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살 영화도사 “또 영화 찍을 거다”
100살 영화도사 “또 영화 찍을 거다”
  • 김준현 기자
  • 승인 2009.07.09 1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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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영화인 출신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김수용 영화감독


지난달 28일 유현목 영화감독이 세상을 뜨면서, 한국의 제1세대 영화감독 중 김수용 감독이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관객 100만 명에 해당하는 1965년 작 ‘저 하늘에도 슬픔이’로 한국 영화에 한 획을 그은 그의 근황이 새삼 궁금해져, 서울 반포동 국립도서관 뒷산 숲속에 있는 대한민국예술원을 찾았다.

-<서울문화투데이>의 독자들이 감독님의 근황을 궁금해해서 찾아뵈었다. 2008년 6월쯤 어느 매체하고 한 인터뷰가 마지막이었는데,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줘서 감사한다.

처음엔 안 하려고 했는데 <서울문화투데이>라는 제호가 마음에 들어서 승낙했다.

-요즘도 일찍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는가?

잠은 저녁 7시에 자고 자정에 일어나 새벽 4시까지 할 일 하고 두 시간쯤 다시 잔다.

-부인도 사이클이 같은가?

우리 부부는 결혼 초기부터 따로였다. 아내는 학교 선생(전 리라초등학교 교사)이고 나는 영화감독이라 생활이 다르니까, 아내가 학교 갔다 퇴근하면 나는 (야간 촬영하러) 나가고, 그런 식이니깐.

-요즘 근황은?

내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다. 지금 2년 동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올 11월쯤 오픈 예정이다. 내가 청주대학교에 20년 있었는데, 거기서 영화계에 진출한 제자들만 200명쯤 된다. 그들이 중심이 돼 준비하고 있다.

-오는 12월이면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임기가 끝나는데 연임할 생각인가?

예술원 회장은 전체 회원들의 투표로 뽑는다. 무슨 선거운동을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 얼마나 인정을 받고 있나 하는 게 문제인데, 내가 소설 원작 영화를 많이 했으니 문학하는 회원들과 교류가 빈번하다. 음악 분야도 첫 작품인 ‘공처가’ 때 ‘가고파’의 김동진씨부터 교류가 있고, 그림도 내가 그림을 좋아하고 공부도 해서 제법 대화가 되니까, 회장으로 뽑힌 것 같다. 그러나 금년 말이 임기 마지막인데, 임기를 하루도 더 넘기지 않겠다. 이후의 인생은 나를 위해 쓰고 싶다.

-‘도시로 간 처녀’, ‘허튼소리’가 공륜에 의해서 가위질을 당했는데, 그런 분이 영상물등급위원장을 했다.

예술원 회원 중 영화에 제일 밝은 사람이 하라고 해서 갔다. 흥행이 걸리고 생존이 걸린 문제이다 보니 맨날 싸우는 자리인데, 사무실에 들어와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인다는 사람도 있었고, 내 앞에서 칼로 자기 배를 찌른 사람도 있었다. 힘도 들고 욕도 많이 먹은 자리지만 영화등급제를 자리잡게 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코미디물도 하고 멜로, 청춘물, 아동영화, 사극, 가정영화 등등 작품 경향이 다양한데 액션물은 없다. 이유가 있는가?

내가 싸움을 싫어한다. 그래서 영화 중에 액션 장면이 있으면 콘티를 다 만들어주고 조감독엑 찍으라고 한다.

-수많은 여배우들과 작업을 같이했는데 스캔들이 없었다.

배우는 남자든 여자든 직업상 동료일 뿐, 여배우를 이성적으로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여배우 이빈화가 아내의 중학교 후배여서 한때 우리집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나는 그때도 아내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같이 작업하는 사람에게 욕망을 느끼고 갈대처럼 흔들리면 예술가가 될 수 없다.

▲ 김수용 감독 '허튼소리'의 한 장면
-요즘 F4 꽃미남 배우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쁘다. 예쁜데, 남자는 성적으로 섹시해야 한다. 남자는 남자의 향기, 여자에게는 여자의 향기가 나야 하지 않는가.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

-소문난 주당이신데, 여전한가?

55년 동안 술먹었다. 그런데 지난 3월 15일부로 끊었다. 여기 학술원에 계신 분하고 누가 더 센가 먹었는데, 탈이 나서 끊어버렸다.

-건강은?

특별히 나쁘진 않지만 늙어서 다 퇴화되었다. 치아도 해넣고. 하지만 센스, 감성, 기억력은 쇠퇴하지 않은 것 같다. 평소 불경도 외우고 녹슬지 않도록 노력한다. 지금 예술원 회원이 총 88명인데 이름도 다 외우고 전공도 다 안다.

-요즘 어떤 책을 읽는가?

옛날엔 도스트예프스키, 톨스토이, 막심 고리끼 것을 읽었는데 요즘은 무라카미 하루키 것을 읽는다. 해변의 카프카 같은 것은 정말 대단하지 않는가. 책을 계속 읽으니 감성이 젊다.

▲ 영화 '갯마을'
-본인의 정신적인 나이는 몇 살쯤 된다고 생각하는가?

100살! 도사다. (웃음)

-유현목 감독이 별세했는데.

영화감독 제1세대 유현목 감독이 별세하고 3년 전에 신상옥씨가 별세했다. 신상옥씨는 영화는 즐거워야 한다고 했고, 유현목은 영화는 예술로서 사람들을 교화하고 정서적으로 정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나는 유 감독, 신 감독의 중간쯤이다. 흥미도 있고, 예술성도 있다고 평론가들이 그런다.

-앞으로 영화를 만들 계획은?

배우 신영균이 친구인데, 신상옥 빈소에 갔을 때 자기가 펀드 모아올 테니 영화 만들자고 했다. 대신 자기하고 최은희씨하고 각각 주연 하는 영화 두 편. 벌써 스토리가 머릿속에 다 완성돼 있다. 신영균이 허튼소리하는 친구가 아니니 곧 찍게 될 거다.

김수용 감독은...

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1929년생. 한글도 모른 채 일본어로 공부하던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체험한 마지막 세대.

고향인 안성 시내에 있는 애원극장의 빈 무대를 이용해 김세중(조각가)과 공동으로 3?1독립운동과 관련된 연극 ‘대지의 노을’ 공연. 직접 희곡에서 주연, 연출까지 1인 3, 4역을 했는데, 관객들의 호응이 제법 컸음.

1947년 상경, 서울사범학교(현 서울교육대학) 본과 재학 중 연극부 활동. 이때 유치진의 ‘춘향전’ ‘조국’ 등을 공연. 춘향전에서 이몽룡 역을 직접 했으니, 알고 보면 배우 출신이다.

6ㆍ25사변 때 육군 통역장교. 영어를 잘해서 바로 중위 진급. 휴전 후 국방부 정훈국으로 배속. 6개월간 전사 편찬작업 후 창설된 영화과로 소속을 옮기면서 인생의 진로가 영화로 잡힘.

충무로가 영화 기자재조차 턱없이 부족할 때 촬영제작 시스템이 갖춰진 국방부로 영화 인력이 몰림. 당시 영화과 과장이 선우휘 대령(소설가).

1956년 김수용 대위는 문관인 양주남 감독이 연출한 오영진의 시나리오 ‘배뱅이굿’의 조감독으로 참여. 주연배우는 이은관. 엄청나게 꼼꼼한 성격인 양 감독의 지시로 400장이 넘는 그림 형식의 촬영대본을 준비함. 연출 작업 시 찍을 장면을 반드시 수백 장의 삽화로 콘티를 만들어 활용하는 습관은 그때 생긴 것.

‘배뱅이굿’ 제작 다음해인 1958년 ‘공처가’가 첫 작품. 러시아 민화를 소재로 월남 작가 이태환의 시나리오, 영화음악은 ‘가고파’의 김동진이 맡아 국도극장에서 개봉.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비롯해 109편의 영화를 연출. 국내 최다 기록.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1965년 서울 인구가 당시 280만일 때 단 하나의 상영관인 국제극장에서 29만5천 명이 보았음. 실제 주인공인 윤복이의 고향인 대구에서는, 대구 인구가 60만인데 80만 관람이란 대기록 세움.

여배우 남정임의 데뷔 영화 ‘유정’도 국도극장에서 50일간 33만 명이 관람.

제작한 영화의 절반 이상이 소설 원작. 문예물 영화를 주로 만듦.

1980년대부터 대학에서 영화학 교수로 16년간 봉직했고,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도 역임.

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2007년 12월 취임)인데, 예술원 사상 첫 영화인 출신 회장.

‘배우보다 더 매력을 느끼며 살았다’는 조강지처 공숙영 여사를 한평생 사랑하며 2남 1녀를 훌륭한 사회 명사로 키워낸 가장.

장남 서울의대 성형외과 김석화 교수. 큰며느리 경찰병원 소아과 이인실 과장.

차남 용인대 생명공학과 김세화 교수. 사위 해양연구소 허회권 박사.

장손 서울의대 본과 재학 중.

백담사 오현 스님, 신흥사 마근 스님, 대흥사 월우 스님, 중광 스님과 인연이 깊은 독실한 불교 신자. 아내 공숙영 여사는 보문사 신도회장.

현재 50년 넘게 서울 장충동 1가 36번지에 살고 있음.

40여 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씀. 스스로에게 보여주는 양심백서. 일종의 참회록으로 죽기 전까지 쓸 예정.

1947 서울사범본과(현 서울교육대학) 졸업
1954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 PD
1958 극영화 감독
1973 서울예전 강사
1983~84 마닐라 국제영화제, 하와이 국제영화제, 이태리 페사로영화제 한국대표 참가
1985~95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1987 중앙대학교 및 대학원, 경희대학교 강사
1989. 4. 12 연극.영화.무용분과 회원(영화, 감독)
1992~93 몬트리올세계영화제, 동경국제영화제 심사위원
1999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2005~07 대한민국예술원 연극.영화.무용분과 회장
2007. 12 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상훈
서울시 문화상(1965), 아시아영화제 감독상(1969)
대한민국예술원상(1990), 일본 영화비평가 대상(1997)
일본 가톨릭영화상(1997), 은관문화훈장(1999)
기독교문화예술대상(1999), 일ㆍ한문화기금상(1999)
한국일보 연극영화예술상 3회. 청룡상 감독상 2회, 작품상 2회
대종상 감독상 3회, 작품상 3회 등.
 
주요 작품 및 예술활동
「공처가」(1958), 「굴비」(1963),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갯마을」(1965),「유정」(1966),「산불」「안개」「만선」(1967)
「무영탑」(1970),「토지」(1974),「만추」(1981) 「피에로와 국화」(1982),
「허튼소리」(1986),「사랑의 묵시록」(1995) 등 다수

저서
「영화란 무엇인가」(공저), 「5C-영화술」(역서), 「예술가의 삶」「영화를 뜨겁게 하는 것을」 등

서울문화투데이 김준현 기자  jhk@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