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 예술인 뒷받침 해주는 뿌리의 삶 50년… “난 모든 예술인의 가장 열렬한 팬”
[인터뷰 -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 예술인 뒷받침 해주는 뿌리의 삶 50년… “난 모든 예술인의 가장 열렬한 팬”
  • 윤다함 기자
  • 승인 2014.03.1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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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예술경영 인생 “공연예술인력 복덕방 업자 되고 싶어”

문화예술행정의 달인 50년 인생 기록 『공연의 탄생』 엮어 출간

‘한 편의 연극처럼 훌쩍 지나갔다.’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은 지나온 80년 세월이 그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술 행정가로서 걸어온 50년의 시간만큼은 또렷하다고 덧붙였다. 올해 팔순을 맞은 그가 지난 50년간 무대 뒤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과 쌓은 인연의 기록물, 무대에 관한 탐험기 등을 담아 자전적 에세이 『공연의 탄생』을 출간했다.

1935년 일본 출생 / 현재 충무아트홀 사장 / 문화공보부 정책연구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 서울예술단 이사장, 예술의 전당 사장, 아시아태평양공연예술센타연합회 회장,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세종문화회관 총감독 사장, 성남아트센터 사장, 제주세계델픽대회 조직위원장 등 역임 / 문화공보부장관표창, 보국훈장 삼일장, 국민훈장 목련장, 국무총리 표창, 석주미술상 특별상, 제16회 한국뮤지컬대상 특별상, 문화경영 명인상 등 수상

한국 현대무용의 대모 육완순, 태평무의 대가 강선영, 지휘자 정명훈, 발레리나 강수진 등 오랜 시간 인연을 맺어온 예술인들과의 에피소드부터 그가 책임졌던 공연장과 올렸던 공연 무대 이야기 등을 담았다. 무대 흐름에 맞춰 컬러 필름을 바꾸고, 출연자 얼굴을 향해 직접 조명 방향을 돌려야 했던 어설픈 기술의 1960~70년대의 무대 이야기도 눈에 띈다.

이 사장과 예술인들과의 인연은 필연적이었다.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시험에 단번에 붙은 그는 당시 군사정권의 최고 권력기관이던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2년 정도 지났을까,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민정이양의 실시와 함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해체됐고 그는 공보부로 발령받는다. 당시 예술의 꽃이라면 단연 ‘영화’였다. 화려함에 끌려 영화과에 지원하지만 공보부 차관이었던 고종사촌 매형은 그런 그를 말렸다고 한다. 유명한 배우와 감독들을 자주 만날 수 있는 영화과에 가겠다는데 못 가게 말리는 매형에게 처음에는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고. “매형은 내게 문화과를 가라고 권했어요. 영화계 업자들의 깔끔하지 못한 일처리가 나와는 맞지 않을 거라면서요. 공무원 비리문제로 담당자가 자주 바뀌곤 하던 데가 영화과였거든요” 매형의 혜안과 그때 그의 변심(?)을 계기로 그는 공연예술 분야의 행정가로서 지금까지 예술인들과 50년을 함께 해올 수 있었다.

문공부의 야인野人… 예술인 편들다 따돌림 당하기도

문화과의 업무는 식물의 뿌리 역할과도 같았다. 궁극적으로는 꽃을 빛나게 하고, 줄기와 잎들이 생산한 광합성의 결과물에 의지하는 뿌리. 그는 그러한 뿌리의 삶을 살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예술가와 대중연예인들이 보다 편하게 예술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내 업무였습니다. 그들을 직접 만날 때면 다짐하곤 했죠. 대등한 관계로, 인간적으로 가까워지자고 말예요.”

연예인이라면 ‘딴따라’라고 깔보고,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현저히 낮았던 시절, 공무원이라면 더군다나 문화과 공무원이라면 예술인들 앞에서 목에 힘주고 다니며 거만을 떨던 때였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 필요한 협력 관계란 것을 일찍이 깨달았던 그는 예술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예술인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불필요한 행정 절차나 공무원의 부끄러운 구태에 맞서 정면대결에 나선다. “일처리를 위해선 민원인이 당연히 돈 봉투를 챙겨 와야 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었어요. 이런 말이 안 되는 관행을 거부하고 바른길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내가 모셨던 과장, 국장 처지에서는 아마 내가 눈엣가시였을 겁니다.(웃음)”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정작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왕따를 당할 정도였다고 그가 회상했다.

리더는 참모를 잘 만나야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이 사장 역시 CEO의 성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참모라고 강조했다. “나는 능력 있는 참모들을 만나 함께 일하는 행운을 여러 차례 누렸어요. 그들이 있었기에 ‘조직이 예전과 달라졌다’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죠. 젊고 유망하던 그들이 이제는 때가 돼 큰 자리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 ‘삶의 희열’이란 표현은 이럴 때 써야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공연문화계 이끄는 ‘이종덕 사단’

박인건 KBS교향악단 사장, 안호상 국립중앙극장장, 김승업 부산영화의전당 대표, 노재천 안양문화예술재단 대표이사, 김의준 국립오페라단장, 이창기 강동아트센터 관장 등이 그가 ‘삶의 희열’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표적인 참모들이다. 현재 공연예술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이 이 사장에게서 배운 것은 바로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작은 인연이라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얻어내는 법을 알았던 이 사장은 예술인들에게 오빠, 형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사람을 도구화하지 않고, 소모적인 인간관계를 지양하며, 예술인들을 존경하고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던 이 사장의 진리가 ‘이종덕 사단’이라 불리며 오늘날 대한민국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CEO들을 만든 것이다.

특히 이들은 『공연의 탄생』 출간과 관련해 지난 1월 이 사장을 위한 헌정출판기념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헌정출판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후배들의 말을 들은 그는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한다. “남들 보면 웃는다고 내가 하지 말랬어요. 근데 우리(충무아트홀) 문화사업부장이 헌정출판회가 좋은 생각 같다는 거예요. 내가 신뢰하고 좋아하는 직원이긴 하지만 솔직히 사적으로 가까운 건 아니었는데,(웃음)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게 일반적인 생각인가보다 하고 객관성이 좀 더해지는 느낌이더군요. 그래서 출판기념회까지 열게 됐습니다.” 1월 21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이날 자리에는 유진룡 문화체육부장관, 김동호 대통령직속 문화융성위원장,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안숙선 명창, 장사익, 배우 문희 등 다수의 문화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공연의 탄생』은 이 사장의 자전적 에세이이면서, 그의 제자와 후배들 그리고 동료 문화예술인들이 스승이자 선배인 그에게 헌정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 기획의도에 맞게 책머리에는 발레리나 강수진,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 영화배우 문희, 연극배우 박정자, 지휘자 정명훈 등 우리나라 공연예술계 명사 5인의 축사가 실려 있다. 특히 영화배우 문희는 이 사장을 두고 ‘배우가 앞 광대라면 무대 뒤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배우를 돕는 사람인 뒷 광대’라고 표현했는데, 자신을 진정 알고 써준 말인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이 사장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 및 기획이사, 88서울예술단 단장,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거쳐 1995년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본격적인 예술전문 CEO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민영화한 세종문화회관 초대 사장, 성남아트센터 초대 관장 그리고 현재 뮤지컬의 메카로 부상한 충무아트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공립 예술기관을 운영해오며, 문화융성에 기여한 대한민국 공연예술의 산증인이다. 또한 부임하는 곳마다 거짓말처럼 공연장이 활성화 되고, 관객을 끌어 모으는 등 그만의 마법 아닌 마법 같은 행정으로 각 공연장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왔다.

‘미다스의 손’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등 성공 가도에…

그는 단체, 후원회 등 모임을 만들고 조직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조직화에 능하고,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천성 때문이다. 이를 적극 살려, 예술의전당에 부임했을 당시 39%였던 재정자립도를 예술의전당 후원회를 만들어 64.7%까지 급신장시키고, 순식간에 회원 120명을 확보, 후원금만도 7억여 원을 모으기도 했다. 이후, 민영화된 세종문화회관의 첫 민영인 사장이 된 그는 이번에도 후원회 조직에 앞장섰다. 이는 2000년 19.5%의 재정자립도를 2년 뒤 36.3%까지 끌어올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더불어 전국 극장 가운데 ‘가장 우수한 극장’으로 선정되는 쾌거도 얻었다. 이외에도 낭만파클럽, 전국문예회관연합회(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전신), 아시아+태평양지역 아트센터연합회, 광화문포럼 등을 만들어 문화예술계 인사 및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독려해왔다. 하지만 정작 모임은 자신이 만들어놓고 회장을 맡진 않았단다. “마치 내가 후원회나 단체를 만드는 게 꿈인 사람인 것 같죠?(웃음) 사람들과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해 기꺼이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었죠. 모임이 하도 많아서 그 모임만으로도 바쁠 지경이지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내가 나서서 이런 걸 만들고 주도해야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후원회 창립도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제가 솔선해서 후원회비도 내고 그래야 사람들이 따라옵니다. 내가 단체를 만들었더라도 회장을 맡지 않고, 적합한 다른 인물들에게 직책을 맡겼어요. 나도 자리를 내줄 수 있어서 기쁘고, 또 직책을 맡은 분은 자리를 얻어서 기쁘고…. 여러 가지 이유로 모임 만드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지난 출판기념회에서 그는 “죽는 날까지 ‘꽃자리’를 찾아 예술가를 후원하고 사람을 키우는 데 온 힘을 바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가 말한 ‘꽃자리’는 구상 시인의 <꽃자리>란 시를 뜻한다. 힘들 때면 그의 마음을 다잡아주는 중심추와도 같은 시이다. 그가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성남아트센터, 충무아트홀로 자리를 옮길 때에도 10여 년 동안 한 결 같이 집무실 한 편에 걸려있는  ‘꽃자리 표구 액자’는 그를 거쳐 간 직원이라면 모를 리 없을 정도. (시는 다음과 같다. 앉은 자리가/꽃자리니라/네가 시방/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 -편집자 주) “예술의전당 역사상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나는 첫 사장으로서 자리에서 내려오는 날, 직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 중엔 눈물을 흘리던 직원도 있었죠. 그리고 1년 뒤, 세종문화회관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는데, 평소 가깝게 지내던 구상 시인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건네더군요. ‘예술의전당을 그만큼 잘 키워놓고 다시 세종문화회관으로 가다니, 내가 다 쓸쓸해지네.’라고요. 그리곤 6개월쯤 지나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으로부터 액자 하나를 전달받았죠. 액자 안에는 구상 선생이 손수 지은 시 <꽃자리>가 적혀있었어요. 그 즈음 내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은 시였다고나 할까요. 내 속내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나던 순간이었습니다.”

“은퇴 후 후학 양성에 집중할 것”

그는 2003년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예술 최고경영자과정 주임교수가 된다. 국내 최초로 개설되는 과정이었기에 그에 관한 정보 축적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런 만큼 그만한 적격자가 있었을까. 신입생 모집에는 정원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인원이 지원해 기대 이상의 고지高地에서 첫 시작점을 찍었다. 그가 6기까지 주임교수로 있는 동안 480명이 졸업하고, 덩달아 타 대학들에서도 앞 다퉈 문화예술경영 최고과정 개설에 나섰다. 그는 단국대가 ‘대중문화예술경영 분야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듣게 한 일등 공신이다. 이에 지난해 단국대 명예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충무아트홀 사장의 임기가 끝나는 대로(2015년 1월)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으로서 후학 양성에 힘쓸 계획이다. 

그의 인생은 끝나지 않는 무대와도 같다. 500여 편의 숱한 무대를 만들어왔으며, 무대를 생명처럼 여기며 달려왔다. 그런 무대 역시 자신을 만들어왔다고 그는 회고한다. 모든 예술인의 가장 열렬한 팬이었던 그가 만약 없었더라면 오늘날 국내 공연예술계는 어떤 분위기로 어떤 모습일까? 헌신적이고도 강직한 원로로서의 그가 팔순의 나이에도 예술인들과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음에 감사하다. “내게 남겨진 재산은 부도 명에도 아닌 문화예술계 전반의 넓고 촘촘한 인맥뿐입니다. 이 인맥으로, 문화예술계란 험난한 지형에 막 첫발을 내딛는 인재들을 위한 공연예술 분야의 인력 복덕방 업자가 되고 싶습니다. 물론 중개수수료는 없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