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평론]정치와 미술시장
[박정수의 미술평론]정치와 미술시장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4.02.0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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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이나 대선, 지자체 선거에 임박하면 미술계도 은근히 들썩 거린다. 어디선가는 오는 6월 지자체 선거를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겨냥한 미술행사를 준비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선거에 임박하면 출판기념회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한 표라도 더 필요한 지자체에서는 문화예술을 이용한 표심잡기가 잘 먹힌다. 미술인도 여기에 편승한다. 정치적 편승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고 싶다는 욕망에서의 출발이다. 선거가 지나고 나면 미술인들이야 찬밥이거나 아는 사람에 지날 것임에 분명하지만 뭔가 얻을꺼리가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은 있다.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정치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60년대 고무신 선거부터 지금까지 투표장을 잊지 않으시는 노모(老母)께서도 누굴 찍어야할지는 분명히 알고 계신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이 정치에서 온전히 자유롭기란 몹시 어려운 문제다. 정치에 관심 없는 예술인이 있다손 치더라도 관심 없는(?) 정치에 반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구한말의 식민시대와 해방이후의 이념대립 시대, 정치독재의 시기를 겪으면서 현실에서 일탈되는 삶을 제공받는 대신 혼자만의 자유로움을 획득하였다.

사회적 가치에서 보자면 여건 속에서의 자유로움은 비현실적이며 인간의 삶과 의식에 별반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독자적 자유로움 이다. 도피를 위한 도피이며, 관여치 않겠다는 일탈의 과정이다.

예술가는 언제나 대립과 소통과 통합의 과정을 겪는다. 개인의 성향이거나 사회적 성향이거나 상관없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품이 형성된다. 80년대 민중미술과 90년대의 개념미술, 2천년대의 다양한 실험 미술 등이 사회와 간극을 유지한다. 융합되거나 흡수되거나 소외되거나 상관없이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유지한다.

이 때를 즈음한 90년대 이후가 되면 예술은 정치적인 문제와 자본주의라는 시장문제의 이중고를 겪는다.

예전 20년에 가까운 90년대에는 선거에 즈음하여 많은 전시가 발생했다. 때로는 선거자금을 확보를 위한 전시도 있었다. 특정 후보를 위한 전시에 미술품을 출품하면 그의 후원자가 작품을 매입하였다. 가격도 없었다. 봉투가 가격이었고, 출품자에게는 총액에 대한 총액에 대한 3.3%(주민세 및 소득세)를 제한 금액을 입금한 후 기본 가격의 50%를 제외한 나머지를 돌려받기도 했다.

소문도 없었고 뒷말도 없었다. 사람이 많으면 선거에 승리할 수밖에 없다. 표가 많다는 것도 있지만 다양한 통로에 귀가 열린다는 의미도 있다. 후보는 자신에게 충신하고 맹신하는 특정한 이들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그러한지는 잘 모를 일이다.

지금에 와서는 사회적 가치보다는 미술시장의 재화가치를 중심으로 미술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미술시장과 정치의 관계가 아주 밀접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돈과 관련된 부분에는 친밀하다. 일반적으로 비자금이 곧 정치자금이라는 등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비자금으로 미술품을 구입했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유명 미술가는 아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다. 유명미술가가 정치적이란 말이 아니다. 유명해지면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회성을 말한다. 그들은 동료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친분이 두텁다. 친분이 두텁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미술품으로 옮겨낸다. 자신이 믿고 추구하는 특정한 사회나 이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수용하려 든다. 그러다보니 이야기가 포괄적이고 객관적이다.

이도저도 아닌 이들은 자신이 아닌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은 대단히(?) 포괄적인 사상을 작품에 심는다. 결국 예술이란 사회 혹은 정치적인 부분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부정하거나 수용하거나 상관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