연스러우며 인쇄한 것처럼 붓자국에 한정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림의 품등에 신묘기교품이 있는데 신품(神品)의 경지라는 것은 붓 가는데 마다 유소불위해야되며 붓가는 대로 임수운필(任手運筆)하여서 취상(取象)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형호(荊浩)의 필법론에서도 필과 묵의 경향성과 우연성의 정신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고래로 필묵위상론은 동양화가 기운을 제일의로 삼아 왔던 때문이며 이러한 사상은 필연적으로 수묵화의 발전을 가져왔고 수묵화의 발전은 사의제일주의의 남종화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필묵은 형으로 감지할 수 있으나 천기는 감각으로 알 수 없으며 화법은 수련으로 습득할 수 있으나 기운은 수련으로 습득되지 못하니 감지할 수 있고 습득할 수 있는 필묵과 화법으로서 천기와 기운을 구하는 것이 필묵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수묵화는 필과 묵의 조화를 터득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홍곡자는 필곡묵육(筆骨墨肉)을 내세워 골육의 조화를 꾀했으며 그는 오도자의 유필무묵을 골승육이라 했고 반대로 항용의 유묵무필을 육승골이라 하여 둘을 모두 취함으로서 완전하게 했다고 합니다.

일찍이 오도자가 오대당풍의 선조법(線條法)으로 면과 색을 배제하는 수묵화풍을 보였고 이어 왕유가 필적경리한 선조(線條)의 파묵법(破墨法)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파묵법은 선담후농의 묵법으로 후에 왕흡(墨)의 발묵법인 선농후담의 묵법과 함께 수묵화의 량대기법이 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파묵은 형사를 초월하고 색채를 배제함으로서 수묵선조의 백묘법을 발전시키게 되고 필묵의 간소화경향은 이성의 석묵법으로 나타납니다.

이성은 먹을 금과 같이 아껴썼고 왕흡은 먹물 휘둘러 그렸으니 이성의 석묵법과 왕흡의 발묵법의 묘리를 알게되면 사혁(謝赫)의 화육법과 삼품의 반 이상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동기창은 그의 화선실수필에서 쓰고 있습니다. 수묵화에서는 운동태로서의 비존재형태 즉 경향성을 취상하게 됨으로서 낙필전의 입의(意在筆先)와 운필중의 간역(減筆惜墨)와 수필시의 미완(不患不了)을 형성상의 전통으로 삼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수묵화는 형모와 색채가 지나치게 뚜렷하고 완벽하게 갖추어져 너무 근세하고 교밀함이 로출되는 것을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필묵의 미완성을 염려하기보다 오히려 형사의 완료됨을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묵화는 형식으로 감지되고 습득될수 있는 필묵과 기법을 통해서 감지할 수도 습득할 수도 없는 우주의 진기에 합일하고자 하며 미완성의 완료라는 사의적 양식에 도달하는 높은 회화정신을 터득하게 됩니다.

오늘날 일부의 수묵화가 그 정신은 증발되고 형식적 잔해만 남아서 한낱 검정물감의 그림으로 전락하여 서양화의 약사형식인 Drawing과 구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구나 서양화의 조형론으로 우리의 수묵화를 분석평가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아주 불가능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얼마나 그 정곡을 찌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차제에 우리의 수묵화가 처해있는 현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오늘의 미술양식으로 미흡한 점을 보완하고 버릴 점은 용기있게 버리고 좋은 전통은 더욱 발전시켜야 될 과제를 안고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