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칼럼]탕아타 훼누아의 혼이 살아 있는 오클랜드
[여행칼럼]탕아타 훼누아의 혼이 살아 있는 오클랜드
  • 정희섭 글로벌문화평론가/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겸
  • 승인 2014.03.2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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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섭 글로벌문화평론가/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겸임교수
와이셔츠를 삼사일 동안이나 계속 입고 다녀도 깃이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나라는 청정(淸淨)하다. 나라이름에 괜히 ‘new’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 오클랜드(Auckland)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것도 혼합하지 않은 순수한 맛의 공기가 나의 혼을 흔들어 깨운다. 국가 명칭에 ‘land’ 가 들어가는데 가장 큰 도시 이름에도 ‘land’ 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북섬과 남섬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에선 땅이란 참으로 귀중한 의미를 가졌나 보다. 땅이란 모든 것이 발원하는 곳이고 땅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아늑한 존재인 것이다.

작열하는 태양빛에 피부를 그을리며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모습은 텔레비전에서 간혹 봤었지만 내가 직접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2004년 여름 이 남반구의 섬나라에서 스키를 즐길 줄이야. 기계로 흩뿌리는 인공적인 눈이 아닌 자연이 만든 눈 위를 질주하는 짜릿한 기분이란 북반구 출신인 내게 남반구의 뉴질랜드가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좋은 품질의 와인으로 유명한 이 ‘와인 강국’에서 애주가인 나는 매일 매일이 행복했다.

맛은 대단히 훌륭하나 가격은 너무도 착한 ‘신의 물방울’을 오클랜드에서 한없이 즐겼다. 뉴질랜드 달러로 3불이면 살 수 있는 와인이 왜 우리나라로 건너가면 2만원이 훌쩍 넘어 버리는 지 의문이 들었지만 와인의 향기로 취해버린 나의 뇌는 더 이상 통상의 경제학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한국으로 귀국해서 괘씸할 정도로 비싼 와인 가격을 직면했을 때야 비로소 나는 ‘와인 경제학’ 을 다시 생각했다.

▲나무가 집보다 많은 일반 주택가의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오클랜드에는 볼 것이 참 많다. 이 도시에선 집보다 나무가 더 많은 주택가 자체가 큰 볼거리가 된다. 에덴동산으로 명명된 분화구를 오르고, 한 때는 쓰레기 소각장이었지만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어 버린 빅토리아 파크 마켓(Victoria Park Market)을 거닌다. 소각장을 관광명소로 바꾼 오클랜드 시의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하얀 자태를 뽐내는 오클랜드 미술관을 천천히 돌아보는 사이 해는 서서히 그 힘을 잃고 남반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라는 스카이 타워로 바통을 넘긴다.

타워 위에서 내려다보는 오클랜드의 야경은 장관이었다. 지금껏 많은 도시의 타워에 올라 야경을 즐겼지만 오클랜드 스카이 타워가 보여주는 그 것은 남다르게 묵직했다. 갑자기 이 땅의 원래 주인인 마오리 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땅 위로 높게 올려 진 형형색색의 빌딩은 백인 자본가들이 세워 올린 것이겠지만 이 땅은 마오리 족의 것이었다. 야경을 야경으로 즐기지 못하고 역사적인 것으로 파고드는 나의 고질병(?)이 도진다.

마오리 족은 스스로를 탕아타 훼누아(Tangata Whenua)라고 부른다. 땅의 종족이란 뜻이다. 땅의 종족은 그 땅을 잃어버리고 힘도 많이 약해졌지만 도시 곳곳에 그들의 혼을 심어 놓은 것 같다. 탕아타 훼누아가 심어 놓은 혼이 야경의 색깔과 분위기마저 달리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국가와 도시의 이름에 모두 들어가 있는 ‘land’라는 말이 쉽게 들리지 않는다. 땅의 종족이 심어 놓은 암시처럼 다가온다. 스카이 타워 위에서 바라다보는 저 아래의 깨알 같은 자동차들의 움직임이 마오리 족 전통춤의 리듬을 닮았다.

와인애호가에게도 좋다. 나무가 많은 도시를 디자인하는 행정가나 건축가에게도 좋다. 더울 때 더위를 피해서, 추울 때 추위를 피해서 가도 좋다. 그리고 힘으로 빼앗을 수는 있지만 혼은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느낌을 가져보고 싶은 이에게는 더 좋을 듯싶다. 탕아타 훼누아의 외침이 아직도 들리는 도시 오클랜드의 분위기를 다시 느끼고 싶다.