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자 인터뷰-이현자 태평무전수조교] ‘올해 마중물은 달았다’
[수상자 인터뷰-이현자 태평무전수조교] ‘올해 마중물은 달았다’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정리-최영훈 기자
  • 승인 2014.01.2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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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문화대상 수상,2월 ‘인간문화재 시험’ 앞두고 춤인생 60년을 얘기하다

태평무의 대가로 꼽히는 이현자 선생. 어쩌면 시대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게 아닐까.

그 나이 열 여섯, 강선영 옹과 인연을 맺으며 춤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고혹적인 자태와 몸놀림으로 태평무에 매진한지 60여 년, 춤으로 산 인생만 ‘환갑’을 맞이했다.

하지만 시대는 이현자 선생에 대한 조명을 게을리 했다. 현재까지 1990년 태평무 전수조교로 지정된 것 외 그에 대한 다른 해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본지 <서울문화투데이>는 이런 시대에 대한 성찰의 의미를 담음과 동시에, 그간 무용계와 태평무 전수에 이바지해온 점을 들어 이 선생을 제5회 서울문화투데이문화대상 전통부문 대상 수여자로 결정한 바 있다.

이 선생에겐 본 상이 새해 희망찬 첫걸음을 알리는 의미였다. 이후 그에게 올해 또다른 ‘기회’가 주어질지 자못 관심이 쏠린다. 올 2월 전통 무용 부분에서 또 다른 인간문화재 탄생이 예고돼 있는 까닭이다.

‘운명의 날’을 앞두고 이 선생을 만나 강선영 선생과 식구처럼 동고동락할 당시부터 무용계 ‘드러나지 않은 거장’으로 우뚝 선 오늘날까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현자 선생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제5회 문화대상 수상 소식을 접한 이후 만난 그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띄고 본지 취재팀을 맞이했다. 이 상이 그에게 올 한해 기쁜 일을 몰고올 것 같은 예감을 줬기 때문이다.

▲ 태평무 전수조교 이현자 선생이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전통부문 대상을 수상한 뒤 인터뷰를 통해 소감을 피력하고 있다.

문화대상 수상을 두고 “정초부터 좋은 꿈을 꾸면서 새해를 시작한 것 같다”는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 전수조교로 한국을 대표하는 국보급 무용가다.

이 선생은 1936년생으로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지난해 무대에 오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점에서 한국 무용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인식된다. 태평무의 대가로 인정받는 이명자·양성옥 선생 모두 이 선생에게 배운 적이 있다.

무대를 벗어나서도 그는 늘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무용협회 이사, 전통무용분과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풍문여중고, 경기여중고, 이화여대 등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99년엔 제 11회 문화예술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60년 강선영 선생과의 인연…친어머니 같은 분”

그가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펼칠 수 있는 바탕엔 영원한 스승 강선영 선생이 존재한다. 강선영 선생은 태평무 중요무형문화재 92호 보유자로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비롯한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한국무용계의 거장이다. 인연은 19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풍문여고 1학년 재학 시절 이 선생은 강선영 선생과 첫 인연을 맺게 된다.

“고 1때 학교에서 연극을 하는데 시녀들 역할을 맡았습니다. 춤 동작이 필요해서 강 선생님을 찾아가 잠시 배우게 됐죠. 연극 때문에요. 큰 움직임은 아니었고 대여섯 동작 정도 배우게 됐는데 제 마음을 들뜨게 만든 거죠.”

연극이 끝난 후 이 선생은 다시 강 선생을 찾아갔다. 당시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고 창가에 있던 강 선생의 자태는 흡사 선녀가 앉아있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이렇게 고 1 소녀는 강 선생에 빠져들었고, 다시 춤으로 다다르게 된다.

이 선생이 춤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습소에서 간단한 동작이나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 이후 영화배우의 춤동작 가르친 인연으로 이 선생은 영화 ‘처녀별’에도 출연하게 되고, 이런 계기로 춤에 대한 의욕은 높아만 갔다.

강 선생이 태평무 보유자로 인정된 게 1988년이니 그보다 30년 이상 앞선 시절부터 둘이 함께 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을 모셔서 서로 가족같이 지냈죠. 춤을 배우는 것 뿐만 아니라 집안 대소사도 함께 했습니다. 저를 딸처럼 친자식처럼 챙겨주셨죠. 학원 일도 제게 많이 맡기셨어요. 그때는 선생님께서 태평무를 하신 게 아니라 승무를 하실 때였어요. 지금 수많은 제자 중에 제가 가장 처음 선생님 밑으로 들어간 거에요. 다른 무용가들은 태평무로 ‘인간 문화재’가 되신 뒤에 오게 된 거죠.”

강 선생은 만난 이 선생은 일생일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 대신 강 선생 문하의 생활을 선택하게 된 것.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 학원 일도 도맡아 했어요. 그러다가 3학년 때 대학에 가려고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네가 대학에 가면 학원 일은 어쩌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만류하셨죠. 제 어머니는 대학을 꼭 가라고 하셨는데 결국 대학을 가지 않았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게 저한텐 좀 마음 아픈 일이 됐어요. 후에 다른 무엇을 하려 해도 고졸 학력이 발목을 붙잡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요.”

때론 활기차게, 때론 서글프게…춤 인생 60년

강 선생과의 인연을 얘기할 때의 이 선생은, 전통춤을 출 때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 같았다. 때론 기쁘고 활기차게, 때론 서글프게 구술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선생님께서 문화재가 되시고 제자들이 많아지면서 제 학벌이 신경 쓰이셨나 봐요. 어느 날인가 갑자기 ‘이제 나오지 말라’고 하셨던 적이 있어요. 그때를 계기로 선생님 학원을 떠나서 제 학원을 차리게 됐습니다. 멀리 떨어지게 되니 어느샌가 선생님과 멀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죠.”

그 뒤에 이 선생은 홀로서기를 한다. 강 선생의 ‘첫 제자’가 아닌 무용가 이현자 스스로. 바쁜 나날이 시작됐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이후 학원을 운영하는 한편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무용가로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강 선생은 ‘그림자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스승이다. 복합적인 감정이 실린 적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보내는 영원한 사제 지간이다. 지난해 4월엔 그 존경의 뜻을 담아 ‘강선영 춤인생 80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강 선생의 제자 70여 명 중 1인이었지만 자신의 스승을 우러러보는 마음을 원없이 표출했다.

“여든에도 무대에 올라 행복 그 자체”

올해 일흔 아홉임에도 이 선생은 끊임없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지난해 5월에는 여류춤의 대가 8명이 모인 팔무전(八舞傳) 무대를 통해 강선영류 태평무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이 나이까지 춤을 출 수 있는 것이 다 강 선생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제 복인 거죠. 나이가 들수록 춤에 더 애착이 가고,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도 불안해도 춤을 추고, 기분이 좋아도 춤을 추는 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또 괜히 노는 시간을 없애려고 국악고등학교나 국악원 활동도 열심히 하려 하죠. 몸을 놀리지 않으면 마음에 잡념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지난해 공연 얘기를 듣고선 주위에서 ‘어떻게 지금도 몸이 말을 듣냐’며 놀라워 하세요. 주위를 둘러봐도 제 나이대까지 실제로 무대에 오르는 분들이 없죠. 저와 비슷한 다른 연배의 사람들을 보면 다 외롭게 지내는 것 같은데, 저는 복 받은 거죠. 하늘이 보살펴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 태평무 전수조교 이현자 선생이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인터뷰를 통해 춤 인생 60년 세월을 얘기하고 있다.

격조높은 정숙함 보여주는 태평무…내면의 미(美) 강조

태평무는 일제강점기에 한성준이 창안한 것으로 임금과 왕비가 태평성대를 바라는 의식에 기원을 둔, 발 디딤의 기교가 두드러지는 춤이다. 태평무는 강선영류와 한영숙류로 구분되는데, ‘한영숙류 태평무’는 정교한 발디딤의 묘미가 일품이며 ‘강선영류 태평무’는 빠른 장단에도 엄숙함과 장중함이 밴 팔사위가 우아한 특징이 있다. 이 선생은 산수(傘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강선영류 태평무의 참맛을 고스란히 살리고 있다.

“태평무는 한국 고유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세계 속의 춤’이라 여겨집니다. 예전에 외국에 공연을 다니면서 태평무를 통해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뽐내면, 그 공연을 본 외국인들이 무척 신비롭다고 했어요. 태평무는 옛날 왕과 왕비의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춤이에요. 그 격조 높은 정신으로 정숙함을 보여주는 동작들이죠. 그래서 마음에 안정을 주게 돼요. 이게 태평무의 매력이고, 제가 여태 태평무를 이어올 수 있던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 선생은 수많은 공연 외에도 교육자로서 전통 춤의 아름다움과 이에 담긴 정신까지 알려주고 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춤을 추는 사람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있어요. 춤을 추는 사람은 사치스러울 것이다, 끼가 많을 것이다, 자유분방할 것이다 이런 생각들요. 하지만 전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춤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더 바르고 정갈한 마음을 지녔다고나 할까요. 학생들에게도 이 점을 늘 강조해요. 겉이 아름다울수록 속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얘기를 늘 해요. 또 속이 꽉 차 있어야 진정한 무용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얘기도 전합니다. 무용가를 떠나서 사람 자체를 보고 봐도 매력 있고 속이 꽉 찬 인물이 돼야 한다고 말해요. 내실을 채우고 내면을 다져야 무대에서도 빛을 발하고 좋은 공연을 펼칠 수 있다고 얘기해줍니다.”

이와 함께 이 선생은 학생들에게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 보통 ‘대가’의 반열에 들어선 인물들은, 자신의 길 외에 다른 사람이 누리는 일상의 평범한 행복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 선생 또한 춤에만 매진할 것이라 여겼는데, 결혼 뒤에 생각의 변화가 많았다고 한다.

“혼자인 분들이 많으신데, 참 외로워 보여서 안타까워요. 물론 그 분들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저보다 더 춤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겠죠.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 예전에 작게나마 품고 있던 마음 속 비수 같은 날카로움이 무뎌졌다고나 할까요. 소위 산전수전 겪으면서 인생 선배로서 학생들에게 편안하게 충고도 할 수 있게 되더라구요. 춤을 인생을 표현하는 것이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전 좀 더 경험에서 얻은 살아있는 표현을 할 수 있지 않나하는 생각을 해요.”

2월 인간문화재 심사 앞둔 심정

춤의 대가로서 인정받고, 후학을 양성하며 무용계에 ‘이현자’ 이름 석자를 남겼지만, 본인은 아직 이뤄야 할 것이 많다고 얘기한다. 2월 ‘인간문화재’ 심사도 그 중 하나. 이 선생은 조심스레 그에 대한 뜻을 밝혔다.

“문화재 시험이 2월에 예정돼 있어요. 저도 ‘보유자’ 후보 중에 한명이죠. 지금까지 60년 태평무를 춰 온 점이 잘 보여지지 않을까 내심 설레는 마음도 있어요. 1951년 이후에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이 없으니까요. 어찌됐든 운명을 따라야겠죠. 가끔 잠이 안 올 때 이런 생각을 해요. ‘내가 만일 문화재가 된다면…’이란 생각요. 보통 인간문화재 분들의 작품비나 안무값이 상당히 비싼 편이거든요. 춤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더 적은 비용이 드는 방법까지도 생각해보곤 해요. 많은 분들이 더 쉽게 춤을 배울 수 있는 길을요. 많은 사람들이 태평무를 추며 태평성대를 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현자 선생 약력

1936년 1월 15일 출생
1951년 강선영 고전무용연구소
1952년 강선영 선생 태평무 사사
1956년 풍문여자중고등학, 경기여중고 무용 강사
1958년 이현자 고전무용학원 설립
1965~1967년, 1972~1973년 이화여자대학교 체육대학 무용학과 강사
1975~1984년 이현자 무용단
1982~2004년 한국무용협회 이사
1989년 제92호 중요무형문화재 태평무 이수자
1990년 제92호 중요무형문화재 태평무 전수조교
1992년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고급정책과정 수료
1999년 제11회 예술문화대상
2013년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전통부문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